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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79화 (79/147)

#79

뭘 하나 했더니 수작을 부려 놨군.

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라 그다지 새롭진 않았다. 아스테르는 사람들의 오해를 즐겼다. 그들의 사이가 은밀하고 깊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습관처럼 흔적을 만들었다. 정작 세이아드에게는 어떤 감정도 보여 주지 않았던 주제에 말이다.

“별것 아닙니다.”

세이아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굳이 큰일로 만들어 그의 짓을 부각시키는 게 싫었다. 아스테르가 정확히 뭘 계획하는지 알아내는 것과 별개로 그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러나 레사스에게는 대수로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세이아드의 답에도 레사스는 목덜미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마주하며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기분이 상당히 저조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입술. 자세히 보면 안쪽을 꾹 깨무는 모양이 지난번에 했던 것과 비슷했다.

뭐가 그리 언짢은 건가, 싶으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아스테르에게 정화를 계속 받기로 했다는 건 서로 협의한 일인데 말이다.

“용건이 없으시면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레사스가 말이 없자 묘하게 조바심이 일었다.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 자리를 뜨겠다는 의사를 밝히자마자 레사스의 입술이 열렸다.

“그대가 원치 않는 일은 억지로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대공. 그건 알고 있겠죠.”

목소리가 제법 심각했다. 레사스와 늘 붙어 다니는 기사들 중 하나인 바인이, 그들의 대화가 심각해지자 슬쩍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다른 기사들도 그를 따라 거리를 벌렸다.

세이아드는 자신을 마치 약한 이처럼 대하는 레사스의 말이 불편했다. 재회한 뒤로 그는 내내 그랬다. 어젯밤 막사에서도 이깟 상처를 두고 무리하는 것처럼 대하질 않나, 감기 따위에 걸리는 것을 걱정하지 않나.

“과한 걱정을 하시는군요. 그런 것을 강요당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남들의 앞에서 책을 잡힐 만큼 약하게 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레사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세이아드 자신이 약한 존재가 되는 것만 같았다. 딱 잘라 말하자 레사스의 안색이 묘해졌다.

“…그대가 허락한 일이라는 건가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지난날이 떠올랐다. 레사스는 계약의 조건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는 말에, 아스테르에게 많은 걸 허락하지 말라던 경고를 했었다. 아무래도 그게 거슬린 것 같았다.

세이아드는 곤란한 눈으로 레사스를 보았다. 아스테르의 비위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 맞출 수 있었지만, 레사스를 달래는 법을 세이아드는 잘 알지 못했다. 최근의 경험으로 미뤄 보아 어릴 적에 하듯이 사소한 것을 주면 좋아하긴 했으나 지금은 딱히 건넬 것이 없었다.

고민하던 세이아드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잠시 망설인 그는 시선을 애매하게 피하며 작게 말했다.

“정 거슬리신다면 전하께서 다시 덮어 주십시오.”

다만 지금은 적절하지 않으니 밤에 찾아뵙겠단 말까지 해야 했는데, 레사스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세이아드의 말을 듣자마자 레사스가 그의 손을 붙든 것이다.

“너희는 저택 밖에서 날 기다리거라.”

세이아드가 말릴 틈도 없이 레사스가 명했다.

“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알 수 없는 말을 뱉은 기사들이 일제히 복도를 벗어났다. 세이아드는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게다가 기사들의 버릇을 잘못 들이셨군요. 왕족의 곁에는 언제나 호위할 이가 필요합니다.”

“내 옆에 대공이 있으니 그 누구보다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시간은 아직 충분하고, 지금은 아무도 우릴 보지 않아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요.”

레사스가 손깍지를 껴오며 간절히 속삭였다.

“조금만 그대의 시간을 허락해 주세요.”

그냥 멋대로 하면 될 텐데, 레사스는 굳이 허락을 구했다. 외려 간곡히 부탁해 오는 그가 부담스러워 밀어내기 어려웠다.

“…5분입니다.”

그 정도는 내어줄 수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손을 잡고 복도에 있는 방 하나로 들어갔다. 자신이야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다지만, 레사스는 이곳이 빈방임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이곳이 시온 실드라스의 저택인 것을 깨닫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질릴 정도로 들렀을 테니 그 구조야 훤히 꿰고 있겠지.

“저택이 무척 익숙해 보이십니다. 빈방을 꿰고 계시는군요.”

날선 지적을 레사스가 부드럽게 넘겼다.

“네, 여기가 내 처소였거든요.”

그 대꾸에 말문이 막혀 순간 주변을 살피자, 희미하게 레사스의 체향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 잘 말린 이불 냄새와 햇빛 내음 같은 게 맴도는 방은 그가 묵었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흐트러진 침대를 본 세이아드가 멈칫한 순간 레사스가 잡고 있는 손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형님의 정화가 불안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부디 조심해 주세요.”

살결을 문지르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세이아드는 괜시리 손에 힘을 주곤 대꾸했다.

“상처를 치유하다 장난을 치신 것뿐입니다. 필요한 정화 외에는 받지 않으니, 신경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닿아 있는 곳을 통해 은은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힘을 불어넣는 것이 퍽 익숙해 보였다. 밤새 더러웠던 기분이 묘하게 진정되고 있어 세이아드도 그를 내버려 두었다.

“…꼭 형님의 곁에 머물러야만 할까요, 대공?”

레사스가 낮게 속삭였다. 이미 한번 이야기한 것을 되짚는 그에게 세이아드가 눈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전하께서 왕세자가 되시기 전까진 그의 곁에서 세실리아를 지켜야만 합니다. 왕세자를 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전에는 세실리아를 전하의 곁에 둘 마땅한 명분이 없으니까요. 당장 상성이 맞는 것은 그분이시고, 세실리아 또한 전하에 대한 반감이 큽니다.”

“대공의 걱정과 달리 형님께서는 그대의 누이를 위험하게까진 몰아가지 않을 겁니다. 형님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대공이었으니, 이는 대공을 붙들어 두기 위한 빌미일 뿐이에요. 형님의 곁에 있을수록 대공의 영혼은….”

레사스는 아스테르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쩌면 궁을 비롯해 항상 그와 마주해 왔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으나, 확신하는 어조가 무언가 묘했다. 이상한 기시감에 세이아드는 빤히 레사스를 관찰했다. 심각한 눈으로 속삭이던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왜 말씀을 멈추십니까?”

“아뇨, 내가 주제넘었어요. 질투에 눈이 멀어 잠시 미쳤나 봅니다.”

레사스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가 하려던 말이 마음에 걸린 세이아드가 추궁하듯 물었다.

“제 영혼이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하던 말을 이어 주십시오.”

전부터 종종 레사스에게서는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능력을 각성한 이후 반년이라는 기간은 레사스가 충분히 장성한 사내가 되었을 시간이라고 여겼지만, 재회한 뒤의 레사스의 태도는 분명 전보다 무척 어른스러웠다.

종종 세이아드와 마찰이 있었고 어린 청년 특유의 치기를 보이던 겨울과는 무언가 달랐다. 그리고 그런 면모를 볼 때마다 세이아드는 자꾸만, 그의 지나친 성숙함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번 아스테르의 정화를 두고 대화한 이후로는 더더욱.

“뭐가 그리 걱정되시는 겁니까? 분명 저는 왕세자 전하의 힘이 잘못되었다 여기긴 하지만, 기실 어떤 식으로 그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일순 레사스의 눈이 괴로운 듯 찡그려졌다. 그러나 아주 찰나의 찌푸림이었다. 금세 표정을 되돌린 그가 미소를 그려 내며 사과했다.

“대공의 말이 맞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화였으나 세이아드는 저것이 억지웃음임을 알았다. 그가 진심으로 웃을 때 얼마나 해사하고 아름다운지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제게 뭘 숨기고 계시나요.”

“아뇨, 나의 지나친 기우였어요. 그저 욕심이 났나 봅니다. 대공의 일부를 조금 허락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눈이 멀었어요. 아무런 방해 없이, 그저 대공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레사스가 간절히 속삭였다. 그를 계속 추궁하려던 것을 잠시 잊을 정도로 애절한 음색이었다.

“나의 대공에게 새겨진 불결한 표식이 조바심을 일으켰어요. 사실, 이번이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도… 내가 부족했습니다. 오랫동안 참아 왔으니 이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리 말하는 레사스로 인해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를 두고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세이아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그리 거슬리시면 전하의 흔적으로 다시 새겨 주시면 될 일입니다.”

슬프게 속삭이던 레사스의 입술이 멈췄다. 뚝 끊긴 태엽 인형처럼 우뚝 멈춘 레사스가 멍하니 그를 보았다. 이번에는 뭐가 그를 걸리게 했나, 하는 찰나 레사스가 그의 허리를 감쌌다. 양팔에 안긴 채로 세이아드는 비틀, 비틀, 뒤로 밀렸다.

그러다 떠밀려 눕혀진 곳이 침대 위였다. 몸이 푹 눕혀지자마자 레사스의 향긋한 체향이 푹신한 침대 위로 확 끼쳤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체향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우아한 맹수처럼 레사스가 그의 위로 몸을 숙였다. 긴 팔을 뻗어 세이아드의 양팔을 지그시 누르며 레사스가 속삭였다.

“대공께서는 종종, 자신이 어떤 말씀을 하는지 모르시는 것 같군요.”

대꾸할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레사스는 갈증이 난 사람처럼 곧장 몸을 숙이더니, 세이아드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낙인이 찍히는 것처럼 피부 위로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소름돋을 정도로 부드러운 살덩이가 목의 단단한 빗근을 빨아당기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읏.

간지러움이 끼치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소리를 들은 레사스의 목울대가 크게 움찔거리는 게 동시에 느껴졌다.

갑작스레 민감해진 몸은 레사스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성가시게 반응했다. 아스테르가 자국을 남길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개미가 기어 가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것이 아니라 등골이 오싹하고 속이 자그러워 소름이 끼쳤다.

그러다 흰 치아로 레사스가 그의 목덜미를 짓씹는 순간, 세이아드는 눌린 손목을 비틀며 턱을 치켜들었다.

“아…, 읏…!”

눕혀진 몸이 쑥 꺼지는 기분이 일순 무서워 세이아드는 힘을 주었다. 그를 속박했던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가는 듯했으나, 레사스는 그를 잡아 두지 않았다. 손을 떼며 세이아드를 놔주자마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꼭 숲을 한바탕 엎던 때처럼 거칠게 박동했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까만 머리칼이 이마 위로 내려온 레사스는 열띤 얼굴로 그를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중히 물러나는 그를 따라 세이아드도 몸을 일으켰다. 레사스는 새로이 자국을 덧새긴 목을 빤히 보더니, 이내 안심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훨씬 낫네요.”

목을 내어주자 훨씬 기분이 나아진 모양을 보고 있자니 앞선 의심이 지나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석연찮아 입술을 닫고 생각에 잠기자, 레사스가 먼저 물러났다.

“대공께서 같이 움직이는 걸 원치 않으니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마저 볼 일을 보고 조심히 오세요.”

“…알겠습니다.”

레사스는 빙긋 웃고는 문가로 향했다. 아까까지의 일이 없던 듯 굴던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 문을 열려던 레사스가 멈칫하며 그를 뒤돌아 보았다. 잠시간 말없이 세이아드를 주시하던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정화는 티테르의 영혼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형님께서 그대의 영혼을 고독하게 만들게 내버려 두지 마세요. 형님께서는 아주 다양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니, 언제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앞서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은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그를 붙들 시간도 주지 않고 문을 닫았다. 해선 안 될 말을 한 사람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따라 세이아드도 문을 열었다. 복도 밖으로 나간 레사스를 붙들고 무슨 뜻으로 그러했냐고 물으려는데, 기이하게도 레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앞에서 기척을 감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세이아드는 그의 흔적을 따라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창 아래를 내려다보자 기사들에게로 향하고 있는 레사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또 지난번처럼 채신머리 없이 창을 문처럼 쓴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잘만 자신을 따라다니던 남자가 중요한 이 순간에는 사라지는 것이 도통 이해하기 어려워, 세이아드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눈에 담았다.

아무래도 그가 느꼈던 위화감이 그저 착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레사스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다. 이제 의문은, 과연 전생의 레사스도 이 같은 것을 알고 있었냐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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