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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69화 (69/147)

#69

의도적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사스의 나긋한 도발은 효과가 있었다. 아스테르가 세실리아의 손을 놓고 몸을 틀었다.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인 그가 레사스를 경멸어린 눈길로 훑었다.

“반 푼짜리 능력을 얻었다고 뽐내는 꼴이 가당찮구나. 자신의 티테르를 치유할 힘도 없는 모자란 놈이, 주제를 모르고 눈이 멀었어.”

완벽하게 강한 존재는 없음을 증명하듯 레사스의 힘은 가이드의 필수라고 여겨지는 치유력이 없었다. 아스테르의 지지자들이 레사스를 비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듣고 있자면 형님께서는 꼭 다치는 상황을 상정하시는 것 같군요. 서로의 능력이 잘 맞물린다면 부상 없이도 이 토벌을 끝내리라 믿고 있는 터라, 그 부분은 형님께서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이 네 뜻대로 돌아가리라 믿는 꼴이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팽팽하게 날 선 신경전이 오갔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티테르들을 포함해 기사들마저 침묵을 지켰다.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왕족들의 다툼인 터라 입을 열 만한 이가 없었다.

“형님께서는 하실 말이 없으실 때면 항상 신랄한 말로 마무리를 지으시는군요. 오래간 보아 왔더니 이제는 정겹기까지 합니다.”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던가?

레사스가 고집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언제나 조용히 웃으며 감내하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지금같이 강하게 나오는 모습이 낯설었다. 죽기 전의 레사스는 힘을 가진 후에도 굳이 세이아드나 아스테르의 모욕에 이렇듯 반발하진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힘을 좀 더 빠르게 각성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기 자체는 크게 차이나진 않는다. 자신감이 생길 법은 해도 지금의 레사스는 당당하기보다는 이런 상황을 다루는 것이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이답지 않은 능숙함이었다.

어딘지 석연찮긴 해도 구경하기 나쁜 광경은 아니었다. 세이아드는 서늘한 얼굴 아래로 아스테르의 평정이 무너지는 순간을 예상했다. 그러나 아스테르는 레사스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두고 보자꾸나. 네가 말하는 ‘다치지 않는’ 토벌이 되기를, 나 역시 기원하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아스테르가 앞선 대화는 없던 것처럼 여유로운 자세를 되찾았다. 그는 허리춤에 갈무리한 의식의 검인 ‘거룩한 죽음’을 꺼냈다. 큰 일을 시작할 때 언제나 축복을 내리는 왕가의 보물은 왕이 될 자만이 쥘 수 있는 증표이기도 했다. 그걸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검을 보는 레사스의 눈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사이 녹슬지 않는 흰 검신의 끝이 세이아드에게 향했다.

“대공이 책임지고 티테르들을 통솔할 수 있겠나?”

아스테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온 실드라스가 의사를 표명했다.

“외람되오나 전하, 티테르들에 대한 통솔권은 실드라스에게로 이전되었다는 것을 잊으셨나 봅니다. 더군다나 이 땅은 저의 관할이니,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스테르는 푸른 눈을 싱긋 휘더니 세이아드와 눈을 마주쳤다. 의견을 묻는 듯한 눈빛은 분명 실드라스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떠보는 것임이 확실했다.

시온이 나선 이유야 명백하다. 아스테르와 저에게 명분과 힘을 더해 주지 않기 위해서겠지. 그의 눈에는 자신이 여전히 아스테르의 수족으로 보일 테니.

일부러 실드라스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의 권리이자 그의 가문이 대대로 지켜 온 의무를, 어떠한 대가 없이 일개의 특권으로 생각하는 시온을 내버려 두는 것이 쉽지 않았다.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세이아드는 지금만큼은 감정을 더욱 지워 내며 덤덤히 말했다.

“…실드라스의 말이 맞습니다.”

세이아드의 수긍이 떨어지자 아스테르의 검 끝이 시온에게로 향했다. 눈짓을 따라 앞으로 걸어 나온 시온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의 머리 위로 검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 순간부터 티테르들의 목숨은, 자네의 책임임을 잊지 말게나.”

아스테르의 검이 물러가며 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갓 성인이 된 청년의 고운 얼굴 위로 자신감이 어리는 게 보였다. 더는 그 광경을 보고 있기 힘들어 세이아드는 눈을 돌렸다.

***

숲으로 진입하게끔 편성한 병력은 많지 않았다. 지금은 니르아가 잠든 봄이기도 했고, 남부의 숲 자체는 북부와 달리 말을 타고 이틀을 돌면 둘러볼 수 있는 규모여서 그런 듯했다. 따라서, 그들을 따라오는 기사들은 모두 자원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자원자의 대다수가 레사스와 실드라스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생각보다 숲이 조용한걸요? 노바는 니르아의 소굴이 아주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지 뭐예요.”

의도적으로 제일 뒤에 배치된 세이아드와 세실리아의 앞에는 노바가 자리했다. 저 앞의 시온은 제법 익숙한 동작으로 숲의 안쪽으로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작년 겨울에 숲을 지켰다고 하더니 지형을 익힌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혐오하는 자의 등을 보고 있는 상황이 역했다. 참는 것은 세이아드가 숨 쉬듯 해 와야 하는 일이었으나, 저 당당한 뒷모습을 지지하는 세계가 어머니의 죽음을 양분 삼았다는 것은 아직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조용히 해요, 브레드히트 공녀.”

긴장해 굳어 있던 세실리아가 노바를 지적했다. 명랑하게 숲을 구경하던 노바는 날선 목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조잘거렸다.

“세실리아, 노바라고 불러줘요. 앞으로 죽기 전까지 나라를 같이 지켜야 할 사이잖아요.”

“나는 어리석고 비열한 티테르들과는 함께하고 싶지 않아요.”

“티테르‘들’이요?”

노바의 양갈래 머리가 삐뚜름 기울어졌다. 천진한 흰 얼굴에 드디어 동요가 일자 세실리아가 냉소어린 목소리로 고했다.

“실드라스의 앞잡이 가문과는 어울릴 일이 없단 말이에요.”

“실드라스가 어때서요?”

“고작 이깟 권력에 눈이 멀어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이죠.”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작지만 또렷했고, 기감이 예민한 티테르로서는 놓치기 어려운 소리였다. 앞장서서 차분히 걷던 시온이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아비인 시르칸을 빼닮은 얼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토벌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천천히 나아가던 흐름이 끊기며 시온이 발길을 틀었다. 중간에 있던 스텔라가 그의 팔을 붙들며 제지하려 했다.

“시온, 네 말처럼 토벌 중이니 이야기는 나중에 해.”

“숲의 초입을 다 지난 게 아니니 위험한 상황은 아니야. 주변에 잠들어 있는 니르아도 보이지 않잖아. 그것보다는,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분란을 조장하는 프로시어스가 문제 아닌가?”

스텔라의 팔을 정중히 떼어낸 시온이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언제나 발랄하던 노바는 세실리아를 지긋이 노려보며 심기가 상한 티를 내고 있었다. 세실리아와는 다른 온도를 띤 은발 끝이 바람을 따라 위험하게 살랑거리는 게 보였지만, 같은 티테르이니 참는 것 같았다.

“실드라스, 제자리로 돌아가. 스텔라의 말대로 지금은 때가 아니다.”

자리를 따지지 않을 거였다면 세이아드는 진즉 시온의 얼굴을 갈기고 토벌을 시작했을 것이다. 누군가 하나 죽어야만 끝날 싸움을 시작하지 않은 건 자신이 일의 경중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의무를 질 자격도 되지 않아 숨어 있던 대공의 동생께서 먼저 시작한 일입니다. 내내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악시드 영지의 일을 등한시하더니, 이제야 나타나선 소란까지 만드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세실리아를 건드렸다. 파장이 급격하게 일렁인다 싶더니, 세실리아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간신히 참고 있는 듯했던 속마음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왔다.

“살인자의 자식 주제에 뭐가 그리 당당한 척이지? 네 죽어 버린 아비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알기는 해?”

튀어 나가려는 세실리아를 세이아드가 붙들었다. 부들거리는 흰 손목에 핏줄이 선 게 보였다.

세실, 아직 아니야.

세이아드가 속삭였다. 아직 그들의 손에는 증거가 쥐어지지 않았다. 아스테르가 직접 나서길 결정하기 전까진 결국 이 싸움을 시작할 칼자루가 없는 셈인데, 시기가 일렀다.

세실리아의 분노가 외려 세이아드보다 크게 표출된 상황을 마주하자, 그의 마음은 순간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이 상황에서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위험해진다. 지금은 분명 니르아가 잠든 봄이고, 그렇기에 토벌대가 구성된 게 맞지만….

세이아드는 주변을 훑었다. 그는 잠든 숲을 많이 돌아보았지만 아무리 봄이어도 잠자는 니르아의 흔적이 어디선가는 보이길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치게 주변이 깨끗했다. 전장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조용한 상황일수록 기습을 예상하는 것이 기사의 기본된 도리였다.

“말이 심하네요, 정말!”

그가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결국 어린 티테르들이 분열을 마주했다. 노바가 얼굴을 발긋하게 붉히며 시온을 대신해 화를 내었다. 지척까지 걸어온 시온은 세실리아의 그 외침을 어이없다는 듯 듣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참. 기가 막히네.”

진심으로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은 시온이 세실리아를 쓱 훑고, 그다음으로는 세이아드를 보았다. 남매를 측은하다는 듯 쳐다본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진즉 죽었을 이들이, 은혜조차 모르는 금수로 자랐다는 게 진심으로 한탄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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