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상냥하고 온화하다는 그 레사스 왕자가 내리라 상상할 수 없는, 서늘하고 소름 돋는 음성이었다. 평소와 비슷한 차분함은 일견 그대로인 것 같았지만, 그의 명에는 거부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어려 있었다. 그게 낯설고도 놀라웠는지 주춤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대가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는 소리조차도 고통인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더군다나 대공의 상태는 지금 그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고통스러울 테니, 입 다물고 나의 지시를 기다리세요.”
덕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귓가를 파고들던 소리가 잦아들자, 고막을 터트릴 듯한 통증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게 고통스러웠다. 미약한 바람이 닿는 살갗은 찢어지는 것 같이 아렸고, 내장이 끓었으며, 무엇보다도 머릿속의 음성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이대로 머리통을 박살 내고 통증을 끝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일었다.
“안 돼요, 이드.”
대체 자신의 속내를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잠시 사람들에게로 향했던 레사스의 눈길이 제게 다시 향했다. 수려한 눈썹이 괴롭게 휘어서는, 가물가물한 시선 너머로도 레사스가 지독하게 괴로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레사스는 자꾸만 움직이려는 세이아드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겹쳤다. 얼어붙은 차가운 손을 따듯한 볕이 녹이듯, 하얗고 부드러운 감각이 손가락 틈을 파고들어 꽉 붙들었다.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세라 간절히 감싸는 행위와 함께 난장판이 된 몸 안으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들었다.
“괜찮아요, 나의 달. 내가 여기 있어요. 당신의 고통을 내가 삼킬게요.”
생명수를 찾은 것만 같았다. 이 기운을 쫓으면, 이걸 삼키면, 그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열망이 치솟았다. 세이아드의 모든 이성이 날아가고, 오직 자신을 안은 이 존재를 탐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남았다.
그 욕망을 따라 세이아드는 양팔을 뻗어 레사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자신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것이 싫었다. 최대한 이 따듯한 사람을 당겨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만이 그를 부채질했다.
분노를 억누르던 레사스의 얼굴에 일순 다른 빛이 깃들었다. 슬픔과 애틋함을 섞은 표정으로 세이아드를 내려다보던 레사스는 기꺼이 고개 숙여 주어 저를 내주곤, 두 팔로 세이아드의 몸을 받쳐 안았다. 그러고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일어섰다. 몸이 들리는 기분이 오싹해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목을 더욱 껴안았다. 누군가 본다는 자각 같은 것 없이 본능을 따라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이 자리의 누구보다 위협적인 장신의 사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품에 안은 레사스는, 그 모습을 가리듯 세이아드를 제 쪽으로 더욱 안았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레사스를 덮쳐 누르고 그의 모든 숨결을 앗고 싶었던 세이아드로서는 그가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그의 등을 찢을 듯 긁어 놓자 레사스가 고개 숙여 다정히 속삭였다.
“쉬이, 조금만 참아 줘요. 그대가 원하는 건 뭐든 줄 테니.”
입이라도 맞추는 것처럼 가까이 붙은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시온이 결국 나섰다. 성급히 레사스에게로 걸어온 그가 팔을 붙들며 분개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는 내 가이드야, 레사스. 그의 정화는 왕세자가 할 일이라고. 내 모습은 안 보여? 당장 정화가 필요한 사람은 대공뿐만이 아니야!”
잠시 진정되는 듯했던 두통이 시온의 외침에 거세졌다. 앓는 소리를 낸 세이아드가 레사스의 품을 벗어나려 몸을 비틀자, 레사스가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조용히 하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시온. 기사들과 다른 티테르가 있는 앞이니 더는 소란을 피우지 마.”
분란이 일어나자 조용히 있던 다른 이들도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시온, 일단은 전하의 말을 듣자. 대공의 상태가 나쁜 건 우리 모두 느낄 수 있잖아.”
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세실리아가 나섰다.
“오빠의 가이드는 왕세자 전하세요. 레사스 전하께서 나설 일이 아니니, 오빠는 제가 데리고 내려가겠습니다.”
세실리아의 말을 놓치지 않고 시온이 반박에 나섰다.
“지금 네가 이렇게 구는 게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긴 해? 너는 지금 네 경쟁자의 티테르를 감싸고 있는 거라고. 네가 정화해야 할 건 나야…!”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분노가 점차 커져 가며 시온의 목소리 또한 높아졌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더는 이런 소리를 듣고 있기 어려웠다.
그를 미치게 하는 소음을 피하고자 세이아드는 레사르를 안은 팔을 풀었다. 레사스의 가슴을 밀치며 내려가려 했으나, 레사스가 그럴 수 없게끔 온 힘을 다해 세이아드를 안았다. 그러고는 고개 들어 시온을 보았다.
“시온 실드라스.”
작았으나, 무섭도록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색하며 시온을 불렀다. 단어 하나하나에 실린 힘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정화를 그렇게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베풀어 주지.”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세이아드가 제일 먼저 눈치챘다. 자신을 안고 있는 레사스의 몸에서 오직 티테르만이 느낄 수 있는 파장이 강렬히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들끓는 태양의 열기를 태양 자신이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것처럼, 레사스로부터 숨 막힐 정도의 파장이 뻗쳐 나갔다. 솨아아, 바람 소리와 흡사하게 대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깨끗하고 밀도가 높아 무서울 정도의 정화력이 레사스로부터 방출되었다.
“이게, 무슨….”
시온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것에 힘입어 사방으로 투명한 파장이 화악 퍼졌다.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티테르들에게 방사된 힘이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방금전보다 훨씬 기운이 돌아온 음성으로 스텔라가 경탄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정말…?”
신선한 공기를 단숨에 들이켠 듯한 감각에 세이아드의 정신도 조금 돌아왔다. 적어도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은 충동만큼은 잦아들었다. 이 정도의 힘이면 자신의 상태도 어느 정도 나아질 법하건만, 니르아에게 너무 근접했던 탓인지 쉬이 다른 것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제 발로 일어설 정도는 되었다. 자신이 레사스에게 안겨 있다는 자각이 들자 곤혹스러움이 밀려들었다. 일단 그에게서 벗어나려 움찔거리는 몸을 레사스가 눈치챈 듯 앞서 한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시온을 향해 명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칠 테니, 그쯤하고 네 할 일을 해. 네가 망친 상황을 남들의 앞에서 들추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네가 보여 준 충의에 대한 답을 한 셈이다.”
레사스는 그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감탄이나, 사람들의 놀란 반응에도 전혀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일견 지겹다는 듯한 표정마저 지은 그는 시온에게 경고처럼 말했다. 우뚝 선 채로 방금 일어난 기현상을 곱씹던 시온은 레사스의 지적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내가… 망쳤다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충격이 시온의 물음에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다섯 명의 티테르 중 대공만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건, 대공 홀로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겠지. 지휘관인 네가 제대로 상황을 통솔했다면 지금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다.”
레사스는 그리 말하곤 주변을 둘러싼 스텔라, 노바, 세실리아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가장 강한 티테르가 이렇게 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대들 모두 멀쩡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곧 그대 중 누구도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뜻이겠군요.”
싸늘한 지적이었다. 노기를 참고 있는 목소리에 시온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변명했다.
“우리 모두 악시드 대공에 비해 경험이 부족하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렇다면 대공이 쌓은 경험은 모두 홀로 학습한 것이라는 것도 알겠군. 시온, 대공은 너나 다른 티테르들과 달리 그를 지도해 줄 티테르 없이 혼자 모든 것을 견뎌 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이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며 변명했던 적은 없던 걸로 알고 있는데.”
늘 희미하게 웃는 모양을 하던 눈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조각처럼 냉랭하게 티테르들을 쏘아보았다.
“목격자가 많으니 자세한 상황은 돌아가서 듣겠습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오늘 목격한 니르아에 대한 보고를 준비하세요. 한 번만 더 불필요한 말을 지껄인다면 나의 인내도 거기서 끝날 겁니다.”
말하는 내내 끊임없이 퍼부어지고 있던 레사스의 기운이 삽시간에 갈무리되었다. 자신의 힘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능숙하고 정교한 실력이었다. 더는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레사스가 등을 돌렸다. 그때, 세실리아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누가 들으면 오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인 줄 알겠네요, 레사스 전하. 지난 몇 년간 대공과는 부딪힌 적도 없었으면서 말이에요.”
레사스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이아드를 조심스레 고쳐 안고는, 조용해진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를 따라왔던 기사들과 후방에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죄다 그들에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다 괜찮아요, 이드.”
부드러운 속삭임이 위에서 울렸다. 참 이상하게도 레사스의 말을 듣자마자 날서 있던 긴장감이 비로소 탁, 풀렸다. 그러자 기절할 것 같은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억지로 힘주어 들고 있던 고개가 뒤로 스르르 젖혀지며 세이아드는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있는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