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06화 (104/147)

#106

제게 어울리지 않는 낯간지러운 말을 꺼낸 것 같아 조금은 수치심이 일면서도,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이아드는 어쩐지 후련한 마음으로 레사스를 응시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말하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세이아드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속눈썹을 잘게 떨더니, 무언가를 꾹 참는 사람처럼 입술을 닫았다. 수려한 눈썹이 끝을 늘어트리며 휘었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한동안 그렇게 갈등하던 레사스가 긴 정적 뒤에 겨우 목소리를 냈다.

“…세이아드.”

무정하게 절 밀어내려 하던 것이 무색하게 레사스는 결국 제 청을 들어주었다. 세이아드는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신발 끝이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지자 레사스가 움찔거리며 드디어 세이아드를 똑바로 보았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보라색 눈이 안쓰러웠다.

“전하께서 저를 부르시던 이름이 그러했나요.”

깊게 잠긴 보랏빛 시선을 기꺼이 받아 주며 세이아드는 한 번 더 그를 졸랐다. 애칭을 불러달라는 말에 레사스는 결국 낮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드.”

아아.

만족감과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사스의 입에서 불린 애칭이 귀를 간지럽혔다. 고작 이름을 불러 준 것뿐인데도 무척이나 기쁜 일이 생긴 사람같이 마음이 부풀었다. 찬란한 계절을 지내면서도 진심으로 행복했던 적 없던 몇 달과 달리, 고작 이름이 불렸다는 이유만으로 세이아드는 기쁨을 느꼈다.

이렇게 요동치는 감정을 고작 호감으로 정의해도 되는 건가. 본인조차도 이런 스스로의 반응이 낯설어 세이아드는 잠시 고민했다. 조금씩 형태를 갖춰 가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잡힐 듯 말 듯 했다. 그러나 당장 확실한 것 하나는 레사스가 제 애칭을 부르는 쪽이 훨씬 좋다는 거였다.

“네, 전하.”

세이아드의 낯이 부드러운 색을 띠었다. 레사스를 볼 때면 보통 표정이 없었던 몇 달 전과 달리, 세이아드는 세실리아를 대하듯 다정한 눈을 했다. 제 부탁을 들어준 레사스가 기특하면서도 고마웠기에.

그러자 레사스가 눈을 크게 떴다. 믿기지 않는 모습을 의심하듯이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던 레사스의 눈가가 불긋해졌다.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눈이 기쁨과 슬픔에 젖었다.

너무나 그리웠던 모습이라 세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레사스의 손을 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조금만 뻗으면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는데, 바로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에 반응한 세이아드가 고개를 틀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여관이 위치한 길목을 지나가던 영지민 무리가 멈춰선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평범한 농부처럼 보이는 그들은 막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지, 어깨에 농기구를 올려놓고 있었다.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작은 동네에 나타난 기사 차림의 이들은 충분히 구경거리가 될 법하여, 세이아드는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레사스의 반응이 남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동요하던 레사스는 어느새 미간을 굳히고는 검을 찬 허리춤으로 손을 내렸다.

“…전하?”

심각해 보이는 모습에 조용히 그를 부르자 레사스가 여관을 가리키며 명했다.

“이드, 안으로 들어가세요.”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 묻기도 전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보던 농부들이 돌연 그들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귀족을 보면 알아서 대개 몸을 사리는 것이 평민의 처세인데, 오히려 말을 걸기 위해 다가오는 건 보기 드문 상황이었다. 영주도 아닌 그들에게 와서 무엇을 하려나 싶었는데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레사스가 있는 방향으로 느릿느릿 걸어오던 농부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싶더니 이윽고 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까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살기가 농부들의 얼굴에 드리웠다. 무언가에 홀린 이들처럼 빠르게 뛰어온 그들은 날붙이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레사스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죽어 버려라! 끔찍한 놈!”

불경한 저주를 내뱉은 농부들이 거침없이 낫이며 갈퀴를 휘둘렀다. 난데없이 돌변한 모습에 세이아드는 서둘러 레사스의 앞을 막으며 검을 꺼냈다. 날카로운 장검이 농기구의 목대를 단숨에 잘라내어 반으로 갈랐다.

“뭣들 하는 짓이냐!”

노성을 지른 세이아드가 그들을 위협적으로 제지했으나, 무기가 잘렸음에도 농부들은 두려워하거나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무기가 잘린 반동 때문에 뒤로 물러섰던 그들은 세이아드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레사스에게 재차 몸을 부딪쳤다. 서슬퍼런 검날을 앞에 두고도 공포심이라곤 없었다.

이 기괴한 광경이 어딘지 익숙했다. 꼭 숲에서 아스테르의 기사들을 마주쳤던 그때 같았다. 자아도, 의지도 없이 그저 무언가에 세뇌된 이들같이 구는 것이….

레사스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으니 세이아드는 다시금 검을 들었다. 그러나 한 번만 휘둘러도 그들의 목을 벨 수 있는 것이 저의 힘이라, 의지와 달리 손이 확 나가질 않았다. 왕족을 해하려 한 이들이니 마땅히 죽여야 하는데 마치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저리 구는 것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무고한 이들을 죽이는 게 아닌가, 하는 직감이 드는 찰나에 레사스가 움직였다.

“그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 레사스는, 다 괜찮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검집으로 상대하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무척 익숙한 사람같이 레사스는 검집의 끝으로 저들의 급소를 짧게 쳐서 기절시키거나 뒷목을 내리쳤다.

레사스 본인이 원체 실력이 출중한 기사이기도 했던 터라 그는 어렵지 않게 농부들을 제압해 나갔다. 잠시 주저했던 세이아드 또한 레사스가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막무가내로 공격해 오는 이들을 제압했다.

싸울 줄 모르는 평민을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얻은 세이아드는 순조롭게 농부들을 기절시켰다. 그렇게 상황을 마무리하기 바로 직전, 여관에서 세이아드의 기사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이아드를 찾는 듯이 주변을 살피던 둘은 어렵지 않게 레사스와 그를 발견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심상치 않은 광경에 기사들이 서둘러 그에게 왔다. 마침 시기가 적절했다. 세이아드는 그들에게 눈짓하며 명했다.

“너희는 이리 와서 쓰러진 이들을 옮기거라. 전하를 습격한 자들이니 깨워서 심문을….”

“이드, 안 돼요.”

레사스가 황급히 세이아드를 제지했다. 의아한 눈으로 레사스를 보는데, 근처에 온 기사들이 레사스를 보는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스산한 감각이 세이아드의 뒷덜미를 오싹 물들였다.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덮치자마자 기사들이 검을 빼어 들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레사스를 향해 검을 찔렀다.

“전하!”

기사들의 습격은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아무리 실력이 차이가 나더라도 틈을 내어주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인데, 다른 이들도 아닌 휘하의 기사들이 이처럼 돌변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세이아드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빠르게 레사스의 심장과 목을 노리며 쇄도한 검이 세이아드의 눈앞을 스쳤다. 깔끔한 살수였다. 그대로 쇄도하면 숨통을 끊을 것이 확실한, 그런 검이었다.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의식할 틈도 없이 그림자가 높게 솟구치며 기사들을 덮쳤다. 공격을 가하는 기사들의 팔을 날카롭게 변한 어둠이 꿰뚫었다. 그 덕에 궤도가 바뀌었다. 모든 것이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사들은 레사스를 죽이진 못했다. 그러나 상처를 입히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한 명의 검은 레사스의 어깨를 꿰뚫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상체를 길게 그었다. 얇은 망토가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빗나간 공격으로 인해 기사들이 잠시 틈을 보인 사이, 레사스는 무표정으로 기사 한 명을 먼저 제압했다. 그는 검집으로 기사의 머리를 내리친 후, 뒤이어 달려드는 다른 이의 손목을 발로 차냈다. 검을 쥔 손목을 강하게 가격한 레사스로 인해 기사가 검을 놓쳤다.

무기를 놓치고 휘청거리는 기사의 뒤로 빠르게 몸을 튼 레사스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두꺼운 팔뚝이 적당한 힘으로 목을 조였다. 능숙한 사냥꾼의 솜씨였다. 레사스를 기습했던 두 명이 순식간에 상체를 허물어트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상황이 정리되었다. 평온했던 저녁이 눈 깜짝할 사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짧은 찰나에 일어난 사건이 너무 기괴해 세이아드는 잠시 굳어 버렸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앞서 여관에서만 해도 멀쩡해 보였던 기사들이 왜? 아니, 애당초 평범한 농부들이 왜 레사스를 공격한 거지?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레사스다. 당장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쓰러진 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린 세이아드가 다급히 레사스를 부축했다. 가까이 가자마자 피냄새가 코끝을 비릿하게 찔렀다.

“전하, 상처가…!”

세이아드는 미칠 것만 같은 심정으로 레사스의 상체를 살폈다. 공격을 당하고도 무리 없이 움직이기에 잘 피해 갔나 싶었는데, 제 착각이었다. 눈앞이 일순 하얘지고 머릿속이 새카맣게 엉켰다. 잠시간의 기쁨은 어느새 가신 채였다. 레사스를 자신이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기사를 죽일 뻔했다는 자괴감이 한자리에 피어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제 실책으로 전하께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역겨울 정도로 피어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갈라진 망토와 셔츠 너머로 붉게 베인 속살이 보였다. 순식간에 그의 흰색 셔츠가 피로 젖어드는 것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여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괜찮아요, 이드. 이 정도 상처는 곧 아물 텐데요. 그보다는 대공의 기사들이 다쳐서 큰일이에요.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인데 나로 인해 말려들었네요.”

레사스는 왕족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긴커녕 세이아드를 달래주었다. 순간 제가 잘못들었나 싶어, 세이아드는 멍하니 레사스를 올려다보았다.

‘뭐지…?’

앞서 일어난 기괴한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곤 외려 세이아드의 기사들을 걱정하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레사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금 생긴 사고가 마치 일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전하께서는 왜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제 수하의 기사들이 감히 전하를 공격했습니다. 지금같은 상황은 제게 반역의 죄를 물어도 할 말이 없는 실책입니다…!”

그제서야 레사스는 자신의 행동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이처럼 굴었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그가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대공의 옆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던 건데, 내가 또 실수를 했네요. 대공의 기사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이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세이아드가 미칠 것 같은 부분은 그게 아닌데, 레사스는 또다시 저를 걱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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