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레사스가 흘린 말은 얼핏 들으면 그저 뜬소문 같지만, 지금의 세이아드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전대 왕후의 이야기를 듣는 동시에 왕궁에서 레사스가 정화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뇌리를 스쳤다.
‘제대로 이어받지 않았다면, 그 힘이 태양의 모습을 빌려 어떤 식으로든 티테르에게 해를 가할 수는 있겠지요. 그저 가정일 뿐입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자신이 레사스로부터 묘한 기시감을 감지하기 시작했던 시기도 이와 비슷하니, 분명 저 말을 하던 레사스는 스스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태양의 모습을 빌린 후계자와, 악마에게 소원을 빌어서 자식을 낳은 왕후….’
두 문장을 합치자 뜻이 명확해졌다. 왕후가 실드라스의 영지에서 악마의 힘과 얽힌 자식을 낳았고, 그 시점으로부터 악마가 왕국에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하면, 어머니의 일 또한 분명히 악마의 짓일 것이다. 그러자 무언가 맞아떨어졌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은 악마에 관한 것을 잘 알았고, 왕후는 구태여 실드라스 영지에서 왕자를 낳았다. 레사스가 흘린 말이 사실이라면 왕후는 분명 전대 실드라스 공작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좀 더 자세한 걸 확인하기 위해선 브레드히트를 만나야 했다. 세이아드는 지난 생 그가 사라진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지를 새삼스레 느꼈다. 아무도 모르게 폭주한 베트리아와 그녀로 인해 죽게 된 브레드히트까지, 그 모든 사건 근처에 아스테르가 있었다.
이로써 추측이 좀 더 명확해졌다. 아스테르는 적어도 악마와 함께 움직이거나, 가이드의 모습을 빌린 악마일지도 모른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조급함과 갈증, 그리고 분노가 입 안을 쓰게 적셨다. 당장이라도 레사스를 붙들고 캐묻고 싶은 것을 세이아드는 일단 참았다. 대신 의심과 의문이 뒤섞인 눈으로 레사스를 빤히 보았다. 레사스는 곤란한 듯이 눈썹을 휘며 웃었다.
연민이 일게끔 안쓰러워 보이는 표정에 혹여나 마음이 움직일라, 세이아드는 표정을 굳혔다.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 건지 바인이 나서며 너스레를 떨었다.
“힉, 왜 멸망 같은 무서운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주군은 그런 말씀을 하시기엔 너무 어리십니다.”
“가끔 보면 주군은 나이답지 않게 너무 성숙하세요. 저희를 막 거두어 주셨던 때는 그래도 소년 같으셨는데 말이에요.”
리그다도 조심스럽게 바인의 말에 맞장구쳤다. 걱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레사스가 괜찮은 됨됨이의 이들을 거뒀음이 새삼 와닿았다. 과거에도 이들이 있었던가 떠올려봤지만, 기실 세이아드는 그 당시 레사스가 누굴 데리고 있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안카를 기억하던 것은 그를 잃은 레사스가 지독하게 울었기 때문이었고, 그 외 기억하는 이들은 죄다 아스테르의 명으로 레사스를 견제하던 과정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데세르투스를 비롯한 그런 것들 말이다.
서로 참, 치열하게도 대치했다. 아스테르는 어떻게든 레사스를 짓누르고 싶어 했고, 세이아드에게는 직접적으로 시키진 않았으나 기억하는 바로 많은 암살자를 보내기도 했었다.
지난날을 떠올린 탓에 뒤이어 따른 레사스와의 과거를 회상하니, 반년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아스테르가 꾸준히 레사스를 죽이려 했다는 점과, 세이아드 자신과는 결코 같이 있지 못하게끔 하려는 부분이 그러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과거의 세이아드는 아스테르의 그 같은 행동을 단지 경쟁자를 향한 비틀린 행위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 와 깊게 파헤쳐 본다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은 그자가 약점을 쥐고 있는 자이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지금의 레사스를 보아하니, 그 심증이 한층 확실해졌다.
“물론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북부의 티테르가 있는 한, 악마가 나타나더라도 너희를 지켜줄 테니 말이야.”
레사스는 리그다의 말을 듣고는 되레 그들을 위로하듯 말했다. 차분하지만 확신이 선 목소리에 리그다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북부는 예로부터 한 번도 니르아에게 함락된 적 없을 정도로 강한 티테르를 지녀왔다면서요. 실제로 대공께서는 듣도 보도 못한 무위를 보여주고 계시고요.”
“그러고 보니 대공, 어째 전보다 훨씬 강해지신 것 같네요. 겨울 사이에 특훈이라도 하신 겁니까? 살면서 니르아를 이렇게 손쉽게 죽이는 힘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공만 계신다면 지금 같은 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어요. 다행입니다, 정말.”
바인이 부담스럽게 그를 칭찬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보는 리그다까지 더해지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함이 올라왔다. 지난 반년간 퀼리의 호들갑에 겨우 익숙해지긴 했지만, 세이아드는 원망과 두려움이 아닌 감정을 타인으로부터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도, 소중하다 말해 주는 것도,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도 그랬다. 브레드히트가 그같이 진솔하게 사죄할 줄도 몰랐어서, 근래 겪는 모든 일들이 죄다 낯설었다. 힘을 쓰면 응당 따라오는 것은 두려움과 경멸이었는데 말이다.
그러자 가만히 그 광경을 보며 웃고 있던 레사스가 동화를 들려주듯 자상스레 속삭였다.
“북부의 피를 이은 티테르는 아주 특별하거든. 어둡고 위험한 밤하늘을 밝히는 달처럼, 어떤 고난이 있어도 결국 나아갈 길을 만들어줘.”
달.
나의 달.
어떤 의미도 두지 않고 들었던 레사스의 다정한 부름이, 지금 그의 속삭임을 듣자 불현듯 크게 다가왔다. 자꾸만 자신을 별이 아니라 달이라고 부르는 것에 저런 이유가 있나 싶어서.
마음이 아릿해지는 이상한 감정에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을 세워 갈비뼈를 파헤치고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휴식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군. 가는 길에 계곡이나 연못을 찾아보지.”
“예, 대공. 저희는 계속 숲 안쪽으로 향하는 겁니까?”
“그래.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원래는 숲의 경계로 향해 니르아가 빠져나가는 것을 확실히 막고자 하는 게 목표였지만, 레사스는 오히려 니르아를 불러오는 안쪽을 이때 확인해야 최종적으로는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의견을 냈다.
일부러 바인과 리그다가 있는 앞에서 그리 말하는 바람에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추궁하진 못하고, 그의 의견을 따르는 중이었다. 어차피 세이아드 혼자서는 모든 경계를 막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물어볼 것들과 의문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일단 니르아를 진압하는 것이 중요했다. 세이아드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금 내딛기 시작했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음에도 모습을 감추고 있던 달이 태양과 잠시 같은 하늘에 머무르더니, 이윽고 해는 차차 가라앉아 숲속으로 삼켜졌다.
숲의 안쪽, 상당히 깊은 안쪽까지 들어왔다고 본능적으로 느껴질 즈음에는 밤이 찾아온 뒤였다. 오는 동안 많은 니르아를 죽였지만, 상급 니르아는 보이지 않았다. 핵이 있는 곳과 숲 안쪽일수록 강한 니르아가 나오리란 예상과 달리 남쪽 숲은 그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외려 니르아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기름과 천을 챙겨 온 리그다가 횃불을 만들어 바인과 나눠 들고 사방을 주시했지만 한 시간째 숲은 고요하니 조용했다.
“왜 니르아가 나오지 않는 걸까요? 이렇게 안쪽까지 들어왔는데….”
조용한 상황이 오히려 무섭다며 바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긴 전투를 이어온 탓에 그는 체력의 한계를 맞이한 상태였다. 리그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억지로 걷고 있었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세이아드 또한 서서히 정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차였다. 생각보다 늦은 피로감이었다. 레사스가 함께해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니르아와 싸워 온 이래 이처럼 몸 상태가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 어느 때보다도 수월하게 니르아를 죽일 방법을 깨우쳤으니 무리가 갈 법한데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니르아가 나타났을땐 솔직히 아득함을 느꼈다. 모든 걸 죽이기 전에 힘의 부작용과 조우하는 것이 더 먼저일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전투에서도 지금같은 상태만 유지한다면, 더한 상황도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원하는 거지?’
세이아드는 내내 말이 없는 레사스를 슬쩍 살폈다. 그의 옆에서 내내 걷고 있는 레사스는 생각에 잠겨 한동안 조용했다.
“대공, 이제부터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요.”
마음속으로 의문이 확 치솟는 걸 일단 누르고, 세이아드는 당장에 집중했다. 안으로 걸어갈수록 몸속의 피가 끓는 듯한 감각이 들고, 목덜미가 오싹오싹해졌다. 큰 위험에 반응하는 것처럼 경계심이 크게 일었는데 니르아를 느끼는 순간과는 달랐다.
그 찰나 어둠이 앞에 깔렸다. 별빛도, 달빛도 들지 않는 어둠에 모두가 잠시 멈칫했다. 기이하게도 횃불이 있는데, 횃불이 뻗쳐 나가도 보이는 것이 온통 까맸다. 세이아드만이 희미하게 이 안을 살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대공은 어둠을 볼 수 있죠. 뭐가 보이나요?”
레사스가 속삭였다. 세이아드는 안력을 실어 새카만 칠흑을 헤쳤다. 가닥가닥 파헤친 광경 너머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저택 하나를 삼키고도 남을 듯한 굵기의 나무 중앙엔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핵. 나무의 핵이었다.
“핵이 있습니다.”
“비어 있나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레사스가 그걸 알 리 없는데, 당연하게도 물어보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서도 일단은 그의 명을 따랐다. 어둠에 가려져 아무것도 없는 듯했던 핵은, 희미한 붉은기가 돌고 있었다.
“완전하게 빈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말하기 무섭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어둠에서 무언가 확 튀어나왔다. 몸을 휙 뒤로 물린 세이아드가 공격이 온 방향으로 감각을 실었다.
니르아는 아니었다. 믿기지 않게도 이건 사람의 기척이었다. 그들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기도 전 살기가 실린 공격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전하를 지켜라!”
다행히 실력으로 뒤처지는 이들은 없기에 습격에 당한 이는 없었다. 세이아드의 외침을 따라 바인과 리그다는 빠르게 레사스를 둘러싸고 방어 태세를 취했고, 세이아드는 보이지 않는 적을 장검으로 길게 그었다.
묵직한 무언갈 베었다는 감각이 확실히 들며 피 냄새가 퍼졌다. 니르아를 죽일 땐 맡을 수 없는 비릿한 쇠 냄새에 세이아드의 손이 일순 떨렸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그 당시에나 맡던 역겨운 향이 공기 중으로 확 흩어졌다.
“대공! 지금 이것들, 사람 같은데요!”
“너희가 공격하는 것은 솔리아스의 왕자와 대공이다! 정체를 밝혀라!”
횃불을 든 채로 있어야 하는 바인과 리그다는 방어 이상의 공격을 하지 못했다.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는데, 적은 숨소리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람인 이상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릴 법도 한데 그저 무기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게 괴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했다. 피조차 흘리지 않고 흩어지는 그림자를 상대할 때와 다르게 점점 속이 메스꺼워졌다. 검을 휘두르는 손에 망설임이 실렸다. 아무렇지 않게 적을 도륙하던 과거의 제가 겹쳐지며, 세이아드는 삽시간에 학살의 현장으로 돌아간 환각을 보았다.
분명 급소를 베었다. 누군가 죽었을 것이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휘두르는 이 상황이 마치, 폭주하여 사람을 죽이던 때와 같았다.
‘사람을… 더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싶지 않아.’
지독한 죄책감과 고통이 세이아드를 엄습하는 차, 그의 검이 아주 짧게 멈췄다. 바인이 비틀거리며 잡고 있는 횃불이 허공을 한번 휘저었고, 희미하게 비춘 불빛 너머로 세이아드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를 보았다. 눈에 스쳐 가는 문양은 왕실 기사단의 것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기사의 검이 세이아드를 찌르려던 그 순간, 레사스가 세이아드를 감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