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역병을 대처하는 방식과 니르아를 피하는 것은 근원부터 다르다. 원칙대로라면 사클라니 후작은 인근의 영지민들을 대피시키거나, 하다못해 비상시를 준비하게끔 대비해야 했다. 한데 그걸 숨긴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영지민은 니르아가 덮쳤을 때 피할 기회도 없이 죽게 되지 않겠나.
“니르아가 이 시기에, 그것도 낮에 나온다고 하신 겁니까?”
키릴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표정이 별로 없는 편인 그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럴 법한 내용이긴 했다. 니르아와 같은 괴물을 그들의 터전에 두고도 솔리아스의 백성들이 적응하며 살아 나갈 수 있던 건, 니르아가 제한된 기간에만 움직인다는 점이 컸다. 만약 니르아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면 활동 반경이 넓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세이아드는 그가 보았던 환상을 떠올렸다. 니르아가 숲과 산을 넘어 수도까지 내려온 그 광경이 아른거렸다. 그것이 일어날 미래인지 아니면 세이아드가 죽었던 뒤의 과거인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변이 생기며 악마가 힘을 키워 나간다면 머잖을 미래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과거의 이변이 앞당겨져 진행되는 게 불안하던 차였다. 세이아드의 이전 삶에서 오 년에 걸쳐 천천히 일어났던 일들은, 달라진 아스테르의 행동과 함께 급격히 뒤바뀌었다. 세이아드 자신이 아스테르의 의도대로 굴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과거의 세이아드는 모두를 밀어냈다. 그가 과거를 기억하며 되살아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 또한 같은 전철을 밟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현재 세이아드의 옆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자신 또한 아스테르에게 의존하던 옛날처럼 고독하지 않았다.
그 탓에 많은 흐름이 바뀌어 가고 있다면, 내가 살아난 것은 오히려 왕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일이 아닌가?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세이아드는 여태 자신이 살아난 이유가 똑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한 기회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달라진 행동에 의거해 과거와는 다른 일이 생긴다면, 자신의 생환이 오히려 세상에 해가 되는 일일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의 존재가 세상을 망가트리는 거라면….’
차라리 이것이 기우였으면 싶었다. 악마라는 거대한 존재가 고작 저를 노리기 위해 많은 짓을 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나.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싶은 마음과 달리 머릿속으론 근래의 사건이 뒤섞였다. 미친 듯 분노하던 아스테르와 레사스를 향한 잔인한 암시는 다 자신과 엮인 일이었다.
그러자 불안한 죄책감이 마음을 건드렸다. 세이아드는 키릴의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제가 손을 내밀어 레사스의 행보가 확연하게 바뀌었던 봄, 그때도 이런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처럼 숨통이 조여 오는 압박감은 아니었다. 지금은 마치 호수의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발 하나만 잘못 디디면 얼음물 안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그래요. 샬로트 양이 직접 전해 준 사실이에요.”
세이아드가 대답하길 기다렸던 것인지 잠시 대기하던 스텔라가 나섰다. 들어 보니 직접 확인한 사실은 아닌 듯했다.
“신빙성이 있는 전언인가?”
세이아드가 묻자 스텔라가 안개 낀 주변을 눈짓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왔어. 내게도 제보가 들어온 게 있어 그걸 보고할 겸 전하를 모셨고, 일이 커진다면 나 혼자서는 역부족일 수도 있어서 세이아드 너를 같이 부른 거야.”
“맞아요. 뭔가를 발견했다고 했었죠.”
레사스가 그녀의 말을 긍정하며 확인했다. 그러자 스텔라는 앞서 그런 것처럼 기사들을 한 번 더 살피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트리아로 돌아온 이후에 저 또한 숲을 살피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남부의 숲에서 주인도 모르는 일이 벌어진 걸 보니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잠든 니르아의 형상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 뭐예요? 여기서만 끝났다면 모르겠는데, 무조건 보고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스텔라가 잠시 주저하자 레사스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을 대신 이었다.
“나무의 핵이 비어 있었나요?”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그렇다면 동부의 숲에서도 악마가 자신의 일부를 되찾아 갔을 겁니다. 동부의 겨울은 이제 전과 같진 않을 거예요.”
악마라는 말이 나오자 기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니르아니, 악마니 하는 말이 혼란스러웠던지 키릴이 그답지 않게 다시 나섰다.
“지금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남부에서 풀려났다고 말하는 악마인 겁니까?”
악마에 대한 소문은 이제 왕국 전체에 퍼져 모두 공공연히 실드라스를 손가락질하는 상황이었으니, 북부의 끝에 있는 이들조차도 이것은 알았다. 그러나 악마의 실체를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상태라, 한동안 흉흉했던 분위기는 최근 들어 잠잠해진 차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협이라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까.
“맞네. 아직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지만 분명히 우리의 곁을 떠도는 중이지.”
“…그렇다면 당장 그것을 죽여야겠군요.”
키릴이 강경히 나왔다. 스텔라가 키릴의 머리를 식혀 주듯 반문했다.
“경은 악마를 죽이는 법을 알고 있나?”
“그것은….”
키릴은 세이아드를 보더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민을 마친 뒤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악마는 애당초 가이드와 티테르께서 봉인한 존재니, 전설로 남은 것처럼 다시 봉인할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론적으로야 그렇겠지만 구체적인 방법이 문제였다. 스텔라가 곧장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런 걸 들어 본 적이 없어. 그게 문제야.”
바로 그때, 레사스의 기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긴 시간 동안 한 마디조차 하지 않고 그들을 보던 이었다. 그는 긴 갈색 머리를 틀어 묶고 안경을 쓴 사내였는데, 인상이 부드럽고 목소리 또한 그리 들렸다.
“악마는 인간의 힘으로는 봉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그것은 태고부터 존재한 어둠, 그러니 달과 태양이 서로를 희생해서 겨우 봉인할 수 있던 거였죠.”
“너는 누구길래 그런 것을 아는 거지?”
세이아드가 수상쩍다는 시선과 함께 그를 추궁했다. 레사스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짓을 교환한 그는 이내 우아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각하께 인사드리지요. 저는 아셀라, 솔리아스의 흔적을 피에 담은 사람입니다. 파르마 님의 먼 친척인지라 사교계에 발을 담지 않으신 공작께서는 제가 낯설 만도 하지요.”
“아셀라 디아뎀? 디아뎀 백작의 둘째, 맞지? 그대가 솔리아스의 역사와 관련해 쓴 책을 읽어 본 적 있어.”
스텔라는 아셀라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계보나 사교계와는 전혀 연관 없던 세이아드는 그런 이들을 거의 알지 못했다. 그는 오직 효율적인 검으로서 살기 위한 것들을 배워 왔으며, 영지와 관련된 지식만을 중점으로 익혔지, 그 외의 것은 거의 무시하고 지내 왔다.
“제 책을 읽으신 분은 많지 않은데, 이거 인연이군요.”
“흥미로운 책이지만 엉뚱해서 기억하고 있어. 학자인 줄 알았는데 기사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저는 허울뿐인 기사랍니다. 이곳저곳 다니기 위해 제 한몸 지킬 실력만 겨우 쌓아 놨지요.”
세이아드는 이제 레사스가 무엇을 하든 그를 의심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종종 의문은 들었다. 지난 삶에서는 데세르투스를, 이번 생에서는 전설에 대해서 박식한 학자를 발견해 내는 것이 신기했다. 그가 말하는 ‘태양’이 곁에 있기 때문일까.
“저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키릴은 절망적인 낯이었다. 레사스는 그런 그를 안심시키듯 다정히 대꾸했다.
“봉인을 했다는 것은 깨어날 상황 또한 예상하고 대비해 놓았다는 뜻이기도 하네, 경. 어쩌면 봉인 자체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걸 계속 찾아 나가고 있으니, 경은 진실된 용기를 계속 품고 대공의 곁을 지켜. 남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다 한들 잘못된 것을 용인하는 짓은 하지 말고.”
마지막 말은 뜬금없었다. 의아한 충고였으나 키릴은 마치 정곡을 찔린 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상기하듯 스텔라가 다시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당장 우리가 할 일은 후작이 말한 문제의 장소를 확인해 보는 거야. 베트리아 영지에서 사라진 니르아가 이곳으로 왔을지도 모를 일이니, 동부를 책임지는 티테르로서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어.”
스텔라는 말을 마치곤 주변을 다시 살폈다. 숲을 둘러싼 안개는 이제 연기처럼 주변에 자욱하여 가까이 있는 이들이 아니면 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성에가 낀 유리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폭포 근처니 그럴 수 있다 싶으면서도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곳만큼 위험한 곳은 없으니 말이다.
“안개가 이 정도로 꼈으면 다른 날을 잡아 숲을 수색하고, 오늘은 주변을 지키는 편이 좋을 것 같군.”
불필요한 사고를 막기 위해 그리 제안했으나 스텔라가 착잡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 숲은 항상 이런 상태야. 언제 와도 마찬가지일 거야.”
“하면 모두 흩어지지 않게끔 각자의 허리에 가벼운 끈을 다는 게 좋겠군.”
“좋은 생각이네. 바로 근처에 샬로트 양이 머무는 후작가의 별장이 있으니, 기사를 보내 가져오게 할게.”
스텔라가 손뼉을 치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자 내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사스가 무언가 걸린다는 듯이 스텔라에게 질문했다.
“혹시 사클라니 후작이 도움을 청하던 서신에 나를 언급했나요?”
“아뇨, 정확히 그렇진 않았어요. 다만 니르아를 잡게 될 테니 가이드를 대동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죠. 당장 저를 정화해 주실 수 있는 가이드는 전하뿐이니, 별다른 이상한 청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니르아의 규모나 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필요한 제안이긴 했다. 답을 들은 레사스는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결국 세이아드는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남들의 앞에서 그에게 말을 걸면 자신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듯 보일까 봐 참았지만, 걱정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베트리아의 숲에서 핵이 사라졌다면, 결국 동부의 숲에서는 더 이상 니르아가 나올 수 없을 텐데, 왜 여기만….”
레사스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그가 말을 맺기도 전에 안개 너머로 비명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아아악! 살려줘! 사람, 사람 살려! 괴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