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96화 (94/147)

#96

눈을 내리깐 세이아드는 절 만지려던 레사스의 손을 눈에 담았다. 지나치게 조심하며 만지려다가도 알아서 물러선 게 신경 쓰였다. 그러나 숲에서의 대화 이후 레사스의 존재가 꺼림칙한 상태였고, 스스로도 불필요한 접촉은 원치 않았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억지로 시선을 든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답을 곱씹었다. 간곡히 호소하는 말은 거짓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갑자기 능숙해지신 이유가 뭡니까.”

포괄적인 질문이었지만, 레사스는 그 말을 듣더니 긴 속눈썹을 당황한 듯 깜빡였다. 하얀 뺨이 불긋해지더니 그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부끄러운 듯이 긴 손가락이 입술과 코를 매만졌다. 세이아드에게까지 그 감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능숙하다고 느껴졌나요? 대공께서 그리 여기리라고 생각하진 못했어요. 그때 분명, 형님보다도 못하다고 하셨으니까요.”

정작 그렇게 말했던 본인은 잊고 있던 일이라, 세이아드는 흠칫 속으로 놀랐다. 벌써 한 달도 넘은 과거의 대화였다. 생전 겪어 보지 못했던 레사스의 변화에 한창 경계심을 느끼던 시기였기에 그런 말을 했었을 뿐, 나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때는 전하의 태도가 낯설어 그리 말했던 겁니다. 당시에도 딱히…, 별로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라면 레사스에게 상처가 된 말인가 싶어, 세이아드는 거북함을 무릅쓰고 느릿하게 대꾸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세이아드의 말을 경청하던 레사스는 얼굴을 반쯤 가린 손을 한동안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환희로 가득찬 보랏빛 눈동자만큼은 숨기질 못했다.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는 눈을 마주보기 어색해 세이아드가 결국 시선을 피했다.

“…나와 입 맞추는 게 싫지 않았던 거군요. 이드가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작게 읊조리는 레사스의 말에 속이 갑자기 끓었다. 수치스러움이 밀려들어 세이아드는 곧장 입을 열어 반박했다.

“그리 말한 적 없습니다. 전하께서 갑자기 능숙해지셨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정색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닿지 않으려 애를 쓰던 것도 잠시 잊었는지 레사스가 바닥을 짚은 세이아드의 손등을 만졌다. 살짝 닿은 레사스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떨어져 있는 날 동안 나는 언제나 꿈속에서 그대와 입을 맞추곤 했어요. 깨어 있는 동안에도, 그렇지 않은 순간에도, 계속해서 그대가 마음에 머물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내게 달라진 게 있다면, 그건 다 대공께서 지나치게 달콤한 탓입니다.”

잘도 낯간지러운 말을 속삭이는 입술이 불긋했다. 근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입을 맞췄던 기억이 불쑥 솟았다. 달콤한 언어만큼이나 다디단 맛을 지닌 입술임을 알지만, 세이아드는 자신이 그간 다소 충동적으로 굴었다는 걸 인정했다. 불쑥 치미는 마음을 억누른 그는 아까 전 생각했던 주제를 꺼내기로 했다.

“표면적으로 저를 위해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은 필요한 일이니 괜찮습니다만…. 앞으로는 지금 같은 말씀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그와 제 사이에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터인데, 레사스의 감정을 자꾸 마주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제게도 잘못이 있었다. 레사스의 마음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불필요한 정화는 해선 안 됐는데, 영문 모를 충동에 넘어가질 않았나.

가이드와 티테르의 사이는 항상 선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께서 누누이 하던 말을 잘만 지켜왔던 주제에 최근 들어 저답지 않게 굴었다.

그 말을 들은 레사스가 순간 눈을 깜빡였다. 예기치 못한 거절을 당한 아이처럼 고운 눈망울이 크게 뜨였다. 몇 초간 말이 없던 그는 입술을 작게 벌렸다가, 잘게 떨었다. 이윽고 짙은 눈썹이 모로 늘어지더니 레사스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내가 이러는 것이 대공을 힘들게 하나요?”

“그저 저희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연인도 아닌 사이에 들을 법한 말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데다가, 혹여나 다른 이가 이 같은 말을 듣는다면 오해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티테르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고, 차후 전하께서 정혼자가 생길 때를 생각하면 불미스러운 일은 미리 막는 게 좋아 보입니다.”

레사스가 처음 마음을 고백하던 때에는 그의 이런 행동이 저를 다른 식으로 원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욕정도 아니고 순수한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관계가 번거로워지기 전에 정리해야 했다.

“대공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레사스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여전히, 많이 미운 걸까요?”

예기치 못한 질문에 세이아드는 멈칫했다. 레사스는 담담하게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속삭임을 이었다.

“숲에서 그대가 했던 말을 돌아와서도 한참 생각했어요. 이드가 먼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면 나 또한 오래간 그대를 미워했을 거라고 하던 말이요. 분명 나는 이드에게 기대하고 싶지 않아 했던 순간이 있었고, 내가 다가가는 것이 오히려 그대를 괴롭게 하는 일이라고도 여겼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보이는 모습이 어떠했든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을 거예요.”

차라리 화를 내거나 전처럼 운다면 무시하기 쉬웠을 텐데, 덤덤히 말을 잇는 레사스는 외면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다. 흘러드는 저 말을 믿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가, 앞서 그랬던 것처럼 거부감이 일었다.

레사스의 마음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

레사스가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의 감정만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저 마음이 얼마나 강렬하든, 전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그가 언제든 자신을 포기할 것 같다는 불신이 마음에 자리한 탓이다.

그 깊이를 신뢰할 수 없었다. 설령 믿는다 한들 그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죽여야만 했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이상, 아마도 세이아드는 오래간 레사스를 과거와 겹쳐 볼 것이다. 그건 건강하지 못한 관계였다.

“전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와 저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 바이고, 저 또한 전하께 무례함을 넘어 경멸스레 굴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지자면 죄인은 저겠지요. 다만 저는….”

영혼까지 내어줄 정도로 신뢰했던 아스테르가 자신을 수렁으로 빠트린 이라는 걸 깨달은 삶에서, 세이아드는 더 이상 누군가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믿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어떠한 결점도 없는 완전한 마음이 있기를 바랐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때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레사스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세이아드는 다시는 죽던 날과 같은 허망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레사스가 내비치는 감정에 홀려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싫었다.

레사스가 정확히 뭘 숨기고 있는지를 알기 전까지, 세이아드는 그에게 이 이상 속절없이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저희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을 뿐입니다. 바로 어제처럼 저로 인해 무모하게 구시는 것도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전하의 연인이 아닙니다. 전하의 마음을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나, 결국 나아가도 아무것도 없는 관계라면 적당한 선을 지켰으면 합니다.”

잠시간 뜨겁게 엉겨 붙던 공기가 서서히 식었다. 레사스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하염없이 세이아드를 보다가 희미하게 웃던 얼굴에 웃음을 더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작은 속삭임 같은 수긍 뒤에 혼잣말이 따라붙었다.

“생각해 보면 내 욕심이었습니다. 대공은 너무나 상냥한 사람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위해 자신을 위험에 내던지니… 내가 대공에게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존재이면 안 된다는 걸 잊었어요. 그게 대공을 위험하게 하는 일인 걸 잊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자꾸만 실수를 하네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레사스는 그리 중얼거렸다.

“대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내가 욕심을 냈어요. 아까처럼 귀여운 말을 하면 혼자서 멋대로 오해를 하거든요. 대공은 그저 불쾌해서 꺼낸 주제를 혼자 착각했네요. 미안해요.”

“전하께서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과할 정도로 수긍하는 모습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바라던 바를 이뤘음에도 이 같은 감정이 이는 것이 기이했다. 불편해하는 세이아드를 살핀 레사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앞으로는 대공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게요. 대공께서 정화를 원할 때가 아니면 불필요하게 그대를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부드럽게 달래는 음색에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이걸로 된 건가, 하는 의심이 일 때쯤 레사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 이제 쉬어요, 대공. 그대가 아름다운 꿈을 꾸게끔 내가 옆에서 지켜 줄게요.”

다시금 벽에 등을 기댄 레사스는 쉬라는 듯 싱긋 웃었다. 저보다 어린 청년이 그를 지키겠다는 말에 눈썹을 찡그린 세이아드는, 한숨을 삼킨 후 등을 기댔다. 침묵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어깨에 쌓이는 막막한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싫어서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저리 다정한 말은 천성인가 보군.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않겠다 말한 주제에, 잘 자라는 말을 잘도 저리 속삭이는 것이 그냥 신경 쓰였다. 언젠가 레사스의 연인이 될 사람에게 그가 얼마나 다정하게 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전생의 시온은 그걸 느꼈을까….

그 같은 생각을 하다가 세이아드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서서히 잠들었다. 잠들기 전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귓가에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해요. 나의 달.

얼핏,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

새가 우는 소리가 헛간의 나무판자 틈새로 요란하게 울렸다. 햇빛이 스며들어 세이아드의 눈꺼풀을 찔렀다. 따가운 온기에 그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드는 동시에 그는 곧장 눈을 뜨며 주변을 살폈다. 낯선 장소라는 판단을 하자마자 허리춤에 먼저 손이 올라갔다. 검을 뽑아 들기 전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여긴 우리뿐이니까 괜찮다고, 대공 각하.”

몸을 일으키고 시선을 돌리자 막 헛간 안으로 들어온 티아키가 보였다. 전날 밤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 보이는 그는 생생한 안색으로 품 안에 딱딱한 빵 덩어리와 사과 몇 개를 안고 있었다.

“…살 만한가 보군.”

“덕분에. 목숨을 빚졌어. 상처는 여전한데 어제보단 훨씬 살 만해. 거기 주무시는 왕자 전하가 처치해 준 거겠지?”

티아키의 눈짓하는 곳을 따라 시선을 트니,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잠이 든 레사스가 보였다. 그제야 느껴지는 묵직한 머리통의 무게에 흠칫 몸이 떨렸다. 보기만 해도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이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긴 속눈썹과 콧날이 인형 같았다. 얌전히 잠들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꽤 피곤한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까 영락없는 어린 청년이네. 깨어 있을 때는 나보다 어른 같은데.”

“…귀한 얼굴은 그만 감상하고, 상황 보고나 하지.”

티아키가 레사스의 얼굴을 빤히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함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왕족이 아닌가. 그것보다는 티아키를 그 정도로 위험에 몰아넣은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파악하는 게 급했다.

“전하께서 들어도 되는 건가?”

“같은 배를 탄 사이니 상관없다.”

어차피 잠이 깊게 든 것 같기도 하니, 별 상관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티아키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피더니 세이아드의 앞으로 걸어왔다. 부스러지는 빵을 반으로 쪼개며 내미는 시늉을 하자 세이아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티아키가 사과를 내밀었고, 세이아드는 고민하다 그것만큼은 받아들었다.

“여기 집주인 청년이 건실하니 착하더라고. 혹시라도 우리를 본 걸 입 밖에 내면 죽인다고 했더니 선물까지 주더라.”

“영지민을 함부로 핍박하는군.”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낄낄 웃은 티아키는 이내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고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어제도 잠깐 말했다시피, 왕세자를 감시하는 역할은 원래 다른 녀석이 맡았어.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연통이 닿질 않아, 그게 이상해 직접 내가 나섰지. 여기 오기 전까지 왕세자는 딱히 별다른 이상한 점이 보이진 않았어. 잠들 시간이 되면 잠이 들고, 낮에는 기사들과 훈련을 하거나 왕실의 업무를 처리하더군. 그러다가….”

티아키가 팔뚝을 벅벅 긁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곳에 오기 전, 밤중에 이상한 광경을 봤어. 평소처럼 잠자리에 드는 것 같더니 갑자기 일어난 그가, 허공을 향해 말을 걸더군. 멀리서는 잘 들리지 않아 가까이 갔더니 이런 대화를 했어.”

그러더니 티아키는 잠시 망설였다. 어서 말하라는 듯 눈썹을 찡그리자 그가 음, 하는 침음을 내며 뺨을 긁적였다.

“허공을 향해서 왕세자가 이렇게 말했어. ‘내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이드지, 죽은 영혼이 아니다.’ 대체 뭔 헛소린가 싶어 가까이 가려던 차에, 벽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와 눈이 마주쳤지. 그 모양이 꼭…, 커다란 검은 뱀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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