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솔리아스의 숲은 왕국을 가둔 경계였다. 사람들은 왕국의 모든 경계를 둘러싼 숲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지를 언제나 상상했고, 건국 신화와 함께 전해지는 먼 고대의 이야기엔 끝없는 바다와 다양한 모습의 산 따위가 존재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솔리아스 왕국의 모든 이는 오직 아주 높은 건물 저 너머로 희미하게 그 경계만을 짐작할 뿐, 정작 바다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그것이 뭔지 본 적 없었다. 단지 무한한 호수처럼 물이 가득하다고 상상할 뿐이었다. 호기심은 무럭무럭 자라 이내 바깥을 열망하게 하는 갈증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대로 언제나 숲을 없애려 하는 왕은 존재했다. 그러나 목숨을 무릅쓰는 티테르와 항상 마찰이 있어 왔고, 지금처럼 모든 티테르의 동의하에 숲을 없애기로 결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고무적이나 동시에 무척 위험한 행위였다. 당대의 티테르는 역사적으로 수가 제일 적은 상황인지라, 누구라도 목숨을 잃게 되면 니르아를 막을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생각할수록 세이아드는 전생의 자신이 폭주하게 된 상황이 수상쩍게 느껴졌다. 처음 죽음에서 돌아왔던 그때엔 그저 제 죄만을 생각했지만, 어머니와 얽힌 진실을 알게 되고, 세실리아와 자신이 본 미래의 환영을 생각하니 상황이 단순하지 않았다.
티테르의 폭주는 역사적으로 종종 있어 온 일인데, 그때에도 왕국은 언제나 살아남았다. 그런 역사를 지닌 솔리아스가 세이아드의 부재와 함께 멸망했다는 건 자신과 얽힌 무언가 있다는 것처럼 여겨졌다.
‘물론, 나와 세실리아가 본 왕국의 멸망이 그저 환상일 가능성도 있지만….’
복잡하게 얽힌 생각 때문인지 세이아드의 표정이 원래보다 좀 더 차가워졌다. 그의 곁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현재 세이아드는 남부로 향하는 왕세자의 행렬에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왕세자의 기사단인 푸른 달의 갑옷이 호위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사클라니 후작가의 사병까지 포함된 왕세자의 행렬 뒤에는 레사스가 그에게 주어진 기사들과 나머지 티테르를 대동하여 함께 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토벌하기로 결정된 숲은 실드라스 령의 것으로 정해졌다. 대낮의 악몽이라 불리는 남부의 숲은 규모가 제일 작았기에 현실적으로 가능성 있는 목표이기도 했다. 기실, 국왕은 북부로 향하길 원했으나 그 과정에서 레사스가 나섰다.
‘수도와 가까운 남부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아버지. 규모가 제일 작기도 하거니와, 북부의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첫 토벌을 끝내는 것이 기사들의 사기 증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규모가 큰 북부부터 작업하는 편이 가장 큰 왕국의 위협을 없애는 길입니다, 아버지.’
그 과정에서 아스테르와 레사스가 설전을 벌였다. 보통은 고민 없이 아스테르의 편을 들었을 국왕은 이번만큼은 레사스의 말에 혹했는지, 긴 고민 끝에 남부로 표적을 정했다. 그러고는 모두의 신경이 곤두설 발언을 했다.
‘가장 큰 활약을 하는 왕자에게 그에 따른 직책이 주어질 것이다.’
그 말은 곧 레사스를 왕세자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솔리아스의 왕위는 보통은 가장 능력이 있는 이에게 가고는 했으니, 전통적으로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뒤늦게 후계자가 바뀌는 일은 유례가 없었다.
아스테르를 지지하는 사클라니 후작을 비롯한 이들이 단체로 반발하는 바람에 그 뒤로 회의는 파했다. 아스테르의 심기가 크게 상한 것이 보여 세이아드 또한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으나, 아주 간만에 유쾌한 꼴을 보아서 그런지 참을 만했다.
“이드, 세실에게 아름다운 남부의 광경을 보여 준 적 있나?”
앞서 세실리아와 함께 가던 아스테르가 뜬금없이 물었다. 혹여나 그가 세실리아와 불필요하게 가까워질까 뒤에서 그를 감시하던 세이아드는 주변을 의식해 마지못해 답했다.
“없습니다.”
남부의 영지를 북부의 티테르가 오갔던 적은 까마득한 과거다. 반년의 겨울을 나느라 북부에 매인 입장에서 한가로이 반대편의 영토까지 갈 이유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실드라스 령까지는 이틀을 더 가야 하니 오늘은 타칸에 위치한 어머니의 별장에서 쉬는 게 좋겠군. 곧 어두워지니 그곳으로 방향을 틀겠다. 거기에 아주 예쁜 호수가 있어. 세실, 너에게 보여 주고 싶구나. 전투를 앞두고 과히 긴장한 것 같으니, 안식을 취하거라.”
니르아를 마주할 거란 생각에 긴장해 있던 세실리아는 왕세자의 말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네 오라버니가 있으니 남부의 토벌은 위험하지 않을 것이야.”
그리 말한 아스테르가 세이아드를 보며 눈을 방긋 휘었다. 그가 세실리아의 어깨를 잡을 듯 굴자 세이아드의 표정이 일순 사나워졌다.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짓는 세이아드의 모습이 즐거운지, 아스테르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네가 대신하거라, 그러면.’
세이아드는 군말 없이 앞으로 향했다. 뜬금없이 말을 몰고 그들의 사이로 온 세이아드를 의아한 눈으로 보는 세실리아에게 그가 핑계를 만들었다.
“길을 찾아야 하니 너는 뒤로 가 있거라.”
“이곳에서 타칸까지는 쭉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될 텐데?”
아스테르가 일부러 그의 말을 지적했다. 다행히 세실리아는 아스테르를 향해 품은 감사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어색했던 것인지, 순순히 행렬의 중간으로 물러났다. 둘이 남게 되자마자 아스테르가 웃었다.
“귀엽게도 질투를 하나 보지. 걱정하지 말거라. 나의 티테르는 오직 이드 너뿐이야.”
질투라는 것은 생전에 들어본 적 없던 표현이었다. 언짢음을 삼키고 세이아드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마주치는 푸른 눈은 언제나와 같이 아름답고 자상했다.
한때는 저 눈만이 절 진정으로 꿰뚫어 본다고 여겼는데.
그러나 덧없는 회상이다. 그때에도 지금도 아스테르는 절 도구로 여겼을 뿐이다. 지금 보이는 이 태도도 결국 물건을 뺏긴 어린아이와 같은 감정이겠지. 폭주한 절 찾으러 오지 않았던 이유도, 망가진 물건을 버리려는 마음과 같을 터.
“마음이 단단히 상했나 보군.”
아스테르가 그리 말하며 세이아드에게 손을 뻗어 왔다. 느릿하게 그의 말과 보폭을 맞춘 세이아드는 거북함을 삼키고 그에게 응했다. 레사스와는 다른 온도로 따스한 손이 세이아드를 붙들더니 손목을 쥐었다.
예전에는 별생각이 없었던 것이 오늘따라 거북했다. 레사스가 쥐던 때는 이렇게까지 짜증 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손목은 내어주지 말라고 했던가. 레사스와 한 이상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고작 손목이다. 안 그래도 심기가 상한 아스테르를 건들면 그가 세실리아에게 어떤 장난을 칠지 모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겨울 이후로 그대의 웃음을 본 적이 드물어. 갑작스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몰라도 말이야.”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본인의 정화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켜 오는지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해졌다. 태어난 이래부터 왕이 되리라 키워진 존재고, 그의 힘마저 확실했으니, 아마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한.
그때 그가 지을 표정이 궁금했으나 상상하긴 어려웠다. 다만 즐거울 것이다. 세이아드는 그가 오래 모셨던 이에 대해 이런 마음을 품는 스스로가 참 악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순간을 기대하는 마음을 양분 삼아 아스테르와의 동행을 견뎠다.
말을 타고 한 시간쯤 더 가자 커다란 호수를 낀 작은 마을이 나왔다. 타칸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어딘지 익숙했다. 바로 최근에도 떠올렸던 것만 같아 곰곰이 생각했으나 근래 많은 정보가 들어온 탓에 당장 기억하기 어려웠다.
토벌을 위해 왕족들이 직접 나서리란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던 주민들이 그들을 반겼다. 레사스의 일행과는 이곳에서 방향이 갈렸다. 아스테르는 전대 왕후의 집안이 소유한 저택으로 목적지를 바꿨고, 레사스의 무리는 마을에서 마련한 숙소로 향했다. 천한 이들이 섞인 무리답다는 아스테르의 말에 그의 기사단이 웃는 걸 들으며 세이아드도 아스테르의 뒤를 따랐다.
제법 시간이 걸렸던 탓에 금세 밤이 찾아왔다. 잘 관리된 저택은 호숫가 바로 근처에 위치해 광경이 퍽 좋았다. 세이아드를 적당히 회유할 속셈인지 아스테르는 세실리아와 저녁 시간을 보내게끔 허락했다. 한참 산책을 마치고 세실리아를 먼저 보낸 다음 세이아드는 혼자 호숫가에 남았다.
사방이 조용했다. 보통 세이아드가 향하는 곳은 기사들이 의식적으로 피하곤 했기에, 그는 방해받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건국제가 끝나고 봄의 중턱에 접어들자 세이아드의 기준으로는 날이 과히 따듯했던 편이라, 그는 머리를 식힐 겸 멱을 감기로 했다. 북부의 악시드 호수는 늘 얼어 있어, 이처럼 따듯한 호수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전투를 치르기 전이었기에 가볍게 차려입은 옷을 훌훌 벗고 그는 한참이나 호수에 있었다. 니르아와 싸우지 않을 때면 언제나 영지를 지킬 방안을 생각하거나, 아스테르의 명을 따라 움직이곤 하여 이처럼 조용한 나날을 보낸 게 어릴 적 이후론 없었다.
세이아드는 가만히 밤하늘을 보며 티테르가 아닌 삶을 사는 이들을 가정해 보았다. 별 효과는 없었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갈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던지라, 의무가 없는 찰나는 상상할 수 없던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대신 그는 타칸을 어디서 들었는지 다시금 회상해 보았다. 호수에서 걸어 나온 그는 풀숲을 밟은 채 옷을 벗어 둔 곳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그에게 명백히 이 지명을 말했었는데, 그게….
“대공?”
레사스였다.
그래, 레사스가 했던 말이었다.
‘타칸에서 대낮에 니르아를 봤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을에 실종자도 생겼고. 그대가 그걸 조사해야겠습니다.’
머리가 밝아지는 기분과 함께 세이아드는 어둠 속을 주시했다. 누구보다 어둠에 익숙한 그로서는 저 너머를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별빛이 반사되는 호수로 천천히 걸어온 레사스는, 검은 후드를 둘러쓴 채 그에게로 걸어왔다.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 같으니 누군가에게 물어본 건 아닐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찾았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번 그림자에 숨었던 절 발견하는 것도 그렇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 눈에는 띄지 않게 주변을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대공을….”
빛이 좀 드는 곳으로 걸어온 레사스는 말을 하다 멈췄다. 후드 아래로 그의 하얀 얼굴이 드러나는 것 같더라니, 그는 후드를 벗으려던 것도 잊은 듯 우뚝 서서 세이아드를 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크게 뜨이면서 동시에 그의 뺨이 도홧빛으로 확 물들었다. 입술을 방긋거리던 그는 곧 소스라치게 당황하며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곤혹스럽게 잠긴 목소리로 왕자가 겨우 말을 꺼냈다.
“이드, 지금, 옷을…. 옷을… 입지 않고 있어요.”
아.
세이아드는 덤덤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막 멱을 감고 나온 차니 당연히 나신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