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간만에 과거의 꿈을 꾸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이후 의식이 일부러 누르고 있던 것인지 몰라도, 생전의 일을 떠올리는 게 오랜만이었다.
그의 의식이 잡아 낸 과거는 무의식에 묻혀 있던 의미 없는 어느 날이었다. 겨울이 길어지고 니르아의 반경이 넓어지는 것을 회의하기 위해 모두가 왕궁에 모였던 낮, 우연히 레사스와 복도에서 마주쳤던 순간이 있었다. 폭주가 찾아오기 몇 달 전이었을 것이다.
늘 그러했듯 세이아드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증오가 일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부터 측은함도, 원망도 느끼지 못하게 된 지 오래임에도 레사스를 볼 때면 극렬한 거부감이 일곤 했었다. 말조차 섞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여 인사조차 하지 않게 된 게 오래전이라, 세이아드는 그를 멸시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지나치려 했다.
레사스의 표정 또한 그와 같았다. 남들에게는 잘만 보여 주는 단아한 미소를 싹 지워 버린 흰 얼굴이 무심하게 세이아드를 짧게 담다 말았다. 역겨운 정적 속을 헤쳐 레사스를 지나치던 그에게, 불쑥 레사스가 한 마디를 속삭였다.
‘티테르는 그대뿐만이 아니니, 전투에서 지나치게 힘을 쓰지 마십시오.’
같잖은 참견이었다. 의도가 훤히 보이는 견제에 세이아드는 경멸을 훤히 드러낸 목소리로 레사스에게 반박했다.
‘전하의 형편없는 티테르들에게나 충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와 말을 섞었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대꾸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앞으로 다시 나아갔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레사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혹은 자신을 보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싫어서였다.
그러나 현재의 의식이 깃든 그 꿈의 끝에서, 세이아드는 뒤를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전생의 레사스가 자신을 혐오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그가 보여 줄 표정이 무엇인지 뻔했는데도 말이다.
멈춰선 세이아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사라질 줄 알았던 레사스는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며 그의 꿈이 조각나 흩어졌다.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의식에 닿으며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뻑뻑하게 말라붙은 눈이 아팠다. 세이아드는 고통을 삼키며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올렸다. 주홍빛 불빛이 등잔으로부터 일렁거리며 퍼졌다. 그를 둘러싼 천장을 보아하니 막사 안인 것 같았다.
“저런 니르아가 계속해서 나오면 숲을 없앨 수 있을까?”
바인의 목소리였다. 막사의 입구 쪽에서 들리는 속삭임이었다.
“오늘 대공께서 해낸 걸 보면 가능하지 않겠어? 게다가 전하의 힘이 무시무시하잖아. 우리 같은 일개 사람들도 느껴질 정도로, 뭔가… 정말 대단했어.”
리그다가 그에게 대꾸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만은 아닌지 다른 기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런 건 듣도보도 못했어. 정화는 무조건, 막, 그렇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들의 주군이 대단한 것이 못내 기쁜지 기사들의 대화가 점점 빨라졌다.
“다들 하는 말 들었잖아. 전하께서는 라만 솔리아스 1세의 현신이라고. 그렇게 강력한 힘이니까 이제야 발현한 게 아닌가 싶다.”
“확실히 각성하신 뒤의 전하는 예전이랑은 좀 많이 다르긴 해.”
“난 오늘처럼 무서울 수 있는 분이라고도 생각 못했어.”
“아아. 상황 보고 때 진짜 살벌했잖아. 차라리 화를 내거나 언성이라도 높이시면 모르겠는데, 표정 없이 맞는 말만 하는 게 더 무서웠어….”
“나는 앞으로 절대 전하의 말씀에는 토를 달지 않을 예정이다.”
바인의 단호한 결심까지 듣고 나자 몸이 조금 움직일 만해졌다. 침음을 잇새로 새어 나가지 않게 삼키며 세이아드는 상체를 일으켰다. 흘러내린 모포를 밀쳐 내고 전신을 훑어보니 심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등 쪽이 화끈거리는 걸 보니 바닥을 구르며 부서진 나무가 살에 박힌 것 같았지만, 그 정도는 다친 축에도 끼지 않았다.
막사 너머를 살피니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전투가 길긴 했어도 정신을 잃던 시간은 낮이었는데, 밤까지 잠들어 있던 모양이었다.
고작 이런 걸로 의식을 이만큼 잃은 게 한심했다. 숲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시간을 버텨야 하는데 말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전투에 방해되지 않게끔 항시 반쯤 넘긴 머리칼이 손 안에서 흐트러졌다.
세이아드는 몸을 일으켜 간이 침상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일어선 그는 등의 부상을 제외하곤 별다른 부상이 없음을 재차 확인했다.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어질 토벌에 대해서 논의하고, 무엇보다도 오늘 본 니르아의 정체를 조사해야 했다.
지난 생의 9년간 많은 상급 니르아를 상대했지만, 이 같은 니르아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최상위 개체라고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티테르의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가 겪었던 과거와 현재의 일들이 뒤죽박죽 섞여 어떤 찝찝함을 불러일으켰다. 당장이라도 숲을 뒤지고 그에 관한 단서를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세이아드는 주변을 살폈다. 중앙에 놓인 둥근 탁자에 가지런히 개인 자신의 얇은 망토가 보였다. 그걸 집기 위해 걸어간 그는, 비단으로 된 손수건에 놓여 있는 브로치를 발견했다. 꽃 모양의 보라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세이아드의 눈에도 익은 것이었다.
이걸 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에 눈을 찡그리고 브로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천막이 쳐진 입구로 막사의 주인이 돌아왔다.
“이드!”
소스라치게 놀라 하는 부름에 세이아드가 뒤를 돌았다. 의식을 잃기 전 보았던 무서운 얼굴이 거짓말인 양 레사스는 평소와 같이 다정한 낯빛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뛰듯이 그에게 걸어온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팔을 굉장히 약한 힘으로 잡았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등의 상처가 깊어 붕대를 감아 놨으니 쉬어야 합니다.”
“별것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떠시는군요.”
환자를 대하듯이 섬세하게 절 다루는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이아드가 아무렇지 않게 굴자 레사스는 표정을 굳히더니, 그의 옷 소매를 밀어 올렸다. 느슨한 검은 셔츠인지라 쉽게 말려간 소매 아래로 온갖 딱지가 앉은 팔뚝이 나왔다.
“이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요.”
그리 말하는 레사스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입술이 하얗게 될 정도로 꾹 깨문 레사스는 눈길을 떨구어 세이아드의 팔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외려 기절할 것은 다친 자신이 아닌 레사스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그대의 몸은 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생채기 하나도 내지 마세요. 작게 긁힌 자국조차도요.”
중얼거리는 레사스의 손으로부터 떨림이 아주 심하게 왔다. 세이아드는 눈을 찡그린 채 레사스의 기이한 반응을 살폈다. 분명 지난겨울에도 레사스는 자신의 상처를 신경 썼고, 어떻게 다뤄야 할 줄 몰라했지만, 지금같이 동요하진 않았다.
“오늘 같은 니르아를 상대한 것치고 이 정도는 외려 양호한 편입니다. 지난번에는 더 큰 상처를 보셨으면서 요란을 떠시고 있군요.”
셀피니 베트리아를 상대하며 관통상을 입었던 그때가 훨씬 더 위험했다. 세이아드의 말을 들은 레사스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생채기가 난 팔을 하염없이 내려다만 보았다. 이러다 아예 입술을 찢어 놓을 것처럼 깨무는 것이 조금 거슬려, 세이아드는 눈을 찡그렸다. 고민하던 그는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레사스의 입가에 손을 댔다.
“그만 깨무십시오.”
왜 그렇게 거슬리는지는 몰라도, 멀쩡한 입술을 찢을 듯이 구는 행동이 언짢았다. 세이아드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자마자 레사스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보라색 눈동자에 물기가 고여있는 걸 발견한 세이아드가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영문으로 이러시는 겁니까?”
“아뇨, 나는….”
레사스는 잠시 입술만을 달싹였다. 보는 사람이 다 서글퍼질 정도로 사무친 슬픔이 그의 얼굴에 어렸다. 짙은 눈썹이 거꾸로 휘었다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더니, 그가 눈물을 지우곤 웃는 눈을 했다.
“대공께서 나를 만져 주신 것이 기뻐서 그랬어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레사스는 자신의 입술에 닿아 있는 세이아드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조심스레 손등에 보드라운 살갗을 비빈 그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은은히 잠긴 보라색 눈이 세이아드를 담았다.
“대공이, 나를…, 먼저 만진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물기 어린 숨결이 세이아드의 손등을 따듯하게 덮었다. 깊게 잠긴 목소리를 듣는데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아렸다.
“울음이 나올 정도로 기뻐서 그랬습니다.”
그저 손길을 하나 준 것뿐인데 이리 구는 레사스가 바보 같았다. 세이아드는 그의 저런 면모가 참으로 아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조금 더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레사스가 자신이 주는 보잘것없는 것에도 세상을 가진 듯 기뻐하던 때, 딱 이런 기분이 들었다.
세이아드는 충동을 따랐다. 그는 자신의 손등에 뺨을 비비는 레사스를 가만히 보다가, 손등을 살짝 뒤로 물렸다. 소중한 걸 잃어버린 아이처럼 레사스가 빠져나가는 손을 시선으로 쫓았다. 이상하리만치 간절하고 애타는 얼굴에 세이아드는 물렸던 손을 들어 레사스의 턱을 잡았다.
세이아드는 억센 힘으로 레사스의 턱을 붙들곤 검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단단한 검지 끝이 레사스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그 안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레사스는 시간이 멈춘 듯 잠시 멍하니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세이아드는 손끝을 좀 더 안으로 넣었다. 그의 검지 끝에 가지런한 치열이 닿았다. 그런 세이아드를 따라, 레사스가 순종적으로 느릿하게 입을 벌렸다. 흰 치열이 보이고 붉은 혀가 은밀히 드러났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열기가 확 몰리면서 세이아드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정신을 잃기 전 느꼈던 짙은 욕망이 그를 감쌌다. 눈앞의 순전한 가이드를 잡아 삼키란 명을 따라 세이아드가 그의 턱을 당겼다. 기꺼이 끌려간 레사스가 그를 위해 살짝 고개 숙여 주며, 이리 속삭였다.
“못된 말을 했으니 입을 맞춰야겠어요, 대공.”
앞서 했던 말 중 대체 무엇이 그랬는지를 반문하려다가, 그보다 레사스를 취하는 게 먼저라는 열망이 일었다. 그는 레사스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제게로 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지나치게 달았다. 혀끝으로 퍼지는 달콤한 내음은 세이아드가 좋아하는 단맛을 띠고 있었다. 그래. 레사스가 말했던 것처럼, 세이아드는 어울리지 않게도 단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겨 찾았던 것은 레사스의 버려진 궁 앞에 자라던 새빨간 사과였다.
불긋한 표면을 깨어 물면 퍼지던 단맛이, 딱 지금 느끼는 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