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나의 하나뿐인 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상태로 아스테르가 속삭였다. 나직한 부름과 함께, 아스테르의 손으로부터 따듯한 기운이 퍼졌다. 청량하고 맑은 레사스의 힘과는 달리 아스테르의 기운은 언제나 이렇듯 아늑하고 따듯했다.
지나치게 안도감이 드는 나머지, 일렁이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밤하늘에 잠긴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지고 그를 들끓게 하던 감정이 마비되었다. 한때는 분명 이것이 그를 위한 완벽한 안식이라고 여겼다. 마음이 선연히 감정을 느낄수록 아픔만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세이아드를 혼란스레 뒤흔드는 건 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알고 있는 것만을 따르고 싶었다. 어머니의 원수를 죽이고, 그저 니르아를 죽이면서, 다른 것은 고민하지 않고 편해지고 싶었다. 그게 세이아드가 잘하는 거였다. 어둠에 숨어 무언가를 죽이는 것.
의식이 익숙한 길을 따라 흐르려 했다. 지난 생의 평생을 그러했듯 지금도 아스테르가 해답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물건보다 못하게 취급한 것은 과거의 일이고, 어머니의 원수를 끌어내릴 힘은 그가 지니고 있지 않나. 그러니 그냥, 이대로….
또다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불현듯 뇌리를 울린 자신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눈을 깜빡이니 그는 어느새 아스테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상태였다. 아스테르가 주는 안식에 취해 매달리던 예전처럼 말이다.
당혹감을 숨기며 세이아드는 낮은 숨을 내뱉었다. 치유력을 따라 등의 상처가 아물고 있었기에, 살이 돋아나며 속이 채워지는 감각이 선득했다. 아스테르의 힘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켜고 삼키는 소리가 아스테르의 쇄골에 닿았다.
그러자 세이아드의 등을 만지고 있던 손이 우뚝 굳었다. 아스테르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곧 따듯한 손이 세이아드의 허리를 껴안았다. 몸이 바투 붙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세이아드가 고개를 들자, 푸른 눈이 세이아드를 일렁거리며 보고 있었다.
“이드.”
저 일렁임이 우스웠다. 그토록 아스테르를 따르고 충성하던 때에는 보이지 않던 그의 모든 변화들까지도 말이다. 잠시 둔해졌던 마음이 점차 경각심을 세우기 시작하자, 그를 만나기 직전에 깨달았던 것이 뇌리를 스쳤다.
아스테르의 정화에는 분명히 다른 힘이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폭주는 세이아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두 개의 명제 때문에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스테르가 본인의 힘에 대해 제대로 아는지를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적법한 솔리아스의 왕세자이며, 세이아드의 폭주로 인해 딱히 이득을 볼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아스테르가 스스로도 뭘 하는지 알았다면?
섬뜩한 가정에 세이아드는 표정을 지워 내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런 그를 보내주지 않겠다는 듯 아스테르가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얌전한 맹수처럼 안겨 있다가 도망가는 세이아드가 못마땅한지, 아스테르의 눈동자가 형형해졌다. 그는 세이아드를 다시금 당겨 오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갑자기 다시 날을 세우는군. 오늘은 너에게 칭찬받을 일만을 했던 것 같은데.”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듯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였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살갗을 지분거리는 감각이 꼭 개미가 기어가는 듯했다. 등줄기로 소름이 흠칫 돋았다. 세이아드는 그를 지나치게 쳐 내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잠시 인내했다.
“그 자리에서도 치유해 주실 수 있는 상처였습니다. 굳이 지금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 비효율적이라 여기지 않으십니까.”
“너는 고집이 세니 그리하지 않으면 네게는 내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을 거다. 내게는 네가 필요하고, 너 또한 내가 필요해.”
길고 탄탄한 목을 탐하던 아스테르의 입술이 일순 따끔한 감각을 주었다. 전갈의 꼬리에 쏘인 것처럼 찰나의 통증이었다.
봐주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 정도로 참았으면 충분해.
세이아드는 손을 들어 아스테르의 팔을 붙들었다. 크게 힘을 줄 필요도 없이 그를 떼어내자 아스테르도 더 버티지 않았다.
“제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그리 말하시겠습니까?”
세이아드의 날선 물음에 아스테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더니 아주 기쁜 듯이 천천히 눈을 휘기 시작했다. 얇은 입술이 가늘게 퍼지며 진심으로 황홀하단 웃음을 만들었다.
“당연하지.”
세이아드가 반박을 하기도 전에, 아스테르가 속삭였다.
“망가진 너야말로 나의 곁에서 절대 떠나지 못할 테니,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 그대에게는 오직 나 외엔 아무도 없게 될 텐데.”
그렇게 말하는 아스테르는 세이아드의 삶을 통틀어 가장 기뻐 보였다. 길쭉히 접힌 푸른 눈이 천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다정하게 지껄이는 아스테르의 음성이 귓가로 파고들 때마다 영혼까지 서늘해지며 소름이 끼쳤다.
지금 그가 마주한 감정은 한낱 소유욕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것이었다. 그냥 느낄 수 있었다. 동작을 멈춘 세이아드의 뺨을 아스테르가 천천히 쓸었다.
“내일부터는 더욱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네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집안을 구애의 선물로 주지, 이드. 그러면 너도 나의 진심을 알게 될 거야.”
보통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아스테르는, 뺨을 쓸던 손을 내린 후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우아하게 뒤로 물러선 그가 속삭였다.
“전처럼 다시 나의 옆에 누우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조만간이야. 오늘은 보내줄 터니, 나를 생각하며 잠에 들거라.”
아스테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표정이 사라진 세이아드를 싱긋 웃으며 쳐다본 아스테르가 몸을 틀었다. 흥얼거리는 작은 노랫소리가 복도에 깔렸다. 아이에게 자장가로 들려주곤 하는, 작은별이라는 노래였다.
천연덕스러운 흥얼거림이 들리자 숨이 막혔다. 아스테르를 피해 방으로 들어간 세이아드는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을 헤치고, 커튼이 쳐진 창가에 섰다.
다급한 손길로 창을 열자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천천히 바깥을 살피자 환하게 내리쬐는 달이 세이아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로 시선이 가는 환한 달이었다.
레사스를 처음 만났던 순간에도 달이 저렇게 떴다. 지상에 부딪힐 듯 가까이 내려온 커다란 달을 멍하니 보고 있자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잠시 동안 숨을 고른 세이아드는 곧 창가 밖을 살폈다. 시간 낭비는 이쯤 하면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새롭게 알아낸 것들을 파고들 때였다. 그는 브레드히트의 입을 통해 나온 ‘악마’의 존재를 곱씹었다.
익숙한 단어다, 악마는. 세이아드의 삶을 내내 따라다닌 호칭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 모든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는 여기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던 세이아드는 뒤이어 아까 전의 아스테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망가진 자신일수록, 오히려 기껍다….
계속해서 그 말을 곱씹을수록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자신의 폭주에 의도적으로 일조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상정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아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이 그쪽으로 쏠렸다.
만약 아스테르가 정말 의도적으로 자신의 폭주에 일조했다면, 자신이 죽는 걸 원했다면, 그의 의지는 악마가 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왕국의 멸망을 원할 이유가 없었다. 아스테르는 소유욕이 강했고 권력에 대한 의식도 확고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쥔 것을 놓고자 할 합당한 설명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악마. 시르칸 실드라스. 아스테르 라만 솔리아스.
세 가지를 번갈아 생각하던 세이아드는 결국 무언가 더 알아내기 위해선, 제일 확실한 시르칸 실드라스에 대해 파고들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의 의도를 알기 위해선, 적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전투의 기본이었다.
다행히도 이번 생의 세이아스는 홀로 움직이지 않았다. 데세르투스에게 미리 지시한 것들이 지금 그가 알아내야 할 정보였으니, 티아키와 슬슬 접선할 시기였다.
***
마음이 급할수록 시간은 빨리 흘렀다. 밤 사이 모습을 숨긴 세이아드는 데세르투스의 남부 지점에 들러 티아키에게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얻은 게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던 것이 대략 열흘 전인데, 그 뒤로 소식이 없으니 성과는 아직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실드라스 성으로 찾아오라는 암호를 새기곤 돌아왔다.
아침부터 실드라스 공작가는 어수선했다. 부상자가 생기긴 했으나 각오했던 일이고, 전투 인력인 티테르들은 멀쩡하니 당연하게도 숲의 토벌은 재개되었다. 아침 식사 후 숲의 경계에 모이라는 왕세자의 명이 세이아드에게도 전달되었다.
세이아드는 출발 전 브레드히트에게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묻고자 저택을 살폈다. 많은 이가 모인 자리에서 아무래도 그 같은 대화는 적절하지 못해 보였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럴 겨를도 없을 것 같았다.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어 복도를 걷던 세이아드는 공교롭게도 그 방향에서 오고 있는 레사스와 마주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레사스 특유의 기운이 감각을 먼저 깨웠고, 그것을 따라 고개를 들자 레사스가 멀리서 보였다.
보라색 눈과 시선이 얽혔다. 그 또한 자신을 이미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제게로 향한 채 둘은 서로를 향해 걸어왔다.
화창한 하늘이 스며든 창문으로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흰 커튼이 바람을 따라 크게 부풀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구름처럼 퍼지는 커튼이 레사스를 감싸는 것처럼 부풀어, 자신도 모르게 그 광경을 보던 세이아드가 퍼뜩 시선을 돌렸다.
아스테르의 눈과 귀가 있을 저택 안에서 굳이 레사스와 알은척을 할 필요는 없으니, 세이아드는 일부러 차가운 기색을 더하곤 무뚝뚝하게 걸었다. 점점 가까워져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어질 즈음, 세이아드가 걸음을 먼저 멈췄다.
“전하를 뵙습니다.”
감정 없는 목소리로 예를 갖춰 복도 바깥쪽으로 물러나자, 레사스가 멈춰 섰다. 말을 섞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숙이고 있으려니 시선 아래로 레사스의 군화가 다시금 움직였다.
이대로 지나가 주나 싶어 자세를 바로 하려는데,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세이아드의 목덜미를 보고 있던 눈길과 마주쳤다는 게 옳을 것이다.
“밤새 창문을 열어두고 잤나 봅니다, 대공.”
레사스의 흰 얼굴에 이상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그가 상체를 바짝 숙여 가까워지더니, 세이아드의 목덜미를 열띤 시선으로 매만졌다.
“벌레가 목을 물고 갔네요.”
무슨 헛소린가 여기면서도 세이아드는 손을 들어 목을 만졌다. 뚫어질 듯한 레사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매만지자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어젯밤 아스테르가 입술로 장난을 치던 부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