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50화 (50/147)

#50

간밤에 레사스와 나름의 합의를 내린 까닭인가. 세이아드는 간만에 세실리아의 꿈을 꿨다. 동생처럼 여기던 존재를 결국 삶에 다시 들인 것때문인지,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던 친동생의 부재가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죽음에서 돌아온 뒤부터 세이아드는 내내, 이 불가능한 일이 어쩌면 세실리아와 연관된 게 아닌지를 생각해 왔다.

물론 말이 되지 않는 가능성에 가깝다. 그 어떤 능력도 시간을 다루진 못했으며, 세실리아의 힘은 예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세이아드의 미래를 짚어 냈으니, 설령 그녀가 관여한 게 아니더라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세이아드는 수도에 올라온 이 시기에 세실리아에게 한 번 가 보는 게 맞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실리아는 수도와 브레드히트 공작령 중간쯤에 위치한 숙부의 영지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고, 숙부의 저택은 축제가 끝나고 조사가 시작되기 전 충분히 오갈 만한 거리에 있었다. 겨울 동안엔 악시드 영지를 떠날 수 없이 섣불리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으니 지금이 적기였다.

가장 처참하게 망가져 되돌릴 수 없을 거라 믿은 관계를 들여다본 이후, 세이아드는 자신이 단절한 것들을 되돌아볼 용기를 얻었다. 세실리아와의 일은 세이아드 본인에게도 복잡한 일이었지만, 그런 감정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각하, 이것 좀 보세요!”

어젯밤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싶어 왕궁 서고에서 빼돌린 책을 보고 있던 차, 퀼리가 요란을 떨며 들어왔다. 슬쩍 고개만 돌리자 퀼리가 손에 초대장 세 개를 들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각하께 글쎄 초대장이 왔지 뭡니까! 그것도 세 개나요! 어디 보자. 제가 대신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노바 브레드히트 공녀의 초대장이고, 다른 하나는 스텔라 베트리아 양의 초대장이네요. 그리고 마지막은….”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던 과거에 비하면 분명 큰 발전이었지만, 저렇게 요란을 떨 일은 아니었다. 세이아드는 다시금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번을 훑어봤지만 가이드의 정화가 티테르에게 독이 되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서고 전체를 훑어봐야겠군.

정식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결국 국왕의 인가가 필요한데, 국왕의 성격상 티테르인 세이아드가 가이드에게 관심 가지는 걸 용납할 리 없다. 그러려면 편리하게 동행할 사람을 이용해야 하는데, 한 명은 세이아드가 현재 조사하고 있는 대상인 아스테르였고, 다른 하나는….

“레사스 전하의 초대장이네요. 전 또 각하께 새로운 인연이 생기셨나 했는데 말입니다.”

어차피 레사스를 보기로 했으니, 세이아드는 이 김에 그를 이용하기로 했다. 레사스와 차라리 나름대로 서로를 용인하는 관계를 가지니 쓸 곳이 많았다.

“그래도 스텔라 아가씨와는 아주 오랜만에 연락하시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두 분이 잘 어울리는 한쌍인건 왕국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잖아요. 아무래도 셀피니 님의 일이 있으니 다시금 베트리아와 교류하게 되려나 싶어, 이 퀼리는 아주 기쁩니다.”

퀼리의 망상이 절정에 이르던 찰나, 처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각하, 계십니까? 레사스 전하께서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퀼리가 들고 있는 초대장을 보았다.

“이상하네요. 초대장은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됐다. 스텔라에게는 내일 중 편한 시간을 보자고 하고, 브레드히트 공녀에게는 토벌 때 뵙자고 전해.”

“이야, 스텔라 아가씨가 아니면 곁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심이실까요?”

“퀼리.”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것이 퀼리이긴 했으나, 세이아드는 자신이 지나치게 주변의 모든 이들과 안락해지는 것은 경계하고 싶었다. 그가 저지른 잘못을 되돌리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나, 그렇다고 하여 세이아드 자신이 웃고 떠들며 평안한 삶을 살 자격은 없었으니까.

“너는 네 볼일을 보거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굳이 아끼지 말고 쓰도록.”

퀼리는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지만 세이아드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갈 채비는 끝낸 뒤였기에 세이아드는 방을 나서 응접실로 향했다. 거기엔 기사들을 대동한 레사스가 있었다.

초대장을 보내 놓고 답을 받기도 전에 찾아온 레사스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세이아드의 눈에 빨간 머리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주근깨가 살짝 박힌 얼굴이 어딘지 낯에 익었다. 지난 겨울 레사스가 데려왔던 어린 기사들 중 한명이 문득 떠올랐다.

‘솔리아스의 악마….’

어둠 속의 세이아드를 보며 두려움에 가득한 중얼거림을 뱉었던 어린 기사였다. 그의 기억이 맞았는지, 시선을 느낀 기사가 세이아드를 흘끗 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얼핏 스친 두려움과 적대감이 훤히 보였다.

‘티아키가 분명 빨간 머리라고 했었지. 그리고 소속은 별의 은총이었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빨간 머리의 기사를 찾자 뭔가 석연찮았다. 운 좋은 우연인가 싶으면서도 하필 레사스의 옆에 빨간 머리의 기사가 있다는 게 이상했다. 일단은 그를 눈여겨본 뒤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로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좋은 점심이에요, 세이아드.”

대공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에 레사스의 뒤에 있던 빨간 머리 기사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 근위대 중에는 세이아드를 거북해하는 이가 많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우연찮은 존재가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식사는 했나요? 같이 들기 위해 초대장을 미리 보냈거든요.”

초대장을 보기 전 이른 점심을 들었다. 먹었다고 말하려던 세이아드는, 마치 거절은 생각하지 못하고 얌전히 그의 답을 기다리는 보라색 눈을 보며 멈칫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놓아 버린 과거같았다. 레사스는 세이아드에게 허락을 구할 때면 눈도 깜빡이질 않고 저리 간절하게 절 쳐다보곤 했었다.

더군다나 다 큰 얼굴로 저리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세월의 흔적이 같이 느껴졌다. 시간이 한참 흐른 이 나이까지도 저를 완전히 미워하지 않고 있었다는 고백이 실감났다. 밀어내고 상처 줬던 시기가 길었어서, 거절을 하는 게 어려웠다.

어쩔 수 없군.

초대장을 받아 놓고도 방치한 탓에 확인이 늦은 것은 세이아드의 잘못이었으니, 그는 적당한 거짓말을 했다.

“아직입니다.”

“그럼 같이 먹어요.”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아서 정찬을 먹고 싶진 않습니다.”

“그럼 나의 궁에서 간단히 들어요. 오늘부터는 정화도 연습하기로 했으니까요.”

빨간 머리 기사의 얼굴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두려움보다는 유독 적대감이 느껴지는 모습에 세이아드는 유심히 그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감정이 마음에 걸렸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소재를 파악했으니 급할 건 없다. 세이아드는 사냥에 나서기 전 레사스에게 진 빚을 일차적으로 갚기로 했다.

지난 밤 걸었던 것과 달리 낮에 본 레사스의 궁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게 화려했다. 초록 정원수로 미로처럼 만들어진 정원 안에는 꽃 모양의 분수대가 물을 뿜었다. 주변으로 색색의 꽃이 화려하게 폈으며 조각상도 여럿 있었다. 분명 화사한 것이 레사스와 어울리나 이상하게 그의 색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대가 뭘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일단은 생각나는 걸 가져왔어요.”

레사스는 분명 간단히 식사하자는 말을 했는데, 세이아드의 눈앞에 차려진 것은 직사각형의 긴 식탁을 채우고도 남는 온갖 종류의 음식이었다. 열량을 비축해 긴 전투를 하는 북부의 티테르로서 세이아드는 상당한 대식가였지만, 이건 지나치게 많았다.

“전하께서는 안 드십니까?”

“먹고 있어요.”

그러나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들기 전까진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 같았다. 포크도 나이프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세이아드는 일단 포크를 들었다. 식사는 이미 끝마친 터라 간단한 입가심할 것이 끌렸는데, 생각없이 포크가 향한 곳은 사과를 얇은 밀가루에 묻혀 기름으로 바싹 튀긴 요리였다.

무의식중에 둥글게 썰린 튀김을 집어 입에 넣었다. 소리 없이 그것을 베어 물어 삼키자 따듯하게 달구어진 과즙이 퍼졌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살짝 풀리는 동시에 레사스와 눈이 마주쳤다. 대체 볼 것이 뭐가 있는지, 그는 턱을 괸 채로 세이아드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그러자 레사스는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평이한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아뇨, 귀여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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