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97화 (95/147)

#97

아무리 애를 써도 도통 이해할 수 없던 난제가 어느 순간 갑자기 풀리는 것처럼, 세이아드를 둘러싼 어둠이 차차 걷혀 가고 있었다. 왕세자가 악마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맞물렸고, 세이아드는 하루가 다르게 숨겨진 진실을 알아 나갔다. 이를 체감하자 자조가 나왔다.

‘어리석은 놈.’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정작 그가 죽여야 할 대상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것을 모른 채 먼 곳만을 보았다. 악마가 놓은 덫에 걸려, 자신이 먹이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으로 레사스만을 원망했다.

만약 레사스가 자신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되돌려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세이아드는 그대로 이어졌을 삶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정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었고, 헛된 감정을 불러온다고 여겼던 탓이다. 그러나 불현듯 티아키가 전해 온 아스테르의 말을 들으니 섬뜩한 상상이 일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학살을 저지른 채 살아남았다면, 그의 영지를 비롯한 가문의 모든 이들이 화를 입었을 것이다. 세이아드 본인의 경우 사형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설령 살아남더라도 폐인을 피하진 못했을 터.

“대공, 괜찮은 건가?”

역겨운 가정에 잠시 말이 없어진 세이아드를 눈치챈 티아키가 그를 살폈다. 불길한 상상에서 벗어난 세이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할 게 있었다. 뱀 같은 그림자라고 했나?”

“맞아. 불쑥 솟아난 그림자가 아무리 봐도 기이해 살펴보다가 그림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너무 이상해서 숨으려고 하던 차에… 더 오싹한 걸 봤어.”

티아키는 스스로 본 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두드렸다.

“왕세자가 우뚝 멈추더니 천천히 내가 있는 쪽을 보더라고. 그때 본 눈이…, 온통 새까맸어. 살면서 그렇게 기괴한 모습은 처음이라 기겁하는데, 그가 기사들을 부르더군. 도망가기 전 한 번 더 살폈을 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어. 그 길로 기사들에게 쫓기다가 이 꼴이 됐지 뭐야.”

…아스테르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없는데. 그렇다는 건 특정한 조건을 달할 때만 변하는 건가? 듣고 있으려니 꼭, 악마가 그의 몸을 차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티아키가 본 장면은 확실히 의미가 깊었다. 목숨을 내어줬어야 하는 비밀을 보고 살아돌아온 것이 용했다.

“너의 은신은 어지간한 기사들로서는 파악하기 힘들 텐데. 그런데도 들켰나?”

“날 상대하는 법을 잘 알고 있더라. 쫓아오는 이들이 불화살을 쏘고, 횃불이 사방에서 좁혀와 은신이 풀렸어. 며칠을 쫓겼다. 대공이 남부로 갈 거란 소식을 들어서 여기로 목표를 삼았는데, 당연하게도 왕세자가 여기 있어서…. 모습을 쉽게 드러낼 수도 없었고. 뭐, 여기까지가 나의 행복했던 모험 이야기.”

있었던 일을 읊은 그는 궁금하다는 듯이 세이아드에게 질문했다.

“이걸 알고 내게 감시하라고 했던 건가? 대공은 대체 뭘 찾고 있는 거지?”

세이아드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궁극적으로 악마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세자를 공격할 수 있는 정당한 빌미가 필요했다. 그의 입지는 함부로 건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악마임을 밝힐 수 있을 증거도 없었다. 어지간한 증거로는 왕세자를 모함하는 것밖엔 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건국 실화에 나오는 악마의 존재를 알고 있나, 티아키?”

“악마? 그럼. 태양을 삼켜 낮을 없애려 했던 악마잖아. 니나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알아. 혹시 설화에 나오던 악마가 진짜라고 말하려는 건가?”

“한동안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군. 남부 전체에 퍼진 이야기가 많으니 그것들을 살펴보거라.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악마를 깨웠고, 내 생각엔 그게 왕세자와 함께하는 것 같다.”

“며칠 사이 일이 많았는걸? 흐음, 그렇다면 오히려 말이 돼. 만약 내가 본 뱀 모양 그림자가, 그때 쿠르투를 통해서 봤던 기억의 뱀일 수도 있지 않겠어? 나는 기실 전대 공작이 그걸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왕세자라면….”

티아키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잘 수용했다. 그의 말은 세이아드가 내심 유추하던 것과도 일치했다.

어머니를 모함하던 당시에 나타난 뱀의 형태를 한 니르아가 아스테르로부터 비롯되는 거라면, 재스퍼의 기억 속에 있던 얼굴 모를 청년이 아스테르일 확률이 컸다. 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필요한 사람들을 데리고 있던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잘도 나를 기만했군, 아스테르.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속을 태워 오는 분노는 당장 향할 곳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가문을 농락한 당사자를 죽이기 전까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이 살갗을 잘게 찢었다.

고통이 밀려들자 차라리 참을 법했다. 들끓는 염증을 인내하며 세이아드는 티아키에게 일단 지시했다.

“너는 이 길로 최대한 모든 이를 동원해 은밀히 소문을 내거라. 전대 공작의 소문이 깃드는 곳마다 숨어들어, 그 소문의 몸집을 불려. 왕실에 악마의 씨앗이 숨어들었다고 말이지. 뱀의 그림자를 지닌 악마가 왕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왕궁까지 흘러들어야 한다.”

티아키가 목격한 것을 누군가 보아 왔거나, 볼 수 있다면, 소문의 실체가 아스테르일지도 모른단 의심이 왕궁 내에 돌 것이다. 그렇다면 국왕 또한 이것을 무시할 순 없을 터. 그때까지 왕세자의 정체를 드러낼 방법을 찾는다면 그를 공격할 빌미가 생긴다.

“그렇다면 왕세자가 교체되는 건가?”

세이아드는 표정 없는 얼굴을 살짝 틀어 어깨에 기댄 레사스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레사스 왕자가 왕위를 이어야만 너희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다. 그러니 협조해.”

“내가 언제 대공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그나저나 악마라니…. 이게 정말 돌아다니고 있는 거라면, 사람이 많이 죽겠네. 니나가 그랬거든. 악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여서라도 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고.”

“아까부터 언급하던 그 사람인가. 누구길래 그런 것을 아는 거지?”

“아, 니나는 전전대의 수장이었어. 이제는 데세르투스로 흘러오는 아이들을 돌보거나 그런 아이들을 찾아내는 할머니인데, 우리 모두의 엄마 같은 사람이야.”

그리 말하는 티아키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나운 인상이 누그러지며 그가 씩 웃었다.

“니나는 우리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많은 걸 조사하곤 했거든. 나중에 한번 보러 오면 대공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거동이 불편해서 이젠 먼 길을 다닐 수가 없어.”

지금은 브레드히트와 같이 과거에 대해 많이 아는 이들이 도움이 되는 시기니, 한 번쯤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가면 볼 수 있지?”

“서부로 와. 해가 지는 곳에는 밤의 흔적이 많거든. 고대의 이야기가 많이 묻힌 곳이야.”

티아키와 대화를 이어 가던 찰나 레사스가 작게 움직였다. 어깨에 기대고 있던 뺨이 살짝 움직이더니, 새끼 짐승이 파고드는 것처럼 그가 얼굴을 묻었다. 해가 떴으니 곧 출발할 시기긴 했지만 어제 피곤해했던 모습을 보니 좀 더 자게끔 내버려 두고 싶었다. 이리 깊게 잠든 것이 안쓰러웠다.

“대화는 나중에 하지. 일단은 몸을 추스르고 내가 브레드히트 영지로 갔을 때 합류해.”

레사스가 깰세라 세이아드는 최대한 낮게 속삭였다. 자세가 불편해 보여 차라리 눕히는 게 나은가, 고민하며 레사스를 살피자 티아키가 불쑥 말했다.

“이제 보니 전하만 대공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봐. 어지간히 신경 쓰네. 그렇게 좋아?”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에 세이아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티아키가 외려 더 놀란 눈치였다.

“뭘 그런 표정이야? 설마 이제 와서 예를 차리지 않는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나 같은 놈에게 바랄 걸 바라.”

“네가 한 헛소리 때문에 그런 거다.”

“하하, 대공 각하도 부끄러움을 타네.”

“전하를 살피는 것은 기본된 도리다. 그런 걸 두고 이상한 말을 지껄이지 말거라.”

“그런 것치고는 어젯밤 대화가 연인 사이에나 할 법한 것이던데?”

반박하던 세이아드의 입이 잠깐 닫혔다. 분명 사경을 헤매고 기절했던 게 아니었나?

“음습하게 자는 척을 했던 건가?”

“음습하다니! 드문드문 정신이 들다 말다 하는 동안, 어쩌다 대화를 들은 것뿐이야. 다 들은 것도 아니라고. 대공이 질투하는 것만 듣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어.”

거듭되는 헛소리에 머리가 아파 왔다. 질투라는 생소한 단어에 세이아드는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편한 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누군가를 좋아할 때나 나오는 말이지 저에게 쓸 단어는 아니었다. 자신이 레사스를 추궁한 것은…, 단지….

“질투라고 했나? 내가?”

“그게 아니면 갑자기 입맞춤이 늘었느니 그런 걸 왜 신경 써? 딱 봐도 전하는 대공에게 쩔쩔매는데, 좀 살살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마음껏 좋아해도 모자란 삶인데 마음이 통한 귀한 운명을 소중히 여겨. 대공 같은 사람은 그런 게 필요해.”

어디서부터 티아키를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순 혀가 굳었다. 꼭 허를 찔린 기분이 들어서, 그것이 외려 세이아드를 건드렸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정색하며 티아키를 내쫓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걸 입에 담을 시간에 네 몸이나 추슬러. 가 보거라.”

입을 이리 놀릴 정도면 몸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한쪽 입꼬리를 올려웃은 티아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고자 하면 못 할 게 어디 있겠어? 원한다면 다 방법이 있는 것을. 화는 그만 내고 좀 웃고 살라고, 대공. 난 간다. 목숨값은 기억하지.”

손에 든 사과를 툭툭 던졌다 받으며 티아키가 헛간을 나섰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의미 없이 노려보던 세이아드는 곧 한숨을 삼키고 눈길을 돌렸다. 곤히 잠든 레사스의 얼굴을 눈에 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피곤했던 것은 세이아드 또한 마찬가지라 그는 잠시 힘을 빼고, 그저 레사스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게 중요했을까?

레사스가 다른 이와 뭘 했든, 그게 대체 왜….

약점을 들킨 것처럼 수치심과 두려움이 일었다. 서슴없이 세이아드의 행동을 지적한 티아키의 말은 헛소리라 치부하기엔 자꾸만 세이아드의 마음을 긁었다.

‘그렇게 좋아?’

그 질문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보였나, 싶은 의문과 함께 세이아드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살폈다. 기실 세이아드에게 있어 레사스는 긴 시간 미워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였기에, 의식은 언제나 그를 필요 이상으로 아껴선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그와 함께했던 모든 일은 다 목적에 의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나는.

나는, 네가….

스르륵 떨어지는 레사스의 고개를 받쳐 준 세이아드는 천천히 그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눕혔다. 햇빛이 새어들어 그의 잠을 깨울세라, 흰 얼굴 위로 손을 드리워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살짝 찌푸려졌던 흰 미간이 곱게 펴지는 걸 보며 세이아드는 일순 헤아리기 어려운 묵직한 감정과 조우했다. 가슴이 꾹 눌리는 듯이 먹먹해졌다.

티아키의 질문은 세이아드로 하여금 많은 생각이 들게끔 했다. 비단 어제까지만 생각했던 것은 레사스의 마음과 레사스의 행동뿐이었는데, 티아키는 세이아드 본인의 행동을 짚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이 아닌 그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를 되돌아보게끔 했다. 세이아드 프로시어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말이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지금 당장 세이아드가 원하는 것은, 그저 레사스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잤으면 하는 거였다.

그것은 어린 세실리아가 잠들기까지 지켜봐 주던 오빠의 마음과 얼핏 비슷하면서도, 더욱 깊고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길게 내리깐 속눈썹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과 그의 분홍빛 입술을 삼키고 싶다는 욕망이 일순 세이아드의 마음에 일었다. 일련의 감정을 살펴보던 세이아드는 이내 곤란하다는 듯, 레사스의 눈가를 제 손으로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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