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77화 (77/147)

#77

건국 신화에서 악마는 어둠이 찾아와야만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더 많은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어느 날 태양을 삼켰고, 현재의 겨울이 된 시간 동안 인간을 도륙했다고 전해졌다.

다만 그 외의 이야기는 알려진 것이 많이 없었다. 세이아드가 왕궁의 서고를 통해 최근 알게 된 달과 악마에 대한 이야기도, 이번 생을 살기 전에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악마가 힘을 기르고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면 징조가 나타난다네. 악마의 수족인 니르아가 잠에서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점점 더 강한 니르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지. 오늘, 한낮의 봄에 등장한 기괴한 니르아는 이 같은 기록과 들어맞지 않겠나?”

공작의 말은 믿기 어려운 옛날 설화로 들렸지만, 마땅히 반박하기 어렵기도 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상황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티테르와 가이드의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인 전설의 증거이기도 했으니,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공작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친다면, 왜 하필 지금인 겁니까? 악마는 몇백 년이 넘는 시간 건국 이래 사라져 있었습니다. 애당초 악마는 소멸한 존재일 텐데요.”

“악마는 사라진 적이 없소, 대공. 그랬다면 이 숲도, 니르아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겠지. 그건 그저 봉인되어 있었을 뿐이야. 티테르와 가이드가 존재하는 것은 다 악마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네.”

이는 아주 당연한 사실 같았지만, 브레드히트가 이렇게 말하기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방향의 해석이었다.

세이아드는 그동안 건국 설화가 그저 니르아에 대해 그럴싸한 설명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 여겼다. 왕가가 자신들의 힘과 핏줄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화에서 네 개의 별은 악마의 배를 갈라 태양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그걸로 이미….”

말문이 막혔다. 어디에서도 악마가 죽었다는 설명은 없었다. 브레드히트가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자네도 이제 보았겠지만, 숲에 있는 핵이 바로 그 증거일세. 핵을 지키는 무수한 니르아와 그걸 없앨 때마다 숲이 줄어드는 것을 고려해 보면, 그게 악마의 흔적이라는 게 확실해지지 않나?”

“도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작이 말한 것은 설화에서도 나오지 않고, 티테르들이 받는 가르침에서도 설명하지 않는 겁니다.”

의뭉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세이아드에게 브레드히트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그는 잠시 실드라스 저택을 돌아보며 회상에 잠기는 듯하더니, 창문을 보며 과거를 털어놓았다.

“나와 시르칸은 한때 티테르의 존재에 대해 탐구했었네. 우리 둘 다 자유롭지 못한 이 삶을 끔찍이 싫어했거든. 한평생 니르아에 얽매여 그것만을 처리하기 위해 사는 게 지옥같았어. 나는 전국을 떠돌아보고 싶었고, 시르칸은 자유롭지 못한 삶을 혐오했지.”

갑작스러운 전대 실드라스 공작의 언급에 세이아드의 표정이 굳었다. 듣기만 해도 찢어 죽이고 싶은 그자가 남의 입에서 회자되는 것은 썩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 명확해졌다.

뱀의 형상을 한 니르아와, 그것을 부리던 정체불명의 사람. 시르칸 실드라스가 정말로 멸망을 원했다면, 어쩌면 그가 악마를 깨웠을지도 모른다.

단서들이 잡힐 듯 말 듯 어지럽게 뒤섞였다. 악마를 깨운 시르칸이 멸망을 위해 움직였다면, 그리고 악마가 정말로 깨어나 태양을 삼키고 싶어 한다면….

가장 먼저 티테르를 없앨 것이다.

지난 삶, 셀피니 베트리아와 아스터 브레드히트가 죽은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폭주한 것까지 모두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태양이 사라진 채 불타오르던 왕국의 끝을 떠오르자 확신이 섰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든, 아니든, 티테르가 사라지면 찾아올 미래였다.

지금처럼 어린 티테르들만 남은 상황에서 니르아의 범람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이번 토벌만 하더라도 세이아드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누군가는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 젊을 적의 일이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내 의무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시르칸 또한 가정을 꾸리며 현실과 타협했어. 너무 까마득한 일이라 그대로 잊히나 했는데, 저번 겨울 이후 불현듯 떠올랐네.”

브레드히트는 그리운 것처럼 창밖을 보며 회상을 마쳤다. 그의 얼굴 위로 드리운 친우에 대한 쓸쓸함이 세이아드에게는 참을 수 없이 거북했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께서는 퍽 자유로운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까? 사랑받는 남부의 공작으로서 티테르의 위대함을 잘 선전하고 다녔을 텐데요.”

세이아드의 적개심을 읽어 낸 브레드히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복잡미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괴로움과 사연이 있길 마련일세. 자네에게도 자네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모두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살아. 시르칸 또한 삶에서 가장 원하는 것만큼은 결코 얻지 못했지.”

“자유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대 공작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삽니다. 동정하고 싶진 않군요.”

“나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네. 시르칸이 목숨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의외의 말이었다. 시르칸 실드라스는 굉장한 애처가로 정평 난 이였고, 그만큼 자식인 시온과 그의 동생 또한 애정으로 키웠다.

하지만 더 알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세이아드에게 있어 시르칸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악마와 다름없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공작께서도 죽은 친우를 너무 그리워하지 않는 쪽이 좋으실 겁니다.”

만약 시르칸이 악마를 풀어낸 장본인이라면, 지난 생의 브레드히트를 죽인 것 또한 결국에는 시르칸의 선택일 터. 그 역설이 끔찍했다.

“그것보다는 악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다면, 더 말해 주십시오.”

브레드히트가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는….”

공작이 막 입을 열려던 차, 복도 저편에서 인기척이 밀려들었다. 시선을 흘끗 틀어 공작의 뒤를 보자 그곳엔 기사들을 대동하고 걸어오는 아스테르가 있었다. 화려한 복도와 어울리는 금발이 유리 등잔의 불빛으로 인해 화사하게 빛났다.

세이아드의 시선을 따라 몸을 튼 브레드히트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복도 옆으로 물러난 그들은 아스테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그들에게로 걸어온 아스테르가 눈을 휘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솔리아스의 별들이 이곳에 있었군. 브레드히트 공작, 한동안 보이질 않더니 이제야 모습을 보여 주는가?”

“송구합니다, 전하. 잠시 알아볼 게 있어 합류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무엇이 그대의 발길을 붙든 거지?”

“연이어 일어나는 이변이 기이해 조사를 좀 했습니다.”

아스테르가 흠, 턱을 문지르더니 이내 손짓을 했다.

“내일 자세히 듣도록 하지. 오늘은 그대의 딸이 아비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어서 가 보는 게 좋겠군.”

“회의는 끝난 겁니까?”

브레드히트의 물음에 세이아드 또한 아스테르를 지그시 보았다. 세이아드와 눈을 마주친 아스테르는, 마치 칭찬을 바라는 이처럼 웃으며 답했다.

“오래 끌 것이 뭐가 있겠나. 지휘관인 시온 실드라스가 그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실책했으니, 전장에서 그의 직위를 해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네. 왕실 기사 셋과 실드라스 가문의 기사 열 명이 다치고, 악시드 대공 또한 큰 위험에 처해 부상을 입었어. 현장에서의 실드라스 공작이 아주 끔찍한 통솔력을 보였다는 평이 곳곳에서 들려오더군.”

거기까지는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인지, 브레드히트가 놀란 눈으로 세이아드를 보았다.

“대공도 다쳤나? 왜 말하질 않았어?”

그러자 아스테르가 세이아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브레드히트로부터 떨어지게 만든 그는 자상한 목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아직 나의 정화를 받지 못해 상처가 여전할 테니, 공작은 이만 우리를 놓아주는 게 어떤가?”

“아, 알겠습니다.”

브레드히트는 미안한 듯한 얼굴로 세이아드를 살피곤 자리를 물러났다. 그가 가는 것을 살핀 아스테르가 기사들에게도 손짓했다.

“너희는 공작을 처소로 안내하거라. 대공과 둘이 있겠다.”

“네, 전하.”

평소보다도 깍듯하게 대답한 기사들은 세이아드를 향해서도 예를 표하고는 물러섰다. 앞선 실드라스의 기사들도 그렇고, 묘하게 바뀐 기류가 어색해 세이아드가 입을 다물었다. 복도에 둘만 남자마자 아스테르가 그를 이끌며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레사스와의 정화는 어떻던가?”

질문을 듣는 순간 속이 흠칫했다. 억지로 지워낸 막사 안에서의 낯 뜨거운 일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방금 까지도 생생하던 열기와 지나친 쾌감이 몸을 다시금 찾는 감각에, 세이아드는 무표정을 더욱 고수하며 대꾸했다.

“저를 그곳에 두고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스테르의 앞에서는 여전히 그를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굴기로 했으니, 세이아드는 전에 했듯 행동했다. 질책하는 말투였음에도 아스테르는 언짢아하는 대신 아주 기꺼워했다.

“그게 서운했던 건가, 나의 별?”

“역정을 내시며 둘째 왕자와 떨어지기를 명하셨던 것을 아직 기억하는지라.”

“그대가 혹시 모를 미련을 가질까 싶어 알려 주려 했을 뿐이야.”

즐거운 듯 웃으며 아스테르가 세이아드의 손을 이끌었다. 경쾌한 걸음을 따라 세이아드는 앞으로 이끌렸다. 달빛이 어린 복도를 가로지른 그들은 곧 어떤 방 앞에 멈추었다.

“그 버러지가 아무리 힘을 써도 너의 상처까지는 치유할 수 없다는 걸 이젠 알겠지. 너는 내 옆에서만 완전하다, 이드.”

방문에 기댄 아스테르가 세이아드를 자신에게로 당겼다. 똑같은 눈높이에서 시선이 얽혔다. 아스테르의 눈에 어린 열기가 순간적으로 레사스의 것과 겹쳐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의 손이 세이아드의 허리로 파고들었다. 느슨한 셔츠를 파고든 손이 상처입은 등을 부드럽게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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