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이상한 기분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자신을 떠난 세실리아를 회상하던 그때보다도 더 레사스를 보고 싶었다. 아침까지도 얼굴을 마주 봤던 존재를 이렇게나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 무서웠다. 아픔과 비슷한 그리움이 세이아드를 움직였다.
잠시 멈춰 있던 발이 시온이 향한 길을 그대로 뒤따랐다. 그를 내려다보는 육중한 나무 문을 한 손으로 밀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자, 밤하늘이 칠해진 높은 천장과 광활한 홀이 세이아드를 맞이했다. 금박으로 수놓아진 별들의 향연과 그 가운데를 빛나는 달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펼쳐진 예배당의 끝, 태양을 등진 단상에는 아스테르가 서 있었다.
사흘 만에 마주한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태양을 닮은 색을 띠고 있었다. 햇살을 빚어 만든 금실 같은 머리칼과 시릴 정도로 푸른 눈은 외양 자체로 태양 같다는 착각을 주었다. 누구도 그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지 못하게. 어둠 따위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도록.
“나의 별이 왔군.”
아름다운 중저음이 예배당을 채웠다. 단상에 기댔던 몸을 일으킨 그가 세이아드를 보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미리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티테르들이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아스테르는 세이아드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걸어왔다.
문 앞에 멈춰선 세이아드는 표정을 지우며 그를 주시했다. 미칠 듯 보고 싶던 존재 대신 왕세자가 자신을 반기는 이 광경을 마주하자 역겨움이 치밀었다. 언제나 형체 없는 적을 향하곤 했던 들끓는 증오가 비로소 정당한 대상을 찾아 요동쳤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리석은 과거, 한때는 저 미소가 자신을 구원해 준다고 여겼다. 세상에서 오직 아스테르만이 제 편을 들고 자신을 위한다고. 그 외엔 기댈 곳이 없었기에 세이아드는 간절히 그를 위했다. 해가 갈수록 그의 명령이 자신을 외롭게 고립시켜 갔음에도 고귀하신 왕세자만큼은 절 버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를 왕으로 만들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어머니의 누명이 벗겨지리라 믿고 레사스를 핍박했다. 한때는 아름답다 칭했던 레사스의 외양을 왕후 레아나를 닮은 모습이라 저주하며, 그는 태양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아스테르의 말에 동의하곤 했었다. 무수한 증오를 레사스에게 퍼부었다. 사실 그것은 다 아스테르를 향해야 했던 감정이거늘.
그것도 모르고, 죽어가던 그때 당신을 찾았다. 나를 기만하고 고독하게 만들던 악마가 구원인 줄 알고.
“왜 그런 표정이지? 내가 그립지 않았나?”
가까이 다가온 아스테르의 웃음이 짙어졌다. 도저히 속을 모를 얼굴을 보며 세이아드는 그를 찢어 죽이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너무나 강한 증오가 마음 전체를 휘감았다. 한동안 아름다운 감정만을 마주했던 영혼이 농도가 짙은 분노에 확 물들었다.
“네 가족을 죽게 만든 죄인의 핏줄을 붙들어 두었는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쓰나.”
아니, 찢어 죽이는 것은 오히려 자비롭다.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절망하고 무너지길 바랐다. 자신이 긴 세월 느껴 온 처참한 마음을 그대로 느꼈으면 했다. 지옥이 있다면 그곳으로 떨어지길 원했고 세상의 바닥을 봤으면 싶었다. 시온에게 느꼈던 분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증오심이 세이아드의 몸을 휘감았다.
“웃어, 이드.”
아스테르가 손을 뻗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 턱을 쥐는 손은 분명 따듯했는데, 뱀의 껍질을 만지는 것처럼 소름끼치도록 시리게 느껴졌다. 돌아온 이후 그에 대한 껄끄러운 감정을 잘만 참아냈지만, 진상에 근접한 지금만큼은 그를 견디기가 버거웠다.
욕지기가 치밀어오르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어떻게든 참아내고 연기하여 아스테르의 굴욕을 옆에서 지켜보리라 다짐했는데, 도저히, 이 미칠 듯한 감정을….
“저번처럼 예쁘게 웃어서 네 주인을 기쁘게 해야지.”
그가 왕세자라는 것도 잊을 만큼 몸이 떨려 왔다. 당장에라도 아스테르를 죽이고 싶었다. 당장 그를 죽일 수 있다면, 영혼을 내어줘서라도…!
“폐하께서 행차하십니다!”
일순 이성을 잃으며 희번덕거리던 세이아드의 눈을 즐겁게 쳐다보던 아스테르가, 예배당을 울린 외침에 입가의 미소를 거뒀다. 웃는 시늉만을 한 눈이 서늘하게 세이아드의 등 뒤를 보았다. 국왕이 왔다는 기사의 전갈에 세이아드 또한 정신을 차렸다. 거친 숨을 억누른 그가 몸을 틀어 옆으로 물러섰다.
끼이익, 문이 양옆으로 열리며 기사들을 대동한 국왕이 들어왔다. 그가 이끌고 온 친위대인 태양의 빛 소속 기사들이 먼저 보였고, 그 뒤를 푸른 달의 갑옷이 따랐다. 그 사이에 레사스가 있었다. 남들보다 월등히 큰 키 때문에라도 존재감을 숨길 순 없었겠지만, 많은 이들 사이에서도 레사스의 모습은 눈에 띄었다. 바로 그런 레사스의 옆을 아데나가 불편한 표정으로 지키고 있었다.
“먼 길을 친히 오셨군요, 폐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스테르는 그에게로 걸어오는 국왕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시 없앴던 미소를 다시 걸친 그가 싱글거리는 낯으로 아버지를 맞이했다. 들어오던 순간부터 영 표정이 좋지 않았던 국왕이 아스테르를 잠시 보더니 주변을 훑었다. 안색이 좋지 못한 브레드히트 공작부터 시작해 노바, 스텔라, 세실리아, 마지막으로 시온에게 눈길이 닿았다. 침묵하던 국왕이 입을 열었다.
“남부에서 생긴 일로 온 왕국이 떠들썩하다. 듣자 하니 실드라스 가문이 입에 담지 못할 일과 얽혔다지. 그 말이 맞느냐?”
평소였다면 반갑게 아들을 맞이하며 인사했을 왕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아스테르는 차분히 웃으며 국왕의 뒤에 있는 레사스와 눈을 마주쳤다. 얼핏 본 그의 눈동자가 서릿발같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맞습니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인 시르칸 실드라스가 악마와 계약하여 왕국을 위협할 음모를 꾸몄더군요. 증거가 곳곳에 있고, 브레드히트 공작도 동의했습니다. 친우인 그가 보기에도 이제야 돌이켜보면 그자가 유독 악마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스테르는 평소보다 제법 공손히 고했다. 국왕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이 장소의 모두가 알 수 있었으니, 아스테르가 눈치채지 못하는 쪽이 더 이상했다.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국왕을 세뇌할 수 있는지, 혹여나 그가 힘을 쓰는지를 주시했다. 그가 대체 어디까지 힘을 쓸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악마의 등장은 왕국의 존폐와 관련된 일이거늘, 너는 어찌하여 내게 직접 보고하지 않았느냐. 레사스가 나에게 직접 전령을 보내지 않았다면 짐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들었을 터.”
노기가 은은히 드러나는 음성에 아스테르가 웃음을 지웠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일순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았다.
“폐하께서 제게 일임하신 권리를 따라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이런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다면 태양을 대행할 자격이 없을 듯하여 말이죠. 악마와 관련된 것은 모두 뿌리 뽑는 것이 폐하와 솔리아스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막힘 없이 흘러나오는 말은 딱히 트집 잡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지켜보던 세이아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악마를 입에 담는 아스테르의 모습이 새삼 증오스러워, 레사스를 본 순간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일렁인 것이다.
“그래서 티테르의 처분마저 네가 정하려던 것이냐?”
“대대로 무고한 생명을 죽이며 폭주한 티테르는 처형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전대 프로시어스 공작 또한 그 같은 이유로 폐하께서 사형을 고하셨지요.”
지난날을 지적하는 말에 국왕이 잠시 입술을 닫았다. 굳어 있는 그의 눈이 잠시 세이아드에게 닿더니, 곤란한 듯 일그러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스테르가 사방을 손짓하며 외쳤다.
“이곳에 모든 티테르가 모였으니 공작들께서 말해 보시게. 실드라스 가문이 잠들었어야 할 악마를 깨운 증거가 곳곳에 있고, 숲속에서 비어 있는 핵을 발견한 것도 그대들이지 않나?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의 기사들이 증거를 채취하려는 찰나 말도 안 되는 니르아가 무리 지어 숲을 휩쓸었지. 꼭 증거를 없애려는 악마처럼 기가 막힌 시기에 말이야. 그뿐인가? 일이 끝나고 남은 것은 시체가 되어 증언할 수 없는 나의 기사들이었어. 실드라스 공작과 함께 있던 기사들이 그렇게 죽은 것을 대체 뭐로 설명할 텐가?”
힘주어 하나하나 말하는 아스테르의 말이 사람들을 선동했다. 기사들은 그의 말이 맞다는 듯한 기색이었고, 브레드히트 공작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노바는 혼란스러워 보였고, 스텔라나 세실리아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왕세자의 말이 사실인가?”
국왕은 티테르들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파리한 안색으로 침묵하던 시온이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
“저는 전하의 기사들을 죽이려 한 적이 없습니다. 휩쓸린 니르아로 인해 정신이 오염되었는지 몰라도, 그들이 갑작스레 먼저 저를 해하려 했습니다. 최대한 그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유령에 홀린 이들처럼 이성을 잃고 계속 제게 달려들었습니다. 폐하, 저는 티테르입니다. 악마의 흔적인 니르아를 부릴 수가 없는 별의 후손이라는 뜻이죠. 비록 아버지의 죄가 사실이더라도 남겨진 실드라스들은 아버지의 뜻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나의 기사들이 무슨 연유로 그대를 공격하겠는가, 공작? 일개 기사가 티테르에게 달려드는 것은 자살 행위일 텐데. 더군다나 그대의 아비가 악마를 깨웠다면, 니르아를 부리는 힘이 그 핏줄에 이어졌을지도 모르지.”
시온의 반박을 차단하는 말에 국왕은 마음을 정하기 어려운 듯이 침묵했다. 앞서 심기가 상했던 것과는 별개로 듣다 보니 아스테르의 혀가 그를 홀린 모양이었다. 그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세이아드가 나섰다.
“폐하, 실드라스 공작이 악마의 힘을 빌어서까지 사람을 죽이고자 했다면 진즉 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티테르는 악마의 힘이 없이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자리에서 나서는 법이 없던 세이아드가 놀라웠던 것인지,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보았다. 하지만 아스테르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웃었다.
“폐하께서 염려하시던 바를 나의 티테르가 짚어 주는군요. 폐하께서는 그들의 권능으로 솔리아스를 얼마든지 어지럽힐 수 있다고 항상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정곡을 찔렀는지 국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세이아드를 꺼림칙한 눈으로 보며 반문했다.
“대공, 그대의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나?”
“악마가 티테르를 휘두를 수 있다는 주장이 오히려 위험합니다. 폐하, 역사를 통틀어 티테르는 단 한 번도 솔리아스의 빛에 대항한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티테르는 모두 의무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씨앗이 티테르의 영혼에 숨어들었다면, 언제든 이 같은 숭고한 마음을 짓밟아 나라에 해를 가하지 않겠습니까?”
아스테르의 웃는 낯이 그때 깨졌다. 유리에 금이 가듯 갈라진 미소 아래로 일순 날카로운 살기가 일었다. 때를 맞추어 조용하던 레사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저는 형님의 독단이 무섭습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관심이 쏠리게 하는 처연한 목소리가 울렸다. 듣기 좋은 저음이 예배당에 퍼지고, 좌중의 시선이 홀린듯이 그에게 향했다. 몸을 돌린 국왕 또한 레사스를 보았다. 아비의 시선을 받은 레사스가 진심으로 염려하는 듯한 표정으로 국왕에게 호소했다.
“솔리아스의 태양은 어디까지나 폐하이신데, 지금처럼 티테르의 처우를 함부로 결정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두려움이 이는군요. 티테르는 솔리아스를 지켜 온 동반자이자 별이거늘, 이렇듯 확실치 않은 추측을 따라 형장의 이슬이 된다면 티테르는 머잖아 없어질 겁니다.”
국왕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다소 이른 나이에 아스테르를 낳은 국왕은 아직 왕위에서 물러나기엔 지나치게 정정했다. 아스테르의 나이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것은 이 같은 점 때문이었고, 국왕 자신이 야욕이 큰 탓에 쉬이 권력을 놓고자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가장 무서운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아니었던가. 레사스는 그것을 건드렸다.
언제나 순종적으로 제 말을 들어주던 레사스의 면모만 보아 오던 세이아드는, 능숙하게 국왕을 건드리는 모습에 그가 정말로 어른이 되었음을 느꼈다. 아이 같은 순수함은 오직 제 앞에서만 드러나는 거였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나는 어디까지나 솔리아스의 안위를 우선으로 했을 뿐이다.”
아스테르는 레사스가 국왕을 휘두르려는 것을 막기 위해 곧장 말을 잘랐다. 레사스는 그 같은 아스테르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티테르를 남겨 두는 것이 이롭지 않겠습니까? 머잖아 솔리아스는 숲의 제약에서 벗어나 이 왕국 밖으로 뻗어나갈 텐데요.”
그러더니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옆으로 걸어왔다. 살짝 스친 시선이 언제나와 같이 따스했다. 고작 잠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가 다가오자 느껴지는 안정적인 힘에 찢겨 가던 영혼이 제자리를 찾았다. 아스테르를 마주하는 내내 증오만을 품었던 마음이 어둠을 빠져나왔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남쪽 숲은 더는 니르아가 활동하는 구역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다 대공의 지휘와 희생 덕분이지요. 이처럼 순조롭게 숲을 정화했으니 폐하께서 염원하던 숲의 정화가 이번 해에 끝을 보는 것은 예정된 일 아니겠습니까? 하면, 그 뒤는 어떨까요.”
국왕의 오랜 숙원을 정확히 짚어 낸 레사스의 수가 통했다. 국왕은 앞선 고민을 잊은 것처럼 일순 환희에 찬 낯이었다. 그는 항상 숲을 정화하여 솔리아스를 확장시키고자 했고, 숲 너머의 바다와 갈 수 없던 땅을 원했다.
“솔리아스의 영광이 뻗어갈 일만 남았지.”
국왕의 중얼거림을 따라 레사스가 환히 웃었다. 아버지를 선망하는 아들처럼, 온순하고 순종적으로.
“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바깥이 어떨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숲 밖에 티테르와 같은 권능을 지닌 자들이 존재할지는 알 수 없지요. 그러니 티테르를 하나라도 더 품는 것이 솔리아스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네 말이 맞다!”
국왕이 박수를 쳤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빛나는 눈을 한 국왕이 티테르들을 휙 훑었다. 그는 하나하나 그 수를 세더니 이윽고 하하하,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기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