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다친 사람이 응당 보여 줘야 할 동요나 고통이라곤 보이지 않는 눈이 세이아드를 조심스레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풀려있던 얼굴이 굳은 게 신경 쓰이는지, 레사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요. 태양이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방금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고, 날 공격하지도 않을 겁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났으니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아요.”
지나치게 평온한 태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나,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눈앞에 보이는 레사스의 상처와 피 묻은 옷가지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아찔함이 밀려드는 저 모습은 환상이 아니었다. 너무 막막한 나머지 입술을 달싹거리던 세이아드가 레사스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결국 언성을 높였다.
“지금 제가 그런 걸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화가 나면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거나 표정을 없애는 것이 평소의 세이아드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리 굴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은 레사스에게도 낯설었던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평정을 유지하던 레사스가 당황하여 속눈썹을 깜빡였다. 성숙한 어른 같던 미인이 순식간에 세이아드가 알던 소년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안도감이 들면서도 지켜 줘야만 할 여린 사람이 다친 게 한층 괴롭게 느껴졌다. 그냥 괴롭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다. 뼈에 붙은 살점이 찢겨 나가는 감각과 함께 속이 쓰렸다. 보는 제가 더 아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하를 지켜드리지 못할망정 제 휘하의 기사들이 전하를 해했습니다. 아니, 제가 전하를 지키지 못했다는 게 맞겠군요. 저는 전하가…!”
이대로 말하다간 자꾸 화를 낼 것 같아 세이아드는 잠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레사스의 상처를 압박하기 위해 자신의 망토를 찢었다. 급한 대로 상처 부위를 가리고 의사를 찾아야 했다. 가이드의 힘으로 인해 금세 아물 거라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상처를 대충 수습하고 나서야 세이아드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가 다치신 게 싫습니다. 전하가 이런 끔찍한 일을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도 싫군요. 대체 왜….”
눈썹을 찡그리며 미간에 힘을 준 세이아드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그의 부상에 동요하는 것이 지나간 학살에 대한 심적인 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다쳤다는 사실 자체 때문인지를 곱씹었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기사들이 다친 것을 봐도 이렇게 굴지 않았으니 레사스라는 사람이 다친 것이 괴로운 것이다.
“왜, 제게는 다치지 말라고 하시면서 정작 존귀한 몸은 돌보시지 않는 겁니까.”
숲속에서 그가 절 대신해 칼을 맞던 때보다 더, 절망어린 공포가 고였다. 만약 제가 검의 궤도를 바꾸지 못했더라면, 레사스가 조금만 반응이 느렸더라면, 레사스는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있지 않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가이드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 또한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꿰뚫리면 죽는다.
죽음은 부재다.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단 한 번도 레사스가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 보지 않았다. 그를 지독하게 미워하려던 때에도 레사스는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가정조차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제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고작 넉 달로도 미친 듯이 괴로웠다. 그 짧은 기간에도 미칠 듯이 아프던 마음이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워질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이드.”
절망의 크기가 갑작스레 몸집을 불린 탓일까. 상처를 지혈하다 멈춘 세이아드의 뺨을 레사스가 조심스레 감쌌다. 잠이든 순간까지도 그리워했던 존재가 드디어 저를 만져 준 덕에 속에서 울컥거리는 불덩이가 올라왔다. 뜨거운 숨을 내쉬며 세이아드가 시선을 올렸다.
“그대를 만져도 될까요?”
충동을 이기지 못해 세이아드를 붙들어 놓곤 레사스가 뒤늦게 물었다. 세이아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내듯 대꾸했다.
“이미 만지고 계시면서 그걸 여쭤보시는 건가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뺨에서 손을 떼려는 레사스를 세이아드가 제지했다. 커다란 손이 레사스의 손을 겹쳐 누르곤 움직이지 못하게 힘을 주었다. 레사스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한들 세이아드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네.”
불경한 명령에도 레사스는 불쾌해하긴커녕, 드디어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는 눈을 어지럽게 깜빡이던 그가 귓불을 붉혔다.
“있잖아요, 이드. 지금 그대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걸까요? 지금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게 한여름의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황홀해서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중얼거린 레사스가 떨리는 손으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시원한 바람으로 인해 잠시 차가워졌던 뺨을 덥혀 주는 손바닥이 너무 좋았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손바닥에 무의식중에 뺨을 기댔다. 황홀한 기분이 들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이었다.
힘을 살짝 풀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자, 손바닥에 입술이 닿았다. 그러자 단지 순수하기만 했던 보랏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세이아드의 뺨을 쥔 손바닥에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네,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이아드가 작게 속삭였다. 날숨의 따듯한 온도와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레사스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손가락에 힘을 꽉 주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던 레사스가 이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뒤로 물렸다. 가슴팍을 크게 들썩이며 그가 낮게 깔린 기침을 했다. 목 안에서 울리는 깊은 저음이 마치 조바심이 난 사람 같았다.
“이드를 걱정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내 일인데, 그대가, 이렇듯 사랑스럽게 구는 걸 보니까… 미치겠어요.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기뻐도 되는지, 나는….”
“전하께서는 하고 싶은 건 뭐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억압하시는 겁니까? 전하는 더 이상 방치된 궁에 홀로 남은 아이가 아니십니다.”
세이아드 저와 같이 죄를 지은 적도 없으면서, 레사스는 이상하게 항상 자신에게 자격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모든 것을 세이아드만을 기준 삼아 구는 그가 애틋하고 안쓰러웠다.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본인이 원하는 바대로 굴었으면 했다.
“…그건 이드가 다정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대공께 이런 광경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대가 괴로워할 걸 아니까요.”
레사스는 본인의 감정을 어떻게든 다잡으려는 듯 허리를 바로 피며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세이아드 역시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일단 전하의 상처를 살필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이들은 기사를 시켜 한데 모아 감시한 뒤, 일어나면 취조하도록 하지요.”
“아뇨. 내 상처는 이미 아물고 있어요. 밤이 찾아온 동안은 아무도 나를 봐선 안 됩니다. 방금 그대가 목격했던 일이 또 생길 테니까요.”
“이들이 사주를 받고 움직인 게 아니란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내용에 세이아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나 레사스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밤은 악마의 근원이에요. 어둠이 깃든 곳이면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지요. 그는 밤이 닿은 곳마다 찾아가 나의 존재를 아는 모든 이에게 어떤 암시를 걸었어요. 나를 죽여야 한다는 암시죠.”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건 대공이 티테르이기 때문이에요. 티테르나 가이드는 악마에 대항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영혼이니, 악마의 힘에 휘둘리지 않아요.”
그러자 비로소 레사스가 못 보던 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던 이유가 짐작 갔다. 그들을 볼 때 느꼈던 희미한 기운은, 레사스나 다른 가이드를 볼 때면 느끼던 청량한 안정감이었다. 가이드와 같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런 감각이었다.
“전하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가이드의 피가 섞인 겁니까?”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그것을 단숨에 알아낸 것이 무척 대단하다는 듯 웃었다.
“맞습니다. 왕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출신의 기사들만이 암시에 대항할 수 있어요. 나의 기사들은 아주 충성스럽고 의지가 강한 이들이지만, 악마는 가끔 의지조차도 꺾거든요. 어떻게든 사람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서요.”
스스로 그리 말하고 레사스는 생각에 잠겼다. 레사스가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린 세이아드 또한 잠시 침묵했다. 레사스는 티테르나 가이드는 악마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아스테르는 가이드인 동시에 악마와 움직이고 있었으며, 자신은 과거 아스테르의 뜻을 따라 휘둘렸다. 레사스의 말대로라면 애당초 이같은 일이 생길 수 없었을 텐데.
“…잘못된 정화로 인해 티테르가 악마에게 휘둘릴 수도 있는 겁니까?”
불쑥 뇌리를 스친 가정이 있었다. 세이아드의 질문에 레사스가 짧은 망설임 후에 세이아드의 말을 긍정했다.
“정화는 영혼을 어루만지는 힘이니까요. 티테르의 영혼에 닿을 수 있는 존재는 가이드가 유일하고, 그런 가이드 자체가 잘못된 존재라면 티테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조종하진 못해요. 악마는 단지, 영혼에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그의 눈이 되어 줄 씨앗을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레사스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시간이 늦었으니 대공은 이만 들어가도 좋아요. 나는 바깥에서 있겠습니다. 그대 때문이 아니에요. 여관에는 무고한 이들이 있으니 어차피 기사들을 머물게 한 뒤 따로 나오려 했었어요. 이들 모두 다치진 않았으니 농부들은 깨어나 귀가하게끔 하고, 기사들만 그대가 수습해 주세요.”
레사스가 말한 씨앗을 심는다는 내용이 가슴 어딘가를 찔렀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떠오를 듯 말 듯 하던차, 세이아드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트는 레사스로 인해 상념이 흩어졌다. 내버려두면 홀로 밖에서 이슬을 맞고 잘 게 뻔해, 그는 다급히 레사스의 팔을 잡았다.
“멀리 가지 마십시오. 밤이 깊어지면 제가 찾으러 가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하고 싶어서 청하는 겁니다.”
레사스는 눈썹을 처량하게 휘더니, 겁을 먹은 듯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내가 옆에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말을 무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하. 그건 몇 달 전 제가 했던 멍청한 말을 잊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어가 하나, 하나, 뱉어지고 문장이 되는 동안 레사스의 표정도 같이 변해갔다. 두렵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세이아드의 말을 완전히 알아듣고는, 환희에 찬 말간 얼굴을 했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 위로 흐드러지는 미소가 폈다.
“그럼, 내가 다시 전처럼 어리석게 굴어도 괜찮은 건가요?”
“어리석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냥…,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했을 뿐이다. 세이아드의 삶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이라서.
“그러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에도 이 같은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원한다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하라던 무심하고 거친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세이아드는 전처럼 어떤 조건도, 거래도 내걸지 않고, 다만 레사스의 웃음을 보기 위해 그리 말했다.
그러자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
레사스는 앵두색을 띤 입술을 곱게 휜 뒤, 세이아드가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웃음을 보여 주었다. 원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지금 이 찰나에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찬란해 보여, 세이아드는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저 사람이 웃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마치 긴 거리를 달려온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