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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63화 (63/147)

#63

동생의 맹목적이고도 단호한 모습을 마주하며 세이아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벗어난 듯한 아스테르와의 굴레가 정해진 운명처럼 세실리아의 목을 감고 있는 이 상황이 소름 끼쳤다. 이래서야,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그의 가문을 아스테르의 옆에 붙들어 두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세실, 왕실의 다른 이들과 네 상성을 확인해 보는 쪽이 좋겠다. 가이드는 비단 왕세자만이 아니야. 그 외의 존재가 외려 너와 더 맞을 수도 있어.”

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으나 아스테르의 정화는 분명 이상하다. 자신의 폭주가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유전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며칠 전까진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존재했지만, 그 사건이 꾸며진 일이라는 걸 아는 지금엔 아스테르로 인해 폭주했다는 가설에 한층 확신이 선 상태였다.

“어제 궁에 들어온 뒤로 이미 시험을 거쳤어. 왕세자님을 제외한 이들과는 별 효과가 없었어. 두통이 나아지고 몸이 진정되는 사람은 왕세자님뿐이야.”

세이아드는 미간을 굳혔다. 가문마다 타고난 힘의 종류가 어느 정도 비슷한 것처럼 그에 따른 가이드와의 상성도 대대로 흡사하기 때문에 가이드 한 명이 한 가문의 티테르들을 다 책임지는 경우가 흔했다. 불행하게도 세실리아 역시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정화는 단지 의식일 뿐인 걸 아는데, 아스테르가 세실리아에게 닿는다고 생각하니 피가 식었다. 저와 했던 것보다 더한 정도의 의식을 치를 수도 있다는 가정까지 하자 살기가 일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남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지만 세실리아는 금세 그를 읽었다.

“내가 온 게 싫어? 역시 아직 날 보고 싶진 않은 거지?”

그리고 세이아드 또한, 세실리아의 동요를 읽어 냈다. 언뜻 보면 저와 같이 냉랭해 보이는 얼굴 아래로 불안과 두려움이 읽혔다. 세이아드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자 세실리아의 검은 눈이 비로소 감정을 드러내며 흔들렸다.

“그럴 리가. 단지 상황이 불미스러워 그럴 뿐이다. 세실, 정화는 네가 원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어. 왕세자가 혹여라도 원치 않는 이상을 강요한다면 그 즉시….”

“오빠, 그냥 손만 잡는 정도였어. 힘을 거의 쓴 적도 없으니 부작용이 크게 찾아오지도 않았고.”

세실리아는 세이아드의 이런 걱정이 달가운 듯, 한층 안도한 목소리였다. 가만히 그 변화를 눈에 담고 있으려니 그는 지난 생에 동생에게 해 주지 못했던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세실리아가 제 옆에 있게 되었다. 후회로 남았던 일들을 되돌릴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었다.

“세실, 나는 네 두려움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어. 너의 말처럼 서로를 의지 삼아 곁에 있어야 했는데,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가족을 버린 것은 나다. 그러니 나 역시 네게 사과해야 해. 미안하다, 세실.”

그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던 세실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냐, 오빠는… 나를 지키려 한 거잖아. 그러니 이젠 내가 오빠를 지켜줄게.”

겨우 되찾은 제 동생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그녀를 폭주로 잃을 수 없다는 경각심이 더해졌다. 세실리아가 잠시 진정하기를 기다리던 세이아드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왕궁의 모든 이와 시험을 거쳤다고 했지.”

“응, 오빠.”

“레사스 왕자와도 시험을 해 봤나?”

그러자 세실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서늘해졌다. 증오를 가득 담은 눈으로 세실리아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아니. 그자와는 상종할 수 없어.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이 어머니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잖아. 아무리 세상과 멀어져 있었어도 그 정도는 알아. 레아나 왕비의 아들과는 닿고 싶지 않아.”

세실리아는 정확히 세이아드가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읊었다. 과거의 세이아드가 반쯤은 유추로 여겼던 정황이 이제는 사실이 된 상황이니, 그녀가 느끼는 심정을 세이아드 또한 당연히 이해했다. 바로 어제 그가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세이아드의 분노는 과거와 달리 자신의 죄 앞에서 누그러진 상태였다. 레사스의 얼굴을 보는 것은 여전히 껄끄러웠으나, 그렇다 하여 그들을 이용하는 아스테르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적어도 레사스는 그를 휘두르려고 하진 않았다. 요령이라곤 없이 그저 자신을 이용하라고 말했을 뿐.

다가오지 못하고 하염없이 절 보던 보라색 눈이 떠오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은 응당 있을 법한 반응이었음에도.

“왕세자가 정확히 어떤 사실을 알려 줬는지 말해 보거라, 세실.”

“…축제 광장에는 실제로 니르아가 있었고, 시르칸 실드라스가 사람들의 입을 막아 어머니를 미친 것으로 몰아갔다고 했어. 증언을 할 기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도 하셨고.”

얼추 비슷한 이야기지만 세이아드가 쿠르투의 입으로 들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재스퍼의 기억에서 사람들은 니르아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레아나 왕후 또한 그중 하나였다. 어머니를 처형대로 몰아간 그녀의 증언과 당당한 태도는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으나, 그녀는 동시에 현장에서 어머니가 죽는 걸 막은 이기도 했다.

레사스의 주변에는 세이아드를 상처입힌 것들 뿐이다. 절 구하려 했다는 거짓말을 잘도 지껄이곤 시온을 옹호하던 그의 태도 또한 세이아드를 역겹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세이아드의 감정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더 큰 악의를 막고, 앞으로 닥쳐 올 무고한 희생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 속에서 레사스만큼은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다. 그저 한심할 정도로 순진하고 공정하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뿐.

“실드라스가 이 일을 꾸민 것도 맞고, 레아나 왕후가 어머니의 처형에 관여한 것도 맞지만, 레사스 왕자는 그들과는 뜻을 같이하진 않는다. 세실, 왕세자는 믿을 수 없어. 그는 기분에 따라 너를 휘두를 수 있는 존재고, 그는 우리를 도구 외로는 보지 않는다.”

“내가 꾼 꿈은 그렇지 않았어.”

왕세자의 정화에 대해서 경고하려던 차, 세실리아가 단호하게 치고 들어왔다. 꿈을 언급하는 그녀의 말에 세이아드는 과거 세실리아가 예지했던 현실이자 과거를 떠올렸다.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끔찍한 꿈이었어. 몇 년 전 내가 말했지? 오빠가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된다고. 나는 정확히 그 시점에서부터 이어지는 일들을 꿈에서 보았어. 레사스 왕자가 오빠를 죽이고, 그 이후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니르아가 미친 듯이 숲을 빠져나오더니, 심지어는 대낮에도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어. 결국에는 왕궁이 전복되고, 티테르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목숨을 잃었어. 왕세자님마저…!”

세실리아는 창백한 안색으로 세이아드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바로 레사스 왕자였어. 오빠, 이상하지 않아? 모두가 죽어 버린 그 상황에서 어떻게 레사스 왕자만이 멀쩡할 수 있어? 몇 년 전만 해도 힘조차 없던 그 형편없는 존재가?”

세실리아의 말을 듣는 순간 세이아드는 그가 불현듯 조우했던 환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거대한 뱀이 왕궁을 부수고 레사스를 삼키던 장면을 세실리아 또한 목격한 모양이었다.

혼자만의 환상이라 여겼던 것이 세실리아에게도 보여졌다고 판단한 차, 세이아드는 그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온 일이 세실리아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더해졌다.

세실리아의 능력이 시간과 연관되어 있다면, 분명 가능성이 있다.

다른 이에게는 말할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고백이지만 세실리아에게만큼은 사실을 토로해도 된다는 믿음이 일었다. 잠시간 주저하던 그는 결심을 마친 후 물었다.

“꿈을 꾼 뒤로 너에게 새로운 힘이 생겼다고 했지, 세실. 그렇다면 네가 시간을 되돌린 건가?”

세실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간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보던 세실리아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시간을 되돌려?”

신중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세이아드는 괜찮다는 듯 진중한 어투로 그녀에게 자신에게 생긴 일을 고백했다.

“네가 본 건 꿈이 아니다, 세실. 지금으로부터 4년 뒤, 나는 너의 말처럼 끔찍한 폭주로 인해 사람을 죽인 뒤 처형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네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나의 폭주는 왕세자로 인한 것이다. 그러니 그를 멀리해야 해.”

“아니야, 오빠.”

세실리아가 거세게 부정했다. 그녀는 굉장히 염려된다는 표정과 함께 세이아드의 손을 감쌌다.

“세상에 그런 힘은 없어. 나에게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처럼, 오빠 또한 나의 꿈을 이어받은 게 아닐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신의 영역이야. 우리는 달에게로부터 힘을 빌린 존재일 뿐, 그런 권능은 존재하지 않아. 오빠는 그저 미래의 악몽을 꾼 것뿐이야. 나 역시 그 꿈을 꾸면서 얼마나 절망했는지 몰라.”

세실리아는 무엇을 숨기는 사람같진 않았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세이아드는 몇 초간 더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이내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믿는 쪽이 외려 이상하다. 세실리아의 판단이 맞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희미한 피로가 밀려왔다. 쉽게 믿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 자신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타인이 그것에 공감하는 걸 기대하는 게 우스웠다.

한 번에 자신의 말을 믿은 레사스가 오히려 괴짜였다. 돌이켜보면 레사스는 늘 자신에 관한 일이면 지나칠 정도로 순순하고 협조적이었다. 그게 비정상이었다. 아니, 아니지. 그리 굴면서도 시온에 관해서는 끝내 그를 옹호했으니 항상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잡념을 지워 낸 세이아드는 더 이상 동생을 혼란스럽게 하는 대신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세실리아 자신도 모르는 힘이 작용했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아스테르의 힘이 폭주를 일으킨다는 증거를 찾기 전까진 세실리아를 설득할 논리가 부족한 것도 맞았다. 일단은.

“그래.”

세이아드는 덤덤히 수긍했다. 두려운 듯 절 자꾸 살피는 세실리아를 달래기 위해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동생을 얼렀다.

“내 착각인 모양이야. 그러니 당장 닥쳐 올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겠지. 일단은 쉬거라. 숙부께서는 네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으시고?”

“응, 왕궁으로 온다고 말씀드려 놨어.”

“그렇다면 일단은 쉬는 편이 좋겠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으니.”

“별로 멀지도 않은걸.”

세실리아는 서서히 안심이 되는지 안색을 차차 밝혔다. 그러더니 세이아드의 손을 다시금 고쳐잡고는, 단호한 얼굴로 속삭였다.

“프로시어스의 이름을 다시금 되찾기 위해, 오빠를 도와 뭐든지 할게.”

그리 되뇌는 세실리아의 모습이 자꾸만 제 과거와 겹쳐져, 세이아드는 그 말에 흔쾌히 기뻐하며 동의할 수 없었다. 저 길의 끝이 어떨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세이아드는 이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스테르의 뜻대로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아스테르가 원하는 것이 그의 곁에 남는 거라면, 세이아드는 친히 그의 곁에서 몰락을 지켜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걸 위한 방법은, 레사스를 왕세자로 만드는 것이다. 부모님의 복수는 그 뒤에 가서 세이아드 스스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레사스의 곁에 있는 이들을 잠시간 감내하는 일은 역겨워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이아드는 그보다 더한 것들을 감내하고 살아왔으니, 목표를 이룰 때까지 참는 것쯤이야 쉬웠다. 구정물에서 굴러도 원하는 걸 얻는다면 세이아드는 기꺼이 스스로를 속일 것이다.

어차피 세이아드의 목표는 자신의 폭주를 막는 거였다.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라면 닥쳐오기 전 숲을 없애 스스로의 필요를 없애는 것이었으니, 그 과정에서 레사스의 입지를 쌓아 아스테르를 누른다면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바를 지킬 수 있었다.

레사스를 이용해야 한다.

그 스스로 허락한 바이니, 세이아드는 그러기로 했다. 사감은 접어 두고 그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이, 목적을 위해 상생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좋겠다.

레사스의 목적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좋아하는 척 소꿉놀이를 하고 싶다면 기꺼이 절 빌려주고 그를 이용하면 되겠지.

그래,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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