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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49화 (49/147)

#49

어떤 감정들은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염되기 쉬워, 세이아드 또한 잡고 있는 손이 신경 쓰였다. 어쨌든 레사스가 원하는 바대로 악수 비슷한 걸 응했으니 놓아도 되겠지, 싶어 힘을 풀었다. 그러나 레사스가 놔주질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잡고 있는 손을 어딘지 멍하게 보고 있던 레사스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무표정해진 얼굴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춤 추기로 약조한 걸 잊으셨나요?”

“그건 꾸며 낸 말인줄 알았습니다.”

“아니, 진심이었는걸요. 약속했잖아요, 내가 성인이 되면 무도회장에서 한 번은 나와 춤추겠다고.”

까마득한 어릴 적의 일을 레사스가 꺼내 왔다. 그 시절이 레사스에게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걸 막 확인한 차여서, 세이아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도 했다. 다만 무슨 재미가 있나 싶었다.

“같은 남자끼리 추는 춤은 그다지 재미가 없습니다. 여인과 짝을 이뤄 박자를 맞추는 것이 더 즐거운 텐데요.”

그의 말에 레사스는 무언가, 아주 크게 놀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보랏빛 아름다운 눈이 멍하니 커지더니 이내 속눈썹이 혼란스러운 듯 깜빡였다.

“…대공이 여자를 좋아했던가요?”

이 상황에, 이 순간에 갑작스레 나올 법한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레사스가 진실되게 놀라 보였기 때문에 세이아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따지자면 그는 여자를 좋아했다. 성욕이 강한 편이 아니고 그를 두려워하는 이가 많아 여자조차도 멀리한 지 오래되었지만, 지난 과거에서는 종종 아스테르와의 정화로 인해 자연스레 피어오른 욕정을 스쳐 가는 이와 푼 적이 많았다. 원체 티테르와 가이드의 관계가 동성끼리의 접촉도 감안하는 것이 당연해 넘겼을 뿐, 남자를 더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정화는, 어떻게…?”

제대로 된 문장이 되지 못하고 레사스로부터 띄엄띄엄 떨어져 나온 말을 세이아드는 용케 알아들었다.

“티테르와 가이드의 접촉은 별개입니다. 전하께서도 교육받으셨을 텐데요.”

레사스는 긴 속눈썹을 말 없이 깜빡거리기만 했다. 무엇에 그리 놀랐는지는 몰라도 세이아드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레사스는 그리 오래 생각에 잠기지 않았다.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이마 위로 드리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한쪽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그래도 춤은 출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세이아드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곤 레사스의 손을 당겼다. 춤을 추자고 말해 놓고도 막상 시작하는 법을 모르는 걸 보니, 이끄는 것은 제 역할이었다.

“춤은 많이 춰 보셨습니까?”

“아뇨. 이렇게 큰 연회에 참여한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레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허락한 적 없으셔서.”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되뇌던 그가 아, 하며 순식간에 눈썹을 부드럽게 모로 휘었다.

“왕후 폐하 이야기를 일부러 꺼낸 건 아니에요. 불편했나요?”

“얼굴만 뵙지 않는다면 별 상관 없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믿긴 어렵지만, 왕후의 존재가 레사스에게 그렇게까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듣고 나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크게 역겹진 않았다. 애당초 되살아난 이후 그의 강렬하던 증오는 전보다 한층 꺾여, 오직 세이아드 자신만을 향한 자책만이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제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십시오.”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말이, 마치 경건한 명령이라도 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보라색 눈이 세이아드를 안에 새겼다.

팔을 당긴 세이아드는 그대로 레사스의 허리를 안았다. 겉으로 보기엔 세이아드보다 늘씬해 보이던 허리는 의외로 팔 안에 다 감기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는 등허리에 잡힌 근육이 생각보다 탄탄하고 부피가 있었다. 검술에 능하다는 것은 지난 겨울에 목격해 알곤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잘 단련된 몸이었다.

“상대가 흔들리지 않게 허리를 받치고….”

손바닥이 허리를 단단히 붙들자 레사스의 등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낮에 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과 반대로 제 허리를 받쳤던 레사스의 팔이 잘게 떨렸던 걸 생각하니 그게 조금 우스웠다.

반년 새 커져 버린 몸만큼 성격도 원숙해졌다고 여겼는데, 이래서는 정화를 어떻게 할지가 의문이었다.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길래 준비가 다 되었나 여겼으나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같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발을 맞춰 움직이십시오.”

낮의 일에 대한 복수로 세이아드는 일부러 몸을 밀착했다. 허리를 단단히 죄고는 맞잡은 다른 쪽 손을 꽉 쥐었다. 어지러운 듯 휘청이는 레사스를 따라가며 온통 제멋대로인 궤적에 일일이 맞췄다. 세이아드의 몸이 붙어 올수록 흰색 레사스의 정복 너머로 체온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어찌나 빠르게 달아올랐는지 세이아드도 이때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세, 이아드.”

레사스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중저음이 한층 낮아져 갈라진 저음이 되었다. 맞잡은 레사스의 손이 움찔거리고 튀었다가 다시 그를 붙들기를 반복했다.

“네.”

코가 닿을 듯 가까워진 바람에 얕은 숨이 레사스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너른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세이아드를 내려다보는 레사스의 흰 얼굴이 무척 창백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재차 물어보려는 차에, 레사스가 작게 속삭였다.

“춤을 추는 것도… 입을 맞추는 것처럼,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건가요?”

그 순간 서로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세이아드 또한 자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낮의 레사스가 괘씸했다는 생각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불필요하게 가까운 거리였다.

서로의 상이 눈동자에 맺힌게 보일 정도로 붙은 채 침묵이 내려앉았다. 색색거리는 레사스의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커지다 작아지는 게 생생히 들렸다.

불어온 봄바람 때문인지 몰라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쓸데없이 상세하게 눈에 잡혔다. 무언가 벅찬 듯, 아주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이 살짝 휘어진 검은 눈썹을 보고 있으려니 세이아드의 속도 울렁였다.

하아….

레사스가 꾹꾹 참아 왔던 숨을 겨우 내쉬는 것을 신호로, 세이아드는 허리를 받치던 손을 놓았다. 붙잡던 손을 순식간에 풀며 한걸음 물러섰다. 잘게 떨리던 레사스의 호흡이 귓가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갑자기 속이 더워져 세이아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수도의 봄은 북부의 여름처럼 더웠다.

“춤은 이렇게 추시면 됩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질문엔 답할 수 없었다. 격한 춤을 출때면 몰라도 이렇게 간단한 동작으로 숨이 막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은 세이아드 또한 그 감각을 느꼈기에, 레사스의 질문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못했다.

“…그렇군요.”

짧은 침묵 후에 흘러나온 레사스의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다. 소년처럼 묻던 모습과 달리 갈라져 흐른 저음은 완연한 성인 남성의 것이었다. 기이했다.

“…네, 그렇습니다.”

서로,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그것 외엔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어쩐지 머릿속이 멍했다. 견디기 어려운 긴장감이 목구멍을 막아 와 세이아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결국 세이아드는 이제 정말 처소로 돌아갈 시간임을 상기했다.

“용건이 끝나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몸을 돌리기도 전에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손을 잡았다. 방금까지도 잡고 놓던 것이니 이젠 덤덤할 법도 한데 순간 덴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축제가 끝나는 이주일 뒤부터는 숲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레사스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 마지막 질문을 할때쯤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아졌다.

“내일부터, 미리 준비하고 싶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세이아드도 알았다. 낮에 있던 정화는 분명 임시 방편이었으므로, 겨우내 싸인 부작용을 풀어 내고 전투에 대비하려면 레사스의 말을 따라야 했다. 알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아까부터 자꾸만 레사스의 증상이 옮는 것인지 목이 잠겼다.

음.

낮게 목 안을 울려 본 뒤 세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턱을 하염없이 보던 레사스가 천천히 세이아드의 손을 놓아주었다. 겨우 숨을 쉬게 된 기분에 세이아드는 얼른 뒤돌아섰다. 문득 정화에 대한 베트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숨통이 트이고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고.

살아있는 드는 기분이 드는 건 맞는데, 숨통이 트이는 대신 외려 막히는 건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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