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복도의 대리석 바닥을 밟고 뛰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허공을 채우는 발소리가 워낙 다급하게 들렸던 것인지 멀리서부터 세이아드가 뛰는 걸 흘끗대며 보는 사람들이 나왔다. 스쳐 가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그는 레사스가 갔을 법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리를 떠난 게 고작 몇 분 전인 듯한데, 레사스는 어느새 복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하가 자리를 떠나시는 걸 봤느냐?”
결국 세이아드는 길을 걷던 시종을 붙들고 대뜸 물었다. 간절하다 못해 흉흉하게 느껴지는 기색에 시종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낚아챈 팔을 놔준 세이아드는 그 길로 몇 명을 더 추궁하다 결국 아무 방이나 열어 보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듯 구는 대공을 무섭게 지켜보면서도 차마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그만큼 여유가 없는 꼴이었다.
분명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레사스는 아름다운 얼굴을 쉽게 보여 주기 싫은지 도통 나타나질 않았다. 그렇게 몇 번째인지 모를 방을 열어보다가, 비어 있는 공간을 보며 잠시 멈춰 섰다. 자신의 가이드 하나 곧장 찾아내지 못하는 본인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멍청한 놈.
방문을 잡고 있는 손에 세게 힘이 들어가며 문고리가 으스러졌다. 자책감이 뜨겁게 타오르며 세이아드의 마음을 그을렸다.
너도 알았잖아. 그 애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그것이 남자로서 자신을 은애하는 마음이었든, 그저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었든, 세이아드는 자신이 레사스의 세상이었음을 분명 알고 있었다. 온몸으로 자신을 따르는 티를 내던 모습을 그렇게 오래 보아 왔으면서, 그 견고한 사랑이 고작 시온을 만났다고 하여 옮겨 갈 거라고 여겨선 안 됐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악마가 자신의 눈을 가렸을지도 모른다. 아스테르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밀어내는 선택만을 해 왔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이 조금 더 진실했다면, 뭘 해도 좋으니 자기를 떠나지만 말아 달라고 빌던 레사스의 손을 잡았어야 했다.
그 애는 항상 나의 부재를 무서워했는데.
돌이켜보면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일에 대해서만 겁이 많았다. 아무도 그 애를 챙기지 않아 혼자 죽다 살아난 적이 여러 번인데도 레사스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살아갔다. 지독한 독감이 고열을 일으켜 홀로 며칠을 앓을 때도 아프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레사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통을 두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 애가 울음을 터트리던 때는 세이아드가 다친 순간뿐이었다. 바보같이 사과를 따다 떨어졌던 날, 제법 심한 감기에 걸려 기침을 멈추지 않던 날, 사냥을 하다 다치고 온 날, 그런 사소한 상처에도 레사스는 제가 다친 것처럼 울었다. 자신이 티테르를 치유할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임을 자책하면서, 아이는 그의 옆을 지켰다.
세이아드가 저주 섞인 말을 해도, 그를 싫어하고 증오하며 계속 밀어내도, 레사스는 한 번도 저처럼 굴진 않았다. 그저 표정 없는 얼굴로 절 바라보았을 뿐.
그가 자신을 경멸했다고 여겼던 유일한 순간조차, 레사스는 자신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레사스가 구태여 ‘거룩한 죽음’을 손에 넣어 자신을 찌른 것도, 그같이 모진 말을 하려고 했던 것도, 모두 세이아드 스스로는 볼 수 없던 어둠을 깨트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통해 보고 있을 아스테르에게 그 말을 건넨 것이다.
그 생의 아스테르가 정확히 뭘 하려고 했는지, 레사스의 힘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레사스는 대체 어떻게 검을 구해 왔는지, 온갖 유추가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웠다. 질식할 듯 영혼을 채워 오는 잡념에 진절머리를 낸 세이아드는 이내 다 필요없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지금은.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어딘가에 홀로 숨어 슬픔을 삼키고 있을 그를 안아 주는 거였다.
등을 돌린 세이아드는 그 길로 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정신없이 뛰어 밖으로 나와 별장에 딸린 아름다운 정원으로 몸을 틀었다. 높게 조형된 정원수가 많은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자 드디어 레사스가 느껴졌다. 멀리 있어도 레사스임이 확실한 기운이 느껴졌다. 닿기만 해도 전율이 이는 아름다운 영혼이 저기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서서히 해가 질 기미를 보였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해를 따라 짙어진 노란빛이 정원에 내려앉았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따라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찾아냈다. 그는 길게 가지를 늘어트린 등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라벤더 같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채로 레사스를 가려 주고 있었다.
“전하.”
다급하게 뛰던 것을 멈추고 세이아드는 그를 불렀다. 낮게 잠긴 목소리에 레사스가 고개 들어 그를 보았다. 표정이라곤 없이 텅 비어 있던 얼굴 위에 비로소 감정이 깃들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이드? 아까 전의 일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나요?”
샬로트의 말로 인해 기분이 상했다고 여겼는지 레사스는 곧장 걱정했다. 다급히 걸어와 자신의 기분부터 살피려는 모습을 보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목이 너무 먹먹해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후작의 여식에게 한 번 더 말하겠어요. 그대에게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않았던 게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거든요.”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 지껄인 말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데, 레사스는 자꾸만 그걸 신경 쓰며 눈썹을 휘었다. 보라색 눈을 물들인 감정은 오롯이 애정과 염려뿐이고, 스스로를 위한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가슴을 짓눌렀다.
“…지난 혹한기에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세이아드는 자꾸만 가라앉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작게 말을 할 때마다 물기어린 숨이 막막하게 새어 나와 한자, 한자, 말하기가 어려웠다.
“꿈에, 아주 간만에 전하가 나오더군요. 지금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면서 조금은 더 나이가 든 모습이었죠. 그곳에서 전하는 저를 끔찍이 경멸하시어, 결국에는 죽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항상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제가 너무 끔찍해, 전하께서도 끝내 저를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레사스가 입술을 닫았다. 걱정으로 가득 찼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리더니, 이윽고 표정이 사라졌다. 긴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제가 전하의 마음을 잘 몰랐나 봅니다. 저를 미워하느라 전하의 마음을 살펴볼 생각을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얼마나 저를 생각하시고, 저를 살리고자 하는지요. 안개 속에서 제가 하려던 일이 얼마나 전하를 아프게 하는지 몰랐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던 그때, 레사스가 손을 들었다. 괴로워 보이는 눈이 잠시 보이더니 그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웃었다.
“숲에서 내가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드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후작이 오기 전까지 편히 쉬어요.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간 잘만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으면서, 레사스는 막상 자신을 걱정하려 들자 물러나 버렸다. 도망갈 것처럼 등을 돌리는 그에게 세이아드가 말했다.
“제가 어떻게 전하를 내버려 두나요.”
“기사들도 있으니 나는 위험하지 않아요. 오히려 해가 지고 있는 상황이니, 나는 혼자 있어야 합니다.”
“이제 그런 것은 전하를 방해할 수 없는 걸 압니다. 숲속에서 사람들의 암시를 풀어내시지 않았습니까.”
“이드, 나는….”
또 한 번 도망가게 둘 순 없었다. 세이아드는 단숨에 틈을 좁혀 레사스의 팔을 잡았다. 제 옆에 단단히 붙들어 두겠다는 의지를 담아 그를 당기자 레사스가 끌려왔다. 저보다 큰 사내를 힘으로 잡아낸 세이아드는, 고개를 돌려버리려는 레사스의 턱을 쥐었다. 하얀 턱을 쥐어 저를 보게 하자 눈이 마주쳤다.
눈가가 발긋했다. 짙게 젖어든 보랏빛 눈이 세이아드를 담자마자 흐릿해졌다. 예쁜 눈썹을 일그러트린 레사스가 입술을 달싹거리자, 그의 흰 뺨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부드러운 뺨 위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소리조차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레사스를 보자마자 발밑이 내려앉는 듯했다.
“전하, 눈물을….”
레사스가 우는 걸 그전에도 보긴 했으나, 그 흔적을 미처 캐묻기도 전에 미소로 지워 버린 터라 지금 같은 모습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참다못해 깊게 고인 눈물을 터트리는 것처럼 레사스는 하염없이 울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긴 아랫눈썹에 물기가 맺히다 흐르기를 반복했다.
“울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이리 슬퍼하시면….”
레사스의 슬픔을 목격하자 세상에 온통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던 풍경에 색이 사라지며 생기가 메말랐다. 속이 자꾸 철렁 내려앉아 레사스를 붙들지 않으면 자신이 어딘가로 흘러가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그를 달래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세이아드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가, 곧 본능을 따랐다. 숨어서 우는 아이처럼 조용한 레사스를 제 품에 꽉 안은 것이다.
저보다 큰 사내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어깨에 기대게 하자, 레사스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세이아드를 안았다. 세이아드는 다른 팔로 레사스의 몸을 꽉 껴안아 주고는, 어릴 적 해 왔던 대로 작게 속삭였다.
“레사스.”
이름을 부르자 레사스가 크게 몸을 떨었다. 세이아드의 등을 간절하게 붙드는 손에 덜덜 힘이 들어갔다. 안쓰럽게 매달리던 레사스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뜨겁게 젖어든 눈꺼풀의 감촉도 생생했다.
“제발, 죽지 말아요, 이드. 제발…. 나를 미워해도 되니까, 어디에도 가지 말고, 제발…, 살아줘요. 다시는 그대를 내어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레사스는 넋이 나간듯이 중얼거리며 세이아드를 자꾸만 그의 안에 품었다. 맥박이 생생하게 뛰는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 서로의 가슴을 맞대어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세이아드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멍청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전하가 말씀하시는 건 뭐든 들어드릴 테니, 부디 울음을 그쳐주십시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미칠 듯한 심정에 세이아드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하염없이 쓸다가 귓불에 입맞춤을 남겼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레사스의 머리칼에서 슬프게 젖은 등나무꽃 향이 풍겼다. 빈틈 하나 없이 그를 한참이나 그렇게 안고 있자, 레사스가 드디어 원하는 걸 말했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네, 레사스.”
“한 번만 더요.”
“레사스.”
“나를….”
드디어 고개를 든 레사스가, 잔뜩 겁을 먹고도 너무나 갈망하는 눈으로 세이아드를 내려다보았다. 젖어서 짙어진 검은 속눈썹이 깜빡인 후, 레사스가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한다고…, 한 번만 말해 주세요. 딱 한 번만이요.”
마치 못 할 짓을 시키는 사람처럼 레사스는 죄책감으로 물든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조차 없이 툭 던질 수 있을 그런 평범한 말을, 레사스는 아주 대단한 소원을 비는 것처럼 부탁했다. 거절을 당하면 죽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절 내려다보는 눈이 두려움에 잠겨 있었다.
좋아해.
멍하니, 그 말을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레사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가 수도 없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속삭여 왔음에도, 그를 좋아하진 않기에 똑같은 답을 돌려줄 수 없다고 여겼다. 지난 몇 달간 레사스를 생각해 오고 그리워했음에도, 좋아한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냥 자신과는 거리가 먼 말이었다. 삭막하고 냉랭한 세이아드같은 남자가 감히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고작 누군가 우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괴로운 이 마음을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의식이 없는 순간에도 그를 떠올리고, 예쁜 것을 보면 그에게 주고 싶으며, 그가 웃는 걸 보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이 모든 욕망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좋아합니다.”
세이아드 프로시어스는 명백한 진실을 보지 못하던 장님이었다. 너무나 오래 눈을 가리고 살아 버린 탓에 스스로가 뭘 느끼는지도 이제야 깨달았다.
“좋아합니다, 레사스. 당신을, 제가… 좋아하고 있습니다.”
네가 좋다, 레사스.
네가 좋아.
어쩌면 너를 증오했던 그 순간조차도 나는 너를 좋아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비단 지금같이 은애하는 마음이 아니더라도.
나는 단지, 너를 지나치게 좋아했기 때문에 상처받았을 뿐이다. 그렇게나 아꼈던 네가 다른 이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믿어서. 네 마음에 자리 잡은 내가 작아졌다고 생각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