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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84화 (83/147)

#84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그들을 살피던 기사들이 개입하자 시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검을 고쳐잡았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억울하고 겁먹은 어린 청년의 얼굴로부터 억지로 시선을 뗀 세이아드가 할 말을 유심히 골랐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흔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실드라스를 넘겨 버리면, 그것대로 곤란해.

아데나는 아스테르의 수하답게 그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짧은 침묵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는 듯, 그가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저 핵이 어떠한 위험도 없다고 판단하면, 그대로 빼내 증거로 가져가면 될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나서거라.”

“네, 단장님.”

대검을 뽑아든 기사 서넛이 그의 명에 따라 움직였다. 말릴 구실을 생각하던 세이아드는, 갑작스레 뒷덜미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몸을 휙 틀었다. 익숙한 니르아의 기운이 저 멀리, 더 깊은 숲 안으로부터 밀려들기 시작했다. 어제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어제는 도망가기 위한 돌진이었다면, 지금은 명백히 인간들을 노리고 밀려들고 있었다.

어제처럼 소름끼치게 강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숫자가 압도적이었다. 마치 이 숲의 모든 니르아가 빠져나오는 것처럼.

다른 티테르들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일제히 숲 안쪽을 응시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동시에 일어난 행위에 기사들이 조금 놀랐는지 주춤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어제의 일로 인해 교훈을 얻은 것인진 몰라도, 가장 가까이 있던 시온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지금은 핵을 가져갈 때가 아니야. 당장 뒤돌아서 숲 밖으로 나가거라. 가이드들을 지키고 기사들을 최대한 동원해 마을을 막아.”

기사들은 그런 시온의 말을 거짓이라 여겼는지, 비뚜름한 웃음을 짓고는 그를 무시했다. 티테르의 권위를 무시하고 아스테르의 명을 따르려는 그들을 시온이 어떻게든 말리려는 그 찰나.

새까만 파도가 밀려 들어왔다. 수백 마리가 넘는 니르아가 물소 무리처럼 엄청난 속도로 그들에게로 들이닥쳤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속도는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전례 없이 빠르게 그들을 기습했다.

“오, 빠…!”

티테르들은 다행히 본능적으로 반응했으나, 문제는 니르아가 들이닥치는 속도였다. 순식간에 무리에서 흩어진 티테르들의 부름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티테르가 아니라, 이것들을 다 막지 못했을 때의 피해였다.

“다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니르아가 숲 밖으로 나가지 않게 막아!”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세이아드 또한 밀려드는 니르아로 인해 어딘가로 떠밀렸다. 사방이 온통 새카만 덩어리투성이였다. 어딘가에서 기사들의 비명이 들렸지만, 그것조차도 곧 니르아가 내뿜는 특유의 고요함과 공포에 물들어 사라졌다. 개미 떼처럼 똘똘 뭉친 그것들은 워낙 서로 엉겨 있어 핵을 한 번에 부수기가 어려웠다.

세이아드는 그에게 달려드는 니르아를 닥치는 대로 베었다. 작은 공간을 만들자마자 곧장 땅의 그림자를 불러와 가능한 한 보이는 것을 모두 죽였다. 숨 돌릴 시간도 없이 밀려드는 덩어리를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그는 일행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숲의 깊은 곳까지 와 있었다. 그냥, 이상하게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남쪽 숲의 중간쯤이었다.

이게 바로, 티테르가 진즉 숲을 정복할 수 없던 이유였다. 고작해야 열 명도 되지 않는 티테르들을 데리고 이렇게 많은 수의 니르아를 매번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마저도 가이드의 힘이 없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너무 많다. 수가, 지나치게 많아….

아득한 밤하늘에 빠진 것처럼 검은색이 사라지질 않았다. 세이아드는 반복해서 휘두르던 검을 잠시 내리고, 크게 가슴팍을 들썩였다. 숨을 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을 셈인지 잠깐 생겼던 공간을 니르아가 스멀스멀 채워 오는 게 보였다.

그때, 바로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대체 대공이 어디 계시다는 겁니까!”

“바인, 뒤에! 아니, 옆에! 조심해!”

“리그다, 방향을 말해도 소용없어. 어차피 사방에서 몰려오잖아!”

출발할 때 보이지 않다 싶었던 이들의 목소리에, 세이아드는 눈을 찡그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의 얼굴이 차차 굳었다. 힘을 쓰느라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한 눈동자로 소리의 근원을 쏘아보니, 거기에는 정말로 니르아를 베어 내며 오는 바인과 리그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거짓말처럼, 보름달처럼 하얀 옷을 입은 레사스가 정확히 자신을 주시한 채 서 있었다.

악마의 농간이 아니고서야,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세이아드는 우뚝 선 채로 레사스를 노려보았다. 티테르도 아닌 가이드가, 고작 두 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숲 가운데까지 왔다고. 그것도 저렇듯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지.

티테르조차도 이 같은 상황을 견뎌 내기 힘든 마당에, 별의 힘이 없는 가이드나 기사가 여기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니르아가 일부러 저들을 죽이지 않는 한은 말이다.

세이아드는 내내 레사스가 자신의 해답이라고 믿었지만, 지금 이 같은 상황에 닥치자 세실리아가 했던 말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 레사스가 혼자 살아남아 끝을 맞이했던 게 수상하다고 했던 그 말 말이다.

게다가 바로 오늘 아침에 했던 의미심장한 경고까지 더한다면….

“엇, 전하! 저기 대공이 계시는데요!”

“대공, 조심하세요!”

희미한 배신감, 기묘한 의심,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적개심이 합쳐져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노려보았다. 저를 좋아한다고 잘도 속삭여 대면서, 지금처럼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이며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불신을 불러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왜 이렇게 언짢은지도 모를 일이다. 기실 그를 믿거나 의지하는 게 아니었으니, 레사스가 뭘 숨겼든 자신이 반응할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이드!”

니르아가 다가오는 것도 잠시 내버려 둔 채, 세이아드는 우뚝 서서 레사스를 주시했다. 그러자 무표정이던 레사스의 표정이 다급히 바뀌더니, 크게 놀라며 그에게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일순 그의 얼굴 위로 드러난 커다란 두려움이 너무 생생해, 세이아드는 그의 외침에 반응했다.

검을 휘두른다거나, 땅 위의 그림자를 움직인다는 자각 없이, 다른 힘이 움직였다.

그것은 어제 니르아의 속에 삼켜져 어둠에서 어둠을 불러냈던 것처럼, 그를 덮치려는 니르아들의 내면에서부터 터트리는 힘이었다. 그에게 달려드는 것들을 없앨 것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그 힘이 들이닥쳤다.

세이아드를 덮으려던 어두운 덩어리들이 펑, 펑, 터지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핵이 부서지며 삽시간에 가루로 변한 니르아들이 허공으로 소멸했다. 황급히 그를 향해 뛰어오던 바인과 리그다가 눈을 크게 뜨며 제자리에 멈췄다. 오직 레사스만이 이런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그의 앞으로 뛰어왔을 뿐이다.

그러고는 세이아드가 말릴 틈도 없이 그를 거칠게 껴안았다.

“이드, 제발, 제발…! 위험이 그대의 곁에 오게 하지 마세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레사스는 살기 위해 세이아드를 껴안는 것 같았다. 그의 팔이 덜덜 떨리며 세이아드를 미친 듯이 끌어당기더니, 자꾸만 품에 가두려 했다. 이미 안길대로 안겨 더는 그와 밀착할 수 없음에도 어떻게든 닿으려는 듯이.

끓는 볕처럼 뜨거운 체온을 통해 레사스의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를 보자마자 뒤집혔던 마음과는 별개로 몸은 그리웠다는 듯, 이때만을 기다린 듯 레사스를 반겼다. 잠시 홀린 듯이 세이아드는 무의식을 따라 레사스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를 자신의 품에 꽉 끌어안고 품어내자 살 것 같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오늘 내내 막혀 있던 숨통이 비로소 트이는 기분이었다.

“다칠 뻔했잖아요, 이드….”

레사스는 아이처럼 세이아드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 것 같았다. 열에 들떠 그를 안고 있던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속삭임이 피부 위로 닿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안고 있던 팔을 놓고는 레사스를 떼어놓았다. 감정이 실린 손길이 그를 밀어내자 레사스가 젖은 보라색 눈을 내려 자신을 보았다. 처량한 눈이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얼토당토않은 말로 넘어갈 생각은 마십시오. 그 어떤 가이드도, 고작 두 명의 기사와 함께 숲의 안쪽으로 올 순 없습니다. 그것도 지금처럼 니르아가 들끓는 순간에는.”

세이아드의 목소리는 내면의 동요와 반대로 오히려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레사스는 눈물이 맺힌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놀라서 멈춰 있던 바인과 리그다가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공에게는 무엇이든 숨기는 게 어려워,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었는데…. 내가 실패했네요. 나는 뭐든, 그대처럼 잘 해내는 게 힘들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세이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레사스는 혼잣말을 그리 중얼거리더니 곧 으레 그러하듯 웃는 척을 했다.

“숲에서 나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인과 리그다는 들어선 안될 말이에요. 지금은 그것보다는, 니르아를 막는 게 우선입니다. 하루가 꼬박 걸릴 싸움이기에 그대를 돕기 위해 숲으로 미리 왔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냐는 말입니다, 전하. 저는 수상한 이를 옆에 두고 싸울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이에게만 등을 맡길 수 있습니다.”

레사스는 믿을 수 없다는 세이아드의 말에 입술을 잘게 떨었다. 그는 지독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보는 것처럼 저 위에 뜬 태양을 보던 레사스가, 다시금 시선을 내려 세이아드와 눈을 마주쳤다.

“어떤 기적은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대공. 나는 자세한 것을 절대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를 외롭게 만드는 악마가 아니에요. 그대를 지독히 사랑하는 남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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