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샬로트의 미성이 안개 속에 흐릿하게 울렸다. 그리 목소리를 높여 외치지 않았음에도, 샬로트의 입을 빌어 말하는 아스테르의 저주는 세이아드를 제대로 흔들었다. 그를 죽이겠다는 의지로 견고하던 마음이 조금 전의 광경으로 인해 크게 요동쳤다.
“잘도 개소리를 늘어놓는군. 그들을 죽이는 건 너다. 못 보던 새 완전히 정신이 나갔나, 아스테르? 아니, 생각해 보니 넌 원래부터 이렇게 비겁한 놈이었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세이아드는 그의 분노를 다잡았다. 아스테르를 향한 증오를 양분 삼아, 그는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안개 밑에 깔린 그림자를 모았다. 흩어진 어둠을 모아오는 행위는 평소 힘을 쓰는 것보다도 훨씬 그를 힘들게 했지만, 더는 상황을 악화시킬 수 없었다.
아스테르가 샬로트의 몸을 빌어 또다른 헛짓거리하는 걸 막기 위해, 세이아드는 그를 가로막는 괴물을 향해 힘을 풀었다. 회색 안개를 헤치고 솟구친 가시들이 괴물이 서 있는 지면에서 솟구쳤다. 삽시간에 흙을 뚫고 튀어나온 날카로운 창날에 괴물의 몸통이 꿰뚫렸다.
“히엑, 힉, 켁!”
다른 니르아들이 그러하듯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그런지, 괴물은 사람 같은 비명을 냈다. 그와 동시에 꿰뚫린 부위에서 피가 팍 튀었다.
니르아를 죽여도 티테르가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던 이유는 그들의 외양이 짐승과 악마의 중간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그것이 소리를 내거나 피를 흘리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 세이아드가 상대하는 이것은 피를 흘리고 소리를 냈다. 괴이하게 비틀린 모습의 골자조차 사람과 비슷했다. 서슴없이 그것을 죽이려던 세이아드가 이런 반응에 잠시 흠칫하자, 샬로트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울렸다.
“죽일 수 있겠어, 이드? 내가 만든 것이긴 해도 저건 분명 사람이거든.”
아스테르를 상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여긴 세이아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공격을 재개했다. 괴물은 비쩍 마른 팔다리나 불뚝한 배를 가지고도 잘도 펄쩍거리며 세이아드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쇄도하는 어두운 창날에 세이아드는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그러는 와중에 아스테르의 농간이 이어졌다. 세이아드가 막 괴물의 가슴팍에 장검을 꽂아 넣던 찰나였다.
처음으로 죽은 사람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가, 허리를 숙이더니 죽은 자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빼냈다. 그러고는 순서를 이어받아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칼날을 높이 들어 자기 목을 그었다.
“멈춰, 지금 무슨 짓을…!”
괴물의 거대한 몸이 쓰러지며 드러난 장면에 세이아드는 고함부터 쳤다. 그는 장검을 회수하는 것도 잊고 온 힘을 다해 사람들에게 뛰어갔다. 폐가 부풀어 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이 고동쳤다. 짧은 찰나에 어떻게든 그 앞까지 단숨에 도달한 세이아드는 맨손으로 단검을 잡았다. 사내의 목을 막 파고든 단검이 중간에서 멈췄다.
“제발, 빌어먹을…!”
단검을 쥔 손에서 흐르는 피와 사내의 목에서 흐른 피가 뒤섞였다. 억센 힘으로 단숨에 검을 뺏은 세이아드는 황급히 그의 손으로 사내의 목을 지혈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갈라진 살은 다시 붙지 않았다. 끝없이 흐르는 피가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맥없이 죽었던 앞선 이와 달리, 죽어 가던 이의 눈에 순간적으로 초점이 잡혔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는지 사내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올렸다. 목을 지혈하고 있는 세이아드의 젖은 손 위를 차가운 손가락이 긁었다. 미끄러운 살결을 힘없이 긁던 손가락이 떨어지며 세이아드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이름조차 모르는 남자는 겨우 성인이 되었을 법한 외양이었다. 레사스가 떠오르는 앳된 티가 나는 얼굴이 공포와 경악에 물들었다가, 구해달라는 듯 세이아드를 간절히 응시했다.
“도…아, 주…끄륵, 세….”
피거품이 이는 소리가 목 안을 울리다 점차 꺼졌다. 눈물이 고인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사라지더니 서서히 죽음이 찾아왔다.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불어닥친 바람에 촛불이 꺼져 버린 것처럼.
코앞에서 생명이 스러졌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생명이 빠져나가는 감촉이 영혼을 서늘하게 물들였다. 이렇게나 어린 것이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이유도 없이 죽었다. 어떤 합당한 이유도 없이. 아니, 애당초 사람이 죽는 것에 이유가 있어야 하던가?
죄책감과 분노가 동시에 일었다. 세이아드는 그대로 단검을 갈무리하고 샬로트에게로 성큼 걸어갔다. 괴물을 죽이는 데에 너무 시간을 뺏겼다. 당장 그녀를 제압해 이 미친 짓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등 떠밀었다. 제압할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멈춰야 한다는 마음이,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 일었다. 이렇듯 강렬한 살의가 제 안에 감돌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러나 세이아드가 일어서기 무섭게 그녀의 앞을 줄지어 있던 사람들이 막았다. 줄지어 나온 이들은 방패처럼 샬로트를 둘러쌌다. 세이아드가 이를 악물고 그들을 밀쳐내자, 샬로트는 그를 놀리듯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넘어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결국 기절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세이아드가 검집을 쥐었다. 망설임 없이 앞에 있는 이부터 뒷덜미를 내리치려는데,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샬로트 님, 어디 계세요!”
“돌아가실 시간이에요. 니르아가 나올지도 모르니 이만 돌아오세요!”
떼를 지어 그녀를 찾는 이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설마 싶은 예감에 세이아드의 눈길이 절로 샬로트에게 향했다. 정답을 맞혔다는 듯 웃은 그녀는 손을 작게 구부려 입가에 대고는 허공에 외쳤다.
“난 여기 있어! 날 찾으러 와!”
“아가씨!”
“금방 가겠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곳으로 유인하는 행위에, 세이아드가 황급히 소리쳐 그들을 막았다.
“이곳은 위험하니 오지 말거라! 명을 듣지 않는 자는 대공의 명을 어긴 죄로 벌할 것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살벌한 외침에 작은 웅성거림이 잠시 들렸지만, 당장의 주인인 후작을 향한 충성심이 그들을 움직였다. 발소리가 금세 가까워지나 싶더니 이윽고 샬로트의 뒤에 횃불을 든 하인들이 보였다. 안개 속에 들어온 이들은 코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더니 힉, 하며 하나같이 기겁했다. 놀라서 주춤거린 장정 한 명이 물러서려는 것을 기점으로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세이아드가 협박을 더했다.
“여긴 니르아가 있으니 위험하다! 모두 도망가! 후작의 딸은 내가 책임지겠다!”
세이아드의 말은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다. 흉흉한 피비린내가 겁을 제대로 줬는지 하인들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다급히 물러서는 그들을 부추기기 위해 세이아드는 검집을 휘둘렀다. 위협적인 동작이 사람들을 몰아냈다.
가, 그대로 그냥 가 버리라고.
그의 바람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였다. 주저하던 이들 중 누군가 도망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바로 그렇게 하면 됐는데, 이대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세이아드가 간절히 바라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막 뛰어가기 위해 몸을 튼 이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일제히 뒤를 돌았다. 아까 보았던 장면같이 사람들이 다 같이 샬로트의 뒤로 왔다. 그 수가 어림잡아 스물을 훨씬 넘었다.
“어때, 이드? 이들을 다 살릴 수 있겠어? 네가 누군가를 제압하는 동안에 누군가는 죽고 말 텐데?”
아스테르의 말을 뒷받침하듯 그들은 각자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서로의 몸에 가져다 댔다. 아까까지만 해도 설마 싶었던 아스테르의 협박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원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그래서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참으로 끔찍하게도, 세이아드는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를 한 번에 살릴 능력은 없었다. 그에게 절대적인 힘이 있지 않은 한은 말이다.
끔찍한 고뇌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조금 전 그에게 달려들던 이들이 옆으로 다가가 세이아드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를 당기는 힘은 점점 강해져, 이대로 깊은 늪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발끝부터 땅속으로 빠지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막막함과 역겨움이 그를 짓누르고, 끓다 못해 스스로를 태울 듯한 증오가 마음을 달궜다. 실핏줄이 터진 눈이 아스테르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담은 세이아드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너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눈으로 샬로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로 서러운 듯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넌 붙들어 두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날아가 버리는 새야. 너에게는 중요한 게 너무 많거든. 하지만, 이드, 나는 내 것을 남과 나눌 생각이 없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목소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으로 차 있었다. 너무나 확고해 듣는 사람이 흔들릴 정도로.
“고작 그딴 이유로 날 잡아 두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겠다고?”
“당연하지. 너희 인간들은 개미보다도 작고, 하찮은 존재야. 벌레를 죽여서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누구든 그러지 않겠어?”
세이아드의 흔들림을 잘 읽었다는 듯 아스테르의 협박이 점점 더 적나라해졌다.
“앞으로 무수한 사람이 죽을 거야. 네가 나와 있지 않겠다면, 나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거다. 너 때문에 죽은 이가 벌써 몇인지 봐, 이드.”
샬로트는 그러고는 세이아드의 뒤를 손가락질했다. 괴물의 시체가 누워 있을 자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질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아까까지 자신이 봤던 것과 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거기엔 어떠한 괴물도 없었다. 그저 전신에 구멍이 뚫린 시체 두 구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낯익었다.
…어?
그들은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가시나무와 장미가 그려진 문장은 세이아드도 익히 아는 베트리아의 표식이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안개가 가시며, 아직 해가 한창 뜬 햇빛이 두 명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장면을 보는 회색 눈동자 안에 지크와 에니프의 모습이 새겨졌다.
“인간을 지켜야 할 티테르가 몸소 능력을 써서 사람을 죽이다니! 잘 보거라, 이드. 너 또한 결국 나와 별 다를 바 없으면서. 고결한 척할 필요 없어. 너의 마음에 자리했던 증오와 분노를 내가 이리 생생히 기억하는데, 나를 이 공허 속에 두고 홀로 가 버리겠다고?”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본 것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었다. 비록 피를 흘리긴 했지만, 그건 분명….
사람이었나? 정말로 내가 죄 없는 이들을 또, 죽였다고?
폭주에서 깨어나 자신이 죽여 버린 이들을 마주했던 찰나가 마음을 점철했다. 애써 저 멀리 숨겨 두었던 죄악이 솟구쳐, 세이아드의 턱을 쥐곤 똑바로 자신을 보라고 속삭였다.
지독하게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세이아드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어떠한 동요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는 온몸에 신경을 분산했지만, 단단한 외피 아래의 내면으로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 눈을 속이고 사람들을 조종한 너의 짓이지.”
아스테르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굴복임을 알기에, 세이아드는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굴려고 했다. 무너지고 싶은 것을 삼켜내며 그는 일부러 더욱 덤덤히 대꾸했다. 하지만 악마는 다 알고 있다는 듯, 간교한 속삭임으로 그를 붙잡았다.
“이건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생긴 일이야. 네가 나를 거부한 탓에 아무것도 모르는 가엾은 것들이 비참히 죽어 버렸어. 사람이 죽는 게 싫다면 내 말을 들어. 레사스를 떠나 나에게로 오거라. 어둠 또한 나에게 약속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은 너를 내 곁에 산 채로 두겠다고. 약속하지, 이드. 우리 둘은 즐거운 삶을 살 거야. 발목의 힘줄을 자르고 호화로운 방에 가둬 부족한 것 없이 지내게 해 주마.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 주지.”
그 말을 듣는데 불현듯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일었다. 아스테르의 말이 한없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가 희생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진실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살려고 되돌린 목숨도 아니었다. 살려는 의지 또한 없었다.
죽어 버린 사람이 너무 많아, 미래에 다시 그들을 죽일 자신을 막고자 바뀌려고 했던 삶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폭주마저 다 저를 원하는 악마의 소행이라면, 세이아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냥 순순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나 하나. 내가 죽으면 지옥은 끝난다.
세상을 살리는 것치곤 값싼 대가였다. 고작 자신의 영혼 따위와 세상의 안전을 교환할 수 있다니. 그간 그렇게 애써서 싸워 오던 것이 세이아드라는 목숨 하나로 메꿀 수 있는 거였다면, 진즉 했었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굳건하던 마음의 안쪽, 아직 여물지 않은 상처에서부터 균열이 일었다. 빠르게 금이 가며 갈라진 마음을 악마가 빠르게도 잡아냈다. 샬로트의 얼굴 위로 비틀린 웃음이 떠오르며 저를 따르라는 듯 손을 뻗었다. 생각해 보면, 저 작은 손의 주인마저도 세이아드로 인해 이 지옥에 휘말린 존재였다. 자신만 없었다면 아스테르의 약혼녀로서 샬로트가 그렇게 굴 일 또한 없었겠지.
한번 방향을 튼 생각은 급류처럼 거세졌다. 그간 많은 이가 죽는 것을 보아 와서 그런가, 세이아드는 정말로 다 끝내고 싶다는 욕망마저 느꼈다. 이대로 죽기 전까지 아스테르의 옆에서 아스테르만을 본다면, 그러면….
레사스를 다시 볼 수 없는데.
체념에 가까워진 그 찰나. 이기적인 바람이 불쑥 솟았다. 자신을 보며 화사하게 웃는 예쁜 얼굴이 떠오르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아름다운 꽃을 물어와 제 앞에 두는 사슴처럼, 곱고 귀한 말만을 모아서 제게 건네던 구원이 사무쳤다. 옆에만 있어도 고통이 가시는 이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미련이 남았다.
“이드, 더는 힘들게 싸울 필요 없어. 네가 그리 레사스를 왕세자로 만들고 싶다면 기꺼이 그러겠다. 너만 있으면 나도 더는 힘을 쓰지 않을 테니.”
잠시간의 흔들림을 알아차렸는지 손이 더욱 뻗어 왔다. 그 동작을 따라서 세이아드도 홀린 듯이 움직였다. 흉터로 얼룩진 창백한 손이 샬로트와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래. 이게 맞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 많은 이가 죽게 된다면, 차라리 자신을 바쳐 그것을 멀리 데려가는 게 맞다. 레사스는 분명 슬퍼하겠지만 금세 저를 잊을 것이다. 죽은 자는 결국 잊히길 마련이니까. 더는 그를 괴롭힐 것들이 없다면 레사스 또한….
“이드, 안 돼요.”
자신이 한 것 같으면서도 하지 않은 듯한 생각이 뒤죽박죽 흐르다가, 단호하게 울리는 음성으로 인해 뚝 끊겼다. 무너져서 초점을 잃었던 눈에 힘을 주며 세이아드는 흠칫 샬로트의 뒤를 보았다. 인형처럼 멈춰 선 사람들 틈을 헤치고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검은색 머리칼이 인파 사이로 보이자마자 굳어 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참고 있던 숨을 세이아드가 뱉으며 뒤로 물러서자, 샬로트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물러서려는 세이아드의 손을 낚아채려 했다. 날카롭게 휘두르는 손이 세이아드의 손을 쥐려는데, 레사스가 샬로트를 보며 명령 같은 한 마디를 뱉었다.
“거기까지. 더는 네 장단에 맞춰 주지 않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이아드는 밀려드는 레사스의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남부의 숲에서 광역 정화를 했던 당시 느낀 힘 같으면서도,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맑은 공기를 마시면 오히려 몸이 아픈 것처럼, 그 기운이 너무 뜨겁고 정갈하여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운이 휘몰아치자마자 묘한 일이 생겼다. 우두커니 서 있던 사람들이 휘청거리더니, 그들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며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흩어졌던 사이에 레사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세이아드는 그를 살폈다. 인파 속에서 걸어 나온 레사스는 큰 전투를 치른 사람처럼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피투성이 된 옷을 입은 채로 아스테르를 노려보고 있는 레사스의 눈동자가 평소와 달랐다. 따듯하기만 하던 보라색 눈동자에는 일렁이는 금빛이 감돌고 있었다. 꼭 세이아드 자신이 과도하게 능력을 쓸 때면 안광이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