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세이아드의 허리 근처를 웃돌던 작고 예쁜 소년이 어느덧 저를 내려다보는 청년이 된 것도 이상한데, 지금처럼 완연한 성인의 흔적을 발견하면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뺨이 타오르는 듯한 부끄러움 같기도 했고 은밀한 그의 내면에 닿는 감촉 같기도 했다.
제정신으로는 레사스를 더는 보기 힘들어 세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날렵한 턱선이 도드라지게끔 얼굴을 돌리자, 그를 내려다보던 레사스가 바짝 몸을 붙였다. 은은한 솔향 아래로 흥분에 젖은 열기가 느껴졌다.
“쉬이, 괜찮아요. 바인은 자고 있어요.”
애당초 세이아드는 주변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군 건 레사스 본인이었다. 문제는 주변 상황이 아니라, 바로 레사스였다. 그를 똑바로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그와 눈을 마주친다고 생각하자 몸속에서 미칠 듯한 간질거림이 올라오고 뒷덜미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드의 눈을 보고 싶어요. 날 봐주세요, 응?”
잠자리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농염한 속삭임이었다. 머릿속이 녹아내릴 듯한 저음에 세이아드는 손을 들어 반쯤 눈을 덮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세이아드를 보지 못하게끔 완벽히 그를 가린 레사스가 보였다.
“이드.”
살짝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눈이 끝내 마주쳤다. 열을 품은 눈동자는 잠시간 이드를 의아하게 보다가, 이내 묘한 웃음기를 띠었다.
“부끄러워요?”
정곡을 찔린 사람이 그러하듯 세이아드는 되레 역정을 냈다. 그는 얼굴을 가린 손을 억지로 내리곤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왜 갑자기 얼굴을 가린 걸까요?”
“왕족의 몸은 함부로 보면 안 된다는 걸 전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릴 적 그대는 잘만 나의 몸을 보지 않았던가요?”
누가 들으면 마치 자주 그랬던 것처럼 들릴 말이었다. 고작해야 서너 번이었다. 한창 남쪽 궁 근처의 숲을 헤매다 돌아온 그의 옷시중을 도와줬을 뿐, 그의 몸 전체를 본 적은 없었다. 고작해야 인형처럼 곱고 보드라운 상체를 본 게 다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변명하려던 세이아드의 말문이 막혔다. 레사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촉해왔다.
“지금처럼?”
“…….”
입술 바깥으로 뭐든 뱉어 내고 싶은데, 목구멍에서 소리가 턱 막혀 나오질 않았다. 미치겠다는 눈으로 레사스를 올려다보자, 레사스의 얼굴 위로 다른 색이 씌웠다. 화사하던 표정이 금세 강한 열망을 띤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그대를 간절히 원하는 남자가 아니어서 괜찮았나요?”
천천히 고개 숙인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귓바퀴 안으로 흘러드는 저음이 고막을 오싹하게 긁었다. 등줄기가 바르르 떨리며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몸이 굳은 것처럼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어른으로 보이나요? 대공에게도 내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요?”
레사스의 음성에 실린 열망은 단순한 욕망을 넘어선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레사스를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낄 때마다 세이아드 또한 가슴 안쪽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고양감에 세이아드가 몸을 들썩이자, 레사스가 그의 귓불을 입술로 물었다.
한 번도 남이 닿지 않았던 여린 살을 깨무는 감촉에 이성이 날아갔다. 절절 끓는 감정이 세이아드를 확 휩쓸었고, 세이아드는 그것에 저항할 틈도 얻지 못하고 몸을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레사스의 목덜미를 깨물며 그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닿고, 닿고, 계속 닿으려는 듯한 몸짓을 따라 전신이 비벼졌다.
장신의 사내 둘이 어지러이 얽혔다. 풀밭 위에 깔린 검은 망토가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구겨지며 사박사박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근처에서 밤벌레가 울며 그 소음을 숨겼다.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고, 평가하지도 않는, 그저 서로의 존재만이 중요한 숲속에서 둘은 서로의 체온을 깊게 나눴다.
서로의 긴 다리가 얽힌 채 비벼지는 감각만으로도 아찔함이 밀려들었다. 여자와 관계를 맺던 그 찰나에 비하면 분명 아무것도 아닌 행위인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보다 더 눈앞의 이 사람과 연결되는 기분이 세이아드를 미치게 했다.
밭은 숨을 뱉어 내던 그는 이내 레사스를 꽉 끌어안고는, 여린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 부드러운 살을 꽉 깨무는 동시에 둘은 똑같은 끝을 맞이했다.
세이아드의 얼굴 옆을 짚고 있던 팔뚝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예쁜 얼굴을 잔뜩 흐트러트린 레사스가 고개를 숙이곤, 불긋한 입술을 아래로 더운 숨을 토해 냈다. 길게 뱉는 숨을 따라 레사스의 흰 턱을 타고 땀방울이 맺히더니, 이윽고 세이아드의 망토 위로 떨어졌다.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고 얼굴을 파묻은 채,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비비며 일부러 숨을 고르는 척했다. 어떤 것도 따질 필요 없이 그저 레사스의 맥동을 느끼는 이 찰나가 슬플 정도로 좋아서, 그래서 그냥 있었다.
레사스는 다행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세이아드를 마주 안으며, 그와 똑같이 어깨에 얼굴을 비볐을 뿐이었다. 차분해진 서로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둘은 그렇게 한참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고, 새벽이 찾아올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더 이상 둘은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바인과 리그다가 뒤척이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게 느껴졌다. 얼마 가지 않아 깨어날 것이 확실해 세이아드는 이제라도 뒤처리를 할 시간임을 알았다. 천천히 레사스를 안은 팔을 놓자, 그를 안고 놓아주지 않던 레사스가 미련이 남는 듯 그를 오히려 힘주어 안았다.
“…아침이 오기 전에 채비를 마쳐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까의 행위가 제법 부끄러웠다. 서로의 옷에 분명히 남았을 흔적이나 흐트러진 모습 따위가 명백한 행위를 말해 주기에, 세이아드는 빠르게 씻고 싶어졌다. 이 모든 것을 없던 일인 척하고 싶었다.
왜냐면 방금 있던 일은 분명 저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화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많았을 텐데, 레사스와 있으면 자꾸만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싫은 건 아니나 궤도를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정해진 길을 이탈해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굴러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불안함을 불러왔다.
정화라는 핑계를 대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세이아드 자신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 감정이 뭔지 알고 싶으면서도 알기 싫었다. 분명 예전과는 다르다. 어린 레사스를 동생처럼 아끼던 때는 느낄 수 없던 이상한 감정들이 깊숙이 자리해 세이아드에게 어떤 충동을 자꾸 불어넣었다.
돌아 버릴 듯한 답답함이었다. 안에 든 마음을 죄다 긁어 내,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핀 후 이름을 붙여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제 손에 쥐어진 이 감정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데, 의식이 자꾸만 그걸 막았다. 왜냐면 세이아드에게는 고작 자신의 감정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맞아. 할 일이 많다. 지금은 충동을 따를 때가 아니야.
이제야 겨우 눈을 가리고 있던 암막에서 벗어나 진실에 도달하고 있었다. 숲을 나가면 시온의 일부터 시작해 아스테르를 끌어내릴 방법을 찾아내야 했고, 레사스에게 물어볼 것 또한 넘쳐났다. 그런 것들을 알아내도 모자랄 판국에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고찰할 시간은 없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며 세이아드는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감정을 눌러 보려 했다. 하지만 물 위로 뜨는 풀처럼 상기된 마음은 쉽사리 눌러지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스스로를 설득하고자 레사스로부터 벗어나려 해 보았다.
“…이렇게 닿는 것만으로도 죽을 만큼 황홀할 수 있다니 신기해요.”
그러나 레사스는 그의 말을 듣고도 놔주질 않았다. 대신 작게 속삭였다. 그를 밀어내려던 세이아드가 멈칫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닿는 건 생각보다 더 행복한 일이군요.”
세이아드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는 레사스의 감정이 그저 욕정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게 어려웠다.
“전하께서는… 저와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서 물어보았다. 자신이 여기서 어떻게 반응하는 게 맞는지, 조금이나마 가닥을 잡아 보려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마음을 받아 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하께서 제게 적어도 어떤 진심을 가지셨는지는, 저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결국 상대와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결과는 단 두 개만이 존재한다. 그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것.
“티테르와 가이드의 교제는 어차피 불가능합니다. 대대로 금지되어 온 사항이기도 하고, 저는 북부의 피를 이을 자식을 낳아야 하니, 결혼 대상은 반드시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이드와 티테르 사이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금제는 철저하게 지켜져 온 규칙이었다. 가이드가 불공평한 정화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 외에도 부정적인 것들이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을 정화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티테르가 사고를 치기도 했고, 레사스처럼 무모하게 티테르를 지키고자 숲으로 들어가는 가이드가 나오기도 했으니,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율이 맞았다.
그러나 이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세이아드가 지닌 선택지는 어차피 거절뿐이었다. 레사스의 마음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이 같은 선택을 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까지 와 버린 이상 의사를 밝히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세이아드는 누군갈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그가 죽인 피는 영원히 그의 영혼에 묻어 있을 것이고, 그 같은 죄인이 행복해진다는 것이 모순이었다.
레사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다정히 세이아드의 등을 쓸어 주다가, 천천히 팔을 내린 후 물러섰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채로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약한 바람이 불어 레사스의 곱고 흰 이마 위에 늘어진 머리칼을 헤집었다. 잔잔하게 흩날리는 머리칼 아래로 눈동자가 휘었다.
“대공께 나의 마음을 드러낸 이유는, 대공이 나를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감히 그대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내 옆에 매어 둘 정도로 나는 뻔뻔하진 않아요.”
덤덤한 고백이 흩어졌다.
“다만 나는 대공께, 듬뿍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좋은 말을 듣고, 소중히 다뤄지고, 보호받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지셨으면 싶었어요. 그대가 혼자 모든 책임을 지지 않았으면 했고, 그대가 절대….”
레사스가 환하게 웃었다.
“끔찍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어요.”
웃어선 안 될 상황인데도.
“모두가 그대를 오해하더라도 나만은 그대를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대공은 결코 혼자가 아니에요.”
마음을 돌려받는 자리에서 레사스는 그저 웃었다.
“하지만 대공은 원래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곧 이런 것들에 질릴 정도로 익숙해지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숲을 정화하고 다들 진정한 자리를 찾게 되면, 대공은 꼭 행복해질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게요.”
차분하게 읊조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레사스는 마치 그것만을 생각해 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미래를 상상한 듯 기쁘게 웃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동안 대공의 옆에 있어야만 하니, 다시 만난 자리에서 내가 왜 이렇게 구는지를 알려드려야 했을 뿐입니다. 대공께 어떠한 아픔이나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 나의 마음은 신경 쓰지 말아요.”
살면서 들어 본 가장 어리석은 고백에 세이아드는 눈썹을 찡그렸다. 목 안쪽이 뻣뻣하게 아파 오고 가슴이 아려 와 일순 화가 날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인 주제에, 막상 레사스가 그의 의견을 따르자 형용할 수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그 표정을 오해했는지 레사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자신의 마음이라곤 없는 듯 구는 레사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익숙함이 밀려들었다. 언뜻 보면 저 모습은 과거의 자신과 비슷했지만, 적어도 세이아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자신을 지웠다.
그러나 레사스는 도통 자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바보 같은 모습을 도무지 내버려 둘 수 없었어서, 저 아이를 자신이 매일같이 찾았다는 게 새삼스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