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티테르의 삶은 숲에서 시작해 숲에서 끝난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들은 숲을 감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보통의 사람은 알 수 없는 그림자 괴물의 일화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작위를 물려주고 자식이 그다음 대의 티테르로 장성하고 나서도, 티테르에게는 언제나 의무가 함께했다. 그것은 죽음까지도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막상 그런 삶을 살면서도 숲에 대해 정확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화사한 나무들과 그 아래에서 자라난 풀과 꽃을 보고 있으려니, 이곳이 왕국을 가둔 거대한 장벽이라는 게 믿기 어려웠다. 그만큼 평화롭고 고요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티테르를 위한 수많은 동화와 노래 속에, 숲은 그저 무서운 곳이 아니라는 내용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달이 인간을 위해 덮어 준 밤의 장막이며, 악마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곳이라고 말했다. 티테르라고 하여 처음부터 겁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숲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부모가 들려주는 내용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결국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악마라는 존재가 현실에 대두된 시점에서, 세이아드는 그가 아는 전설들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해 보기로 했다. 그가 들었던 숲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 숲이 정말 악마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곳이라면… 그 또한 악마가 죽지 않았다는 브레드히트의 설명과도 일통했다.
그렇다면 악마는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태양이니 달이니 하는 것들이 신을 뜻한다면, 그들은 왜 악마를 죽이지 않았던 걸까? 그러지 못해서? 아니면 그러지 않기로 했기에? 악마는 대체 정체가 뭐지? 그리고 아스테르는 정확히 어떤 식으로 악마와 연관된 거지?
세이아드가 생각에 잠겨 침묵하는 사이 앞서가는 티테르들 또한 말이 없었다. 세이아드의 뒤에서 따라오는 아스테르의 기사들만이 종종 속닥거리며 실드라스 가문을 모욕했을 뿐이다. 그들의 속삭임은 티테르들에게는 옆에서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시온이 그들의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주먹을 쥐며 인내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굳이 이 불편한 상황을 중재하진 않았다. 시온을 토끼사냥에서 꺼내 온 것은 그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를 측은히 여기거나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이아드는 삭막하고 잔인한 기류에 익숙했다. 이 상황을 견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빠, 겨울이 아닌 숲은 원래 이렇게 조용한 거야?”
그때, 한참이나 긴장하며 사방을 살피고 있던 세실리아가 다가와 물었다. 바로 어제 그 같은 괴물을 만났으니 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세이아드 또한 그 점을 염려하긴 했으나, 숲은 몇 시간 째 조용했다. 그날 죽은 니르아가 많았던 것인지 잠든 니르아의 흔적도 없었다.
“그런 편이지.”
긴 침묵이 깨지자 앞서가던 노바가 흘끗 뒤를 보는 게 보였다. 내심 답답했던 것인지 스텔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나는 아직 숲의 핵에 대해서 잘 이해되지 않아. 핵은 악마를 봉인한 흔적인데, 그걸 없애면 오히려 악마가 나오는 게 아니야?”
브레드히트도 이쪽을 보았다. 어중간하게 중간에 선 시온만이 어딘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길을 주다 말았을 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 있던 존재가 하루만에 이렇게 위축되는 것이 기묘했다.
사람의 몰락은 다 그렇다. 한순간이다. 추앙받던 티테르가 악마보다 못한 처지가 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정확한 개념은 나도 알지 못해. 다만 티테르의 힘은 악마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니, 티테르가 핵을 부술 때만 악마의 흔적이 사라지는 개념이었다. 그건 직접 보면 느낄 수 있어.”
지난겨울 핵을 없앴을 때는 딱 그런 기분이 들었다. 붉은 구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어떤 힘이 소멸하는 느낌. 본능적으로 삿된 것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세이아드는 먼 앞을 살폈다. 핵을 감싼 나무는 보통 근방의 것과 비교에 월등히 컸으므로,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 주변에 니르아가 많은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제법 걸었다 싶었는데, 때맞춰 도착한 모양이다. 세이아드는 어렵지 않게 거대한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그럼 핵을 부수면 숲이 알아서 사라지나요?”
시온과의 갈등 이후 많이 불편했던 것인지 침묵하던 노바가 세이아드에게 물어왔다. 그에게 일부러 질문해 오는 모습으로부터 세이아드는 그들이 지닌 부채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어머니의 일이 무척이나 의식되면서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세이아드는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만큼은 쉽게 알아차렸다.
“아니. 핵이 사라진 경계를 기점으로 사람이 직접 숲을 없애는 것뿐이다. 목재는 훌륭한 자원이고 남는 것은 사클라니 상단이 사들여 왕국 전체로 운송하지.”
여기서 티테르끼리의 내분이 더 나는 것은 세이아드가 크게 바라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그냥 그런 것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묵묵히 대꾸하자 노바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가 답을 돌려준 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다들 직접 말을 꺼낼 용기는 없고, 이때다 싶어 말을 거는 게 보기 좋진 않네요. 스텔라 언니도요.”
세실리아의 지적에 노바가 입을 달싹였다. 안 그래도 삭막하던 공기가 더욱 매서워지는 게 느껴져 세이아드가 누이를 제지했다.
“세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같이 의지하며 싸우기 위해서는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게 맞지 않을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나를 포함해 오빠의 말을 믿지 않던 이들이야. 그러다 결국 오빠의 말이 맞다는 게 밝혀졌는데도 잘못된 믿음이나, 동료에 대한 불신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잖아.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
세실리아는 냉랭한 눈으로 기사들과 티테르를 모두 훑고 마지막으로 시온의 등에 대고 말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맞다는 게 아닌 걸 알 나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 나는 사과 받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오직 사죄받고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악시드 대공뿐이니까요. 가족인 나조차도 오빠에게 미안하고 매일같이 부끄러운데, 다들 그 간단한 한마디를 하지 못해 아무 일도 없던 척 걷고 있어요?”
그 순간 세이아드는 스텔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짓던 수치스러움이 담긴 얼굴을 보자, 세이아드는 기이하게도 마음에 있는 어떤 응어리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응어리가 더 건드려지기 전, 그들이 찾고 있던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일단은 핵을 살피는 게 먼저다. 다들 경계 태세에 들어가고, 니르아의 습격에 대비하도록. 핵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것을 지키는 니르아가 있다.”
세이아드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 자신도 주변을 살피며 니르아의 흔적을 찾았지만, 기괴하게도 나무 근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공, 나무를, 나무를 보게.”
그때 브레드히트가 크게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나무의 위로 시선을 올리자, 몸통의 중앙에 박힌 거대한 구체가 보였다. 막으로 감싸진 알처럼 보이는 그것은 나무의 조직들로 감싸져 있었는데, 세이아드가 기억하고 있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핵이… 비어 있어!”
브레드히트가 경악하며 말했다. 그의 외침처럼, 그것은 비어 있다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투명한 껍데기를 한 핵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공허한 색을 띠고 있었다.
“주변을 지키는 니르아가 없이 이렇게 쉽게 여기로 온 건 이유가 있었네.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야. 대공, 이건….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네. 어떤 방법으로 악마의 힘을 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레드히트는 심란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더니, 자책을 내뱉었다.
“내 잘못이기도 하네. 시르칸 그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진즉 알아차렸어야 했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러자 시온이 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침묵을 깨고 나선 그가 나무를 가리키며, 절박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이것을 해명하려 했다.
“숲마다 다른 모습의 핵을 지녔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공작께서도 모든 숲을 돌아보진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숲마다 특징이 다르듯 핵 또한 그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럴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필사적으로 핵을 삿대질하던 시온의 손이 이내 자신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세검을 뽑아든 그가 핵을 겨냥했다.
“저걸 부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다시 안으로 더 들어가, 숲에 있는 핵을 부수면, 결국 악마가 사라지니 문제될 건 없습니다.”
“정신 좀 차리게, 실드라스 공작. 아니, 시온, 너를 오래간 살펴 온 삼촌 같은 늙은이의 말을 제발 들어. 그대의 아버지가 저지른 죄는, 동료를 처참히 죽음으로 몰아가고 이 나라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행위야. 그런 태도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네.”
브레드히트의 목소리는 한껏 격양되었다가, 점점 작아져 지쳐 버린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괴로운 몸짓으로 얼굴을 쓸고는 세이아드를 보며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고통과 후회가 어린 사과를 건넸다.
“정말로 유감일세, 대공. 이 내가 어리석게도 눈이 멀어 사실을 보지 못했네. 그대가 전에 말했듯, 나는 동료인 세레나를 믿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했어. 나는… 갈등이 두려웠네. 거기서 더 큰 갈등이 생기고 우리가 분열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 비겁하게 굴었어. 진심으로 미안해.”
주름진 중년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본 노바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입을 열려는데, 아스테르의 기사단이 끼어들었다. 단장인 아데나가 천천히 그들 사이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렇다면 브레드히트 공작께서는 이것이 명백한 증거임을 인정하시는 거군요. 대공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