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52화 (52/147)

#52

달갑지 않은 레사스의 고백을 피해 세이아드는 그의 거처를 빠르게 나섰다. 배웅하기 위해 뒤따르는 레사스를 못 본 척 두고 그는 긴 다리를 놀려 궁을 빠져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바깥의 정원과 연결되어 있는 외부 통로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레사스는 따라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겠군.’

레사스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확신한다고 말했지만 세이아드는 전혀 믿지 않았다. 연심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만났고 헤어진 시간이 길었다. 반년 전 다시 만난 순간만 해도 날을 세우고 제게 실망하던 것을 반복했으니 세이아드 자신을 좋아할 순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몸정을 마음으로 착각하는 것이야 흔히 있는 실수다. 세이아드 또한 아주 처음 아스테르와 입을 맞추며 정화했던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첫 입맞춤은 원래 강렬하다. 긴밀한 관계가 아닌 이상 절대 닿을 리 없는 입술을 내어주는 행위니, 레사스가 그리 느낄 법도 했다.

정화에 사감이 섞이면 곤란하다. 애당초 티테르와 가이드의 사이에 감정이 엮이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니르아와의 전투는 언제나 목숨을 내놓을 걸 가정하는 일인데, 감정적으로 하나를 다루다 보면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릴 확률이 커졌다. 지난번 레사스가 겁도 없이 홀로 절 찾으러 숲으로 들어온 상황처럼 말이다. 그날 그가 보인 행동은 죄다 비합리적이고 위험천만했다. 어린 청년답게 무모한 짓이었다.

세이아드는 문득 멈칫했다. 레사스가 그런 식으로 굴었던 걸 떠올리니 정말인가,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 일은 레사스의 성격 때문이다. 그 전에도 기사들을 구하기 위해 어리석은 모습만 보여 주지 않았나. 레사스는 원래, 남을 그저 두고보지 못하는….

그만.

진절머리를 내면서 세이아드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마음이 흘러 닿는 곳마다 온통 레사스였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건 낭비였다. 다른 티테르와 정화하는 것이 익숙해지다 보면 조만간 제게 향했다고 여긴 마음도 이리저리 흩어지는 걸 느낄 거다.

“어, 안녕하심까!”

때맞춰 세이아드의 꽉찬 머리를 비울 목소리가 들렸다. 통로 바깥을 보니 정원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순찰을 돌던 기사 둘이 보였다. 하나는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고 하나는 처음 보았다. 바인이랬나. 실력은 제법 쓸 만한 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잘됐군. 저들에게 아까 봤던 붉은 머리의 기사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자리를 피하지 않고 서서 그의 인사에 가볍게 눈짓으로 응하자, 바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지더니 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옆에 있는 주홍 머리를 짧게 다듬은 기사는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바인의 뒤를 따라왔다. 신장이 어지간한 남자만 하고 체구가 단단했지만, 형태를 보니 여자 기사였다. 굉장히 흔치 않은 경우라 세이아드도 나름 이채를 띤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번엔 감사했습니다!”

오자마자 대뜸 감사하는 바인에게 세이아드가 되물었다.

“무엇이?”

“목숨을 구해 주신 거 말입니다.”

“이미 했던 말 아닌가. 불필요한 말을 중복해서 할 필요는 없다.”

언젯적일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세이아드가 정색하자 바인이 코끝을 긁었다. 머슥해하는 그의 옆에 있던 기사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저는 리그다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심장 위에 손을 올려 예를 표하는 리그다의 모습에 바인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안 어울리게 말투가 왜 그러냐, 너?”

“난 잘생기고 강한 사람에게 정중해.”

리그다는 그리 말하고 싱긋 웃었다. 바인이 발끈하며 불필요한 대화의 순환고리에 들어설 기색이 보여, 세이아드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너희의 동료 중에 붉은 머리 기사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얘도 붉은 머린데요?”

바인의 헛소리에 리그다가 옳은 답을 가져왔다.

“재스퍼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주근깨가 있는 어린 기사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은 리그다가 신중히 굴었다.

“저희 동료에 대한 것은 각하께서 레사스 전하께 직접 여쭈어 보심이 더 확실할 것 같습니다. 재스퍼를 직접 데려오신 분이 주군이셔서요.”

세이아드는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눈치 빠르고 실력 좋은 기사는 언제나 거둬도 부족했다. 겨울간 그의 수족으로 부릴 이들을 북부에서 찾아내긴 했지만 리그다는 제법 탐이 나는 인재였다.

“신중한 점은 칭찬하지. 하지만 너희는 내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다. 해를 끼치려는 것은 아니니 아는 것만 말하거라. 죽이고자 했다면 이리 묻지 않고 그냥 죽였을 것이다.”

바인이 동조했다.

“재스퍼가 지난번 각하께 매우 무례하게 굴었는데도 아직 안 죽이신 걸 보면, 맞는 말 같다.”

리그다는 동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금 걸리는 것 같았으나, 고심하더니 이내 문제될 것 없을 만한 약력을 읊었다.

“저희보다 먼저 전하의 수하에 있던 어린 기사입니다. 왕궁 기사단에 발탁된 게 아니고 저희처럼 전하께서 따로 발탁한 이인데, 출신은 평민입니다. 듣기로는 실드라스 공작 가문의 기사단에 있다가 왔다고 합니다.”

“맨날 전대 실드라스 공작께서 직접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오셨다며 자랑하는 놈이긴 하지만, 실력은 괜찮습니다.”

시르칸 실드라스가 직접 데려왔다?

세이아드의 눈이 일순 형형해졌다. 그가 제게 비친 적대적인 기색과 시르칸 실드라스가 겹쳐지면서, 재스퍼라는 기사에게 뭔가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몇 살이지?”

“올해로 열아홉입니다. 아직 정식 기사 수임은 받지 못했죠.”

“그가 어디 있는지 말하거라.”

바인이 꼬박꼬박 대꾸하는 걸 지켜보던 리그다가 그때 끼어들었다.

“재스퍼가 각하께 혹시 또다시 무례하게 굴었다면, 차라리 전하께 고해 벌하심이 어떤지요.”

“신중한 점은 칭찬할 만하나 끼어들어야 할 때를 잘 파악하는 것도 기사의 소임이다. 네 주군께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그만 경솔히 굴거라.”

세이아드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며 리그다를 압박했다. 주변의 공기가 그를 따라 스산해졌다. 리그다는 그 기세에 눌린 것 같으면서도, 우습게도 묘하게 경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각하 말이 맞아. 전하를 구해 주신 게 각하이신데 굳이 그럴 리 있어? 게다가 각하는 주군의 티테르잖아.”

잠시나마 레사스가 지겨울 정도로 말하는 ‘그의’ 티테르라는 표현이 튀어나왔다. 얼어붙어가던 공기가 깨졌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지? 전하의 티테르는 이번 연회에서 시온 실드라스로 내정되었다.”

정색하는 세이아드를 따라 바인도 놀랐다.

“예에? 주군께서 각하의 이야기를 할땐 항상 그리 말하셨는데요? 리그다 너도 들었지?”

“난 한 번밖에 못들었어. 세이가 주군의 손가락을 쪼고 도망갔던 날이었나.”

“아, 맞아. ‘나의 티테르를 닮아 하는 양이 귀엽구나.’ 라고 무서운 소리를 하셨는데.”

아무래도 레사스의 수하에 있는 기사들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화제가 ‘세이’인지 뭔지에 대한 것으로 전환되는 모습이 정신 사나웠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되었으니 그의 소재에 대해 말하거라.”

“넵! 재스퍼는 방금 전 궁의 입구로 근무 교대를 나섰습니다. 오 분 전의 일이니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수고했다.”

쉽게 정보를 내어준 바인에게 칭찬의 의미로 짤막히 말하자, 바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실력은 좋지만 아무래도 표정 관리를 배우지 않는 한 흠 없는 기사가 되긴 어려워 보였다. 저러다 레사스에게 약점이 될 정보를 아무에게나 흘리기라도 하면….

세이아드는 불필요한 걱정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레사스의 흠이라고 해 봤자 치유력의 부재인데, 그것은 저들이 아직 알기 어려운 것이다.

“수고했다고 여기신다면 나중에 딱 한번, 한 합이라도 좋으니 검을 섞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재스퍼를 찾기 위해 몸을 틀려던 세이아드에게 리그다가 불쑥 물었다. 흘끗 돌아보니 갈색 눈에 열기가 가득했다. 원래 세이아드 정도 위치의 이에게 제 아무리 왕실 기사단이라 해도 대련을 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들은 평민이었다. 게다가 세이아드는 이런 종류의 일에는 원래 관대했다.

“조만간 생각해 보겠다.”

“감사합니다!”

기뻐하며 허리를 숙이는 리그다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세이아드는 통로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그들이 말하던 ‘세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영 신경쓰였지만, 그는 일부러라도 레사스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생각을 지웠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