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말을 한 게 용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 보였기에 일순 죽은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목 위로 손가락을 올려 맥을 짚어 보니 다행히 숨은 붙은 상태였다.
빌어먹을.
자신이 맡긴 일로 이렇게 된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아스테르가 수상하다고 여기고 맡긴 일이긴 했지만, 데세르투스라면 별다른 큰일 없이 일을 해낼 거라고 여겼기에 지금 같은 상황은 예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에게도 티테르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기사들의 눈을 잘 피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나 때문에 또 사람이 죽는다면….’
더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아 바뀌고자 했던 삶이었을 텐데, 저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죽는다면 결국 달라지는 것이 없다.
숲속에서 죽여야 했던 기사들이 떠올랐다. 레사스가 나선 덕에 그들을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만약 앞으로도 아스테르를 상대하는 동안 그 같은 일이 또 생긴다면, 그렇다면….
미칠 듯한 기분에 세이아드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은 티아키를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세이아드는 받아온 물로 티아키의 상처를 씻어내고 급한 대로 지혈을 마쳤다. 티아키의 상처는 대부분 자상이었다. 급소를 노린 흔적을 보면 확실히 훈련받은 기사들의 것이었는데, 티아키의 실력으로 기사에게 들켰다는 것이 의심쩍었다.
그가 보았다는 ‘뱀’과 연관된 걸까. 어쩐지 재스퍼의 회상에서 보았던, 뱀을 닮은 니르아 같은데….
추측을 이어 가며 처치하던 세이아드는 시간이 많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티아키의 상태가 보이는 것보다 나빴다. 비단 외상뿐만이 아니라 티아키의 파장까지 불안정한 탓이다. 그가 정상적인 티테르였다면 폭주를 염두에 둘 정도로 기운이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의사보다도 가이드를 청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연히 나오는 결론에,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데려오기 위해 일어섰다. 다만 티아키를 이대로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주변에 당장 위협이 되는 것은 없으나, 자리를 비운 새에 그가 공격을 받는다면?
아니, 최대한 서두르면 가능하다. 불확실한 가정에 망설이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버리는 짓이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다시 살펴본 세이아드는 그길로 공작저로 향했다. 티아키를 대동하고 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는 저택에 도착했다. 티아키 역시 그림자에 숨을 수 있는 존재라 자신의 능력을 동화해 쓸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능력 자체가 다르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서둘러 레사스의 흔적을 찾아 그의 처소로 향하려던 세이아드는 저택의 경비가 아까보다 삼엄하다는 걸 확인했다. 저택 바깥은 실드라스의 기사들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부는 죄다 아스테르의 기사들이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기색이었다.
고민하던 세이아드는 일단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입하기로 했다. 아스테르가 혹시라도 자신을 찾는다면 기사들에게 그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티아키의 일이 급하니 최대한 장애물 없이 레사스를 데려오는 게 옳았다.
바깥을 살피던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방으로 확신할 만한 곳을 찾았다. 어렴풋이 근처에서 바인과 리그다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손쉽게 벽을 타고 올라간 그는 창가의 테라스에 착지했다. 불이 켜진 방 안에는 예상대로 레사스의 두 기사와 레사스가 있었다. 느슨한 셔츠를 입은 레사스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무언갈 지시하고 있었다.
도저히 떨어져 있을 시간이 나질 않는군.
레사스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자꾸만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껄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감정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창을 두드리자 리그다와 바인이 휙 고개를 돌리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레사스는 빤히 창을 응시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걸어왔다. 빠르게 이쪽으로 오는 레사스의 뒤를 바인과 리그다가 말리며 따라왔다.
“전하, 그리 가시면 위험합니다. 누가 있을 줄 알고….”
진지한 얼굴로 그를 말리던 리그다를 아랑곳 않고, 레사스는 창을 열었다. 사람이 오갈 높이의 큰 창이 열리자마자 레사스가 그를 불렀다.
“이드.”
크게 안도한 듯한 모습으로 레사스는 손부터 내밀었다. 세이아드는 어둠 속에서 그 손을 빤히 보았다. 아직 그와 닿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저 손으로 다른 이들을 만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묘했다.
“예? 대공께서 어디 계시다고요?”
허공의 어둠을 보며 말하는 레사스를 살짝 걱정하는 눈으로 바인이 보았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세이아드는 바닥에 가라앉은 밤 그림자에서 나와, 자신을 드러냈다. 갑자기 바닥에서 사람이 솟아나는 모습에 바인이 순간 힉, 기겁했다.
“너희도 이만 나가 보거라. 고생했으니 며칠간은 휴식을 취하도록 해.”
레사스의 명에 바인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다는 신기하다는 듯 세이아드를 보다가, 바인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안 그래도 대공께 찾아가고 싶었어요. 아까 나의 행동으로 대공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 같아서요.”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신 거니까요. 늦은 시간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드가 하는 것은 뭐든 괜찮아요. 실례라고 하지 말아요. 그대가 나를 찾아오는 일만큼 행복한 게 없으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걸요.”
달콤한 것은 멀리하고 있을 땐 참기가 쉽지만, 가까이 한 순간부터는 자꾸만 그 맛을 원하게 된다. 레사스의 말은 사탕과 같았다. 다디단 언어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순 정신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더 이상 이 같은 것에 익숙해져서는 안 됐다.
일단은 레사스와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으니 세이아드는 이 주제를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레사스의 시선을 흘려보낸 세이아드는 용건을 꺼냈다.
“전하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를 따라와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레사스는 당연하다는 듯 옅게 웃으며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러고는 내내 세이아드를 향해 뻗어져 있던 손을 조용히 거두어 뒤를 돌았다. 그걸 보는 찰나 마음 어딘가가 뻐근해졌다.
“형님께서 누군가를 찾기 위해 수색을 강화한 상태라, 복도로 나가면 눈에 띌 겁니다. 괜한 빌미를 드릴 수는 없으니 창으로 나가죠.”
겉옷을 챙겨입은 레사스가 창가로 나왔다. 레사스 또한 이 같은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것에 큰 무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세이아드는 그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다행히도 레사스는 별다른 도움을 청하지 않고 곧장 테라스 너머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최대한 조용히 착지한 그를 따라 내려온 뒤, 둘은 마구간에서 말을 빼돌렸다. 그들이 타는 말을 빼 오는 대신 실드라스의 기사들이 타던 말을 꾀어 낸 후, 공작저 바깥까지 조용히 나무 아래에 숨어 길을 나섰다. 그러던 찰나 순찰을 돌던 실드라스의 기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말이 있는 상황에선 숨는 것이 쉽지 않아 세이아드는 잠시 멈칫했다. 이대로 그들을 지나치는 쪽은 오히려 소문을 만드는 꼴이라 고민하는 사이 기사들이 그들을 발견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레사스에게 다가온 그들은 상기된 기색으로 인사했다. 오늘 있던 일이 어지간히 영향을 줬는지 선망이 가득한 눈빛이 과감 없이 드러났다. 곧이어 세이아드를 발견한 기사들은 더욱 기합을 주고 그에게도 인사했다.
“각하께서도 계시는군요!”
“…그래. 수고가 많다.”
“밤이 늦었으니, 혹 가실 곳이 있으시다면 호위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깨달았는지 기사들은 곧 둘에게 호위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의아한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레사스가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 고생이 많으셨기에, 잠시 마음을 살필 겸 밤 산책을 하자고 권했다. 둘만의 시간을 갖고자 나가는 길이니 염려치 말거라.”
묘하게 들리는 말에 세이아드가 휙 고개를 돌려 레사스를 보았다. 레사스는 잘도 생긋 웃으며 기겁할 말을 이었다.
“사적인 일이니 너희는 지금 본 걸 입 밖에 내지 말거라. 대공께서는 불필요한 소문이 도는 것을 싫어하신다.”
“아,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레사스의 되도 않는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처럼 수긍이 간다는 눈치였다. 잘했다는 듯 기사들을 훑은 레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끌고 기사들을 스쳤다. 그 뒤를 따라 세이아드도 일단 길을 나섰다. 당혹감과 어이없는 마음이 동시에 자리했으나 말씨름하는 시간을 아끼기로 했다.
쉬지 않고 달려 둘은 민가에 도착했다. 일부러 티아키를 데려다 둔 곳에서 떨어진 곳에 말을 묶어 둔 후, 세이아드는 헛간 안으로 레사스를 안내했다. 허름한 헛간에 별다른 거리낌 없이 들어온 레사스는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티아키에게 곧장 향했다.
“그때 그 분이군요.”
더러운 헛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레사스는 곧장 티아키의 팔을 잡았다. 가만히 그의 상태를 살핀 레사스가 세이아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화를 받으면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이 가능할 거예요. 그래도 의사는 필요합니다. 일단은 급한 처치부터 한 뒤, 내일 안전한 곳으로 바인과 리그다를 시켜 회복하게끔 할게요.”
레사스의 답을 듣자마자 안도감이 들었다. 죽지는 않을 거란 생각을 하자 긴장이 조금 풀리며 막막하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개를 끄덕이자 레사스는 곧 눈을 감고는 한참이나 티아키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 지친 기색으로 팔을 놓은 레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로 티아키의 안색은 눈에 띄게 괜찮아졌고, 숨소리 또한 조금씩 고르게 바뀌었다. 그를 살피던 세이아드는 문득 레사스가 굉장히 지친 상태일 거라는 걸 자각했다. 워낙 티를 내지 않아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간 레사스는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뿐인가. 잘도 왕족을 부려먹고 있는데, 토를 달지도 않았다. 그가 자신의 부탁은 언제나 들어준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이드가 하는 일이니까요. 이유는 상관없어요.”
잘도 그리 말한 레사스가 웃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지친 티가 나는 얼굴에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레사스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당장은 그를 쉬게 하고 싶었다.
“급한 일은 마무리되었으니 쉬는 게 좋겠습니다. 어제부터 한숨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대공이야말로 쉬지 못했으니 잠시라도 눈을 붙여요. 내가 망을 볼게요.”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쉬기 전까지는 깨어 있을 기세였다. 레사스가 한번 고집을 부릴 땐 그 정도가 상당한 걸 아는 터라, 세이아드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주변은 안전해 보이니 둘 다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한 세이아드는 일부러 먼저 바닥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레사스를 올려본 그가 망토를 끌러, 바닥에 두었다.
“누추한 곳이지만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다소 강압적인 권유에도 레사스는 불쾌해하긴커녕, 보라색 눈을 크게 뜨며 세이아드를 내려다보았다. 기대하지 않은 권유를 받은 것처럼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안 오실 겁니까?”
“아뇨.”
세이아드가 미간을 찡그리고 묻자마자 레사스가 얼른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레사스가 옆에 앉자 은은한 나무 향이 끼쳤다. 푸른 숲 같은 청량한 체취는 맡을 때마다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그런 거리에 둘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레사스가 내내 옆에 있었던 덕에 힘의 부작용은 치르지 않고 있었지만, 피로가 쌓인 건 세이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친 몸과 달리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애당초 세이아드는 잠에 드는 시간이 극히 적었다.
바로 옆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이 얽혔다. 깨어 있는 사람의 숨소리였다. 아무래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쪽은 세이아드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귓가에 자꾸 닿는 숨소리가 의식되어 세이아드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못 보던 새 많이 능숙해지셨군요.”
반년 사이 크게 달라진 레사스의 모습 전반이 그러했으나, 특히 떠오르는 것은 아까처럼 둘러대는 능숙함이나 입맞춤 따위였다.
“경험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굳이 주어를 밝히진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떠올린 입맞춤을 따라 질문이 그리 나왔다. 레사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경험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드, 오해예요.”
대체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몰라도 레사스가 황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세이아드의 눈길이 절 잡은 손에 닿자 레사스는 흠칫 손을 떼며 물러섰다. 세이아드가 그를 저지하기도 전이었다.
“이드가 아닌 사람과는 간혹 손을 잡았던 것이 전부입니다. 그마저도 자주 있던 일은 아니에요. 나를 내어주고 싶은 사람은 대공이 유일해요. 다른 이와는 결코 입을 맞춘 적이 없어요. 당연하게도 그 이상을 한 적도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