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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10화 (110/147)

#110

자신이 속해야 할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은 강을 건너자 확실해졌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스텔라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척척한 장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발걸음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여기까지의 여정은 지칠 축에도 끼지 못하는데 말이다.

“세이아드, 잘 지냈니?”

스텔라는 그가 가까이오자 일부러 표정을 풀곤 반갑게 맞이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세이아드 또한 그녀에게 걸어갔다.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본 스텔라가 팔을 뻗어 그를 안았다.

“어머니는 네 덕에 잘 지내고 계셔. 석찬 때 뵐 수 있을 거야.”

스텔라와는 남부에서 돌아오는 길을 같이했다. 몇 주간 같은 여로로 귀환했기에 그사이 제법 친근함이 돌아왔다. 어릴 적처럼 스스럼없이 지낼 수는 없으나 세실리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가까이 지내는 이가 되었다.

그랬던 탓에 세이아드는 스텔라의 포옹을 받아 주었다. 반가움을 담아 그를 꽉 끌어안는 팔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그녀의 파장이 다소 불안한 게 느껴져, 세이아드는 스텔라를 밀어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군.”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지만, 맞아. 위급하다면 위급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티테르를 부르기는 애매해서. 하루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 마중을 나왔는데, 길이 엇갈리지 않아 다행이네.”

세이아드는 방금 전을 상기했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샬로트 사클라니가 보인 것이 수상하다고 여겼던 터라, 그는 반쯤은 확신을 갖고 질문했다.

“사클라니 후작과 연관된 일인가?”

“어떻게 알았어?”

스텔라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포옹을 풀고는 세이아드의 손을 붙들었다.

“네가 도착하기 전 샬로트 사클라니를 봤다. 후작의 영지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어째서 후작의 여식이 이곳에 있나 싶었지.”

그러자 비로소 납득이 간다는 듯 스텔라가 아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베 강 건너편을 흘끗 본 그녀가 설명했다.

“샬로트 양은 후작의 뜻을 대신 전하러 와 주셨어.”

“장남인 세드릭 소후작이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선 마땅히 승계자가 와야 함이 도리인데, 둘째를 보낸 것은 베트리아를 얕보는 행위였다. 세이아드의 얼굴이 서늘해지자 스텔라가 동의하는 듯 눈을 굳혔다.

“소후작은 후작을 도와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있어서. 어쨌든 그쪽 상황이 좋지 못하니 따지긴 애매해. 그렇다고 샬로트 양을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설명이 필요한 것 같군.”

스텔라는 그의 말에 주변을 살폈다. 곤란한 표정이 잠시 스치더니 그녀가 발꿈치를 들어 세이아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렇게 트인 곳에서 말하긴 애매해. 잠시 후에 말해 줄게.”

귓가를 간질이는 속삭임은 자세히 귀를 기울어야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심상치 않은 일인가 싶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던 차였다.

“베트리아 공작, 지금 뭘 하시는 걸까요?”

온기 없이 서늘한 목소리가 옆에서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스텔라와 세이아드의 시선이 동시에 강가로 향했다. 안 그래도 찾으려고 했던 레사스가 강가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물을 마시러 따로 사라진 건가 싶었는데, 그는 품에 한아름 라벤더를 안은 채였다.

차가운 강물로 인해 속까지 시렸던 몸이 잠시 따스해졌다. 레사스에게 주고 싶었던 꽃을 그가 마침 안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꽃이지만 화사함의 정도는 레사스가 더했다.

그러나 세이아드의 기분이 잠시 나아진 것과 대비되게끔 레사스는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는 내내 제게 미소 짓던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빠르게 걸어왔다. 그들의 옆에 선 레사스는 여전히 세이아드를 잡고 있는 스텔라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려다보는 눈길이 얼음처럼 서늘했다. 평상시의 그 다정한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레사스에게도 이런 면모가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전하, 오셨습니까. 존귀하신 솔리아스의 빛을 뵙습니다.”

스텔라는 그가 오자 황급히 손을 놓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왕족을 맞이한 예를 취하자 그제야 레사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네, 전하의 가호를 입은 덕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는데 급한 일이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레사스의 표정은 풀린 상태긴 했지만 확연히 밝아지진 않았다. 부드러운 흰 이마에 작은 주름이 파인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의아해진 세이아드가 그를 살폈다.

“운이 좋아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가는 길목에 전하와 세이아드 공작이 살필 곳이 있어 나왔는데, 다행이네요. 괜찮으시다면 그곳으로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그래 주세요.”

스텔라는 얼른 목례한 후 그녀의 기사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본 세이아드나 레사스의 기사들도 말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출발할 준비가 순식간에 갖춰줬다. 세이아드 또한 짧고 단호한 목소리로 루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저 멀리서 풀을 뜯던 루나가 단숨에 그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말에 오르기 전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다시 살폈다. 그는 아까부터 무언가를 굉장히 참는 듯한 눈이었다. 답답한 사람처럼 작은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세이아드는 고민하다 운을 틔웠다.

“밤도 아닌 낮에 홀로 다니실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합니다, 전하.”

“바로 근처에 다녀왔을 뿐이에요. 이드에게 주고 싶은 예쁜 꽃을 보아서요.”

그러더니 레사스는 라벤더 다발을 이드에게 내밀었다. 향긋한 냄새가 훅 끼쳐 오며 부드럽게 그를 감쌌다. 그저 레사스가 꽃을 든 것이 예쁘다고만 여겼기에, 이걸 자신에게 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웠지만 레사스가 주는 것을 거부하긴 싫었다.

세실리아가 어릴 적 억지로 제 머리에 꽃을 꽂아 주던 이후론 꽃을 만져 본 기억이 없었다. 어색한 기분으로 꽃을 받아 들자 레사스의 얼굴이 비로소 환해졌다.

“아름다워요.”

기쁜 듯이 속삭이는 그의 말에 세이아드도 공감했다.

“제철의 라벤더라 그런지 아름답군요.”

“아뇨, 이드가요. 세상의 어느 것도 그대만큼 예쁘진 않을 거예요.”

낯간지러운 표현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제 보니 레사스는 자꾸만 예쁘지 않은 걸 예쁘다 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는 잘만 적절한 표현을 찾던 사람이 저에게만큼은 기괴한 수식어를 붙였다. 세이아드가 꽃을 안은 것을 눈에 새기듯 보던 레사스가 아쉬운 듯 속삭였다.

“그럼 이만 갈까요. 베트리아 공작을 충분히 기다리게 했으니.”

“…네.”

가슴이 간질거렸다. 피부 전체가 기분좋은 오싹함으로 물들었다. 레사스에게 뭐라도 말해 주고 싶었는데, 막상 말을 하려니 예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레사스처럼 시 같은 말을 하는 재주는 없었다.

레사스가 그의 기사들을 이끌고 스텔라의 뒤를 따르러 가고 나서야 세이아드는 감사하다는 말을 잊었다는 걸 떠올렸다. 오래간 감사할 것이 없었기에 저조차도 잊고 있던 말이었던 탓이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세이아드는 둘만 남는 시간이 되면 그에게 꼭, 어떻게든 무언가를 표현해 주자고 마음 먹었다.

스텔라는 강을 따라 쭉 걸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베트리아 영지와 후작령의 경계에 있는 산이었다. 높게 솟은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윽고 빼곡히 나무가 채워진 숲이 보였다. 여름의 녹음이 내려앉아 푸르기만 한 숲은 보기에도 평온해 보였다. 강의 상류쯤에 멈춘 그녀는 모두에게 말에서 내리라 지시했다. 그러고는 세이아드와 레사스에게 믿을 만한 소수의 기사만을 대동해달라고 요청했다.

세이아드는 키릴을 비롯해 그가 아끼는 기사 둘만을 옆에 두었고, 레사스는 그의 기사 중 수장으로 보이는 이만을 데려왔다. 스텔라 역시 세이아드와 비슷하게 기사를 꾸렸다. 그렇게 인원이 추려지자 그들은 강의 상류를 건넜다.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한 상류는 근처에 폭포가 있어 물살도 강했다. 일반인은 건널 수 없는 강을 헤치고 그들은 숲의 초입에 다다랐다. 고작 강을 건넜을 뿐인데, 폭포로 갈라진 숲의 반대편은 분위기가 한층 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던 주위가 안개 낀 회색이 되었다.

“여기서 쭉 남쪽으로 내려가면 사클라니 후작령이 나와요. 그리고 최근 들어 후작령에서는 역병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곳에 들어갔다 온 사냥꾼들이 하나같이 죽었다고 해요.”

역병?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과거에는 동부에 역병이 돈 적이 없었다. 다른 지역도 아닌 동부의 일이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남부나 서부는 먼 지역이니 그의 눈이 닿지 않았다 치지만, 동부는 인접한 지역이기에 북부에서도 항시 주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이자 미래는 이제 많은 것이 바뀌어 더는 예측 가능한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병 같은 것은 크게 바뀌지 않을 요소였다. 그럴만한 재해가 없었을 텐데.

세이아드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스텔라가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는 듯한 시선을 준 그녀가 숨겨진 사실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입장일 뿐이에요. 사냥꾼들이 죽은 건 바로 니르아를 만났기 때문이죠. 그것도 여름의 대낮에요.”

스텔라가 말한 것은 이제 그들에게 놀라울 만한 일은 아니었다. 기괴한 이변이고, 여태 없던 일이긴 하나, 남부에서의 일을 겪은 뒤로 그들은 이제 니르아가 겨울과 밤이 아닌 시기에도 출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은 아직 세간에 퍼지지 않았다. 그것은 남부에 들렀던 국왕의 지시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공황에 빠지리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큰일은 있었으나 니르아가 숲 밖으로 나가지 않은 탓에 그 같은 말은 평민에게까지 퍼지진 않았으며, 혹 그것을 본 이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국왕의 그러한 명은 단순히 그런 걸 고려해서 나온 게 아니었다. 그건 불을 통해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클라니 후작을 고려한 명령이었다. 왕국의 자원과 유통을 쥐고 있는 그를 거슬렀다가는 국왕 또한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사클라니 후작이 저런 입장을 내놓은 것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곧 기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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