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19화 (119/147)

#119

나를 수천 번 죽여서 당신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기쁘게 내 뼈와 살을 내어줄 텐데,

당신은 너무나 다정해, 절대로 도망가는 법이 없지요.

그것이 당신을 죽이는 길이어도 말입니다.

***

태양.

빛, 아름다운 축복, 어둠을 물리치는 희망,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것. 솔리아스의 상징인 태양을 수식하는 뜻은 언제나 그랬다. 왕족의 표식인 찬란한 금발과 태양이 머무는 푸른 눈은 성스러움의 현신이었다.

하지만 레사스는 태양을 증오했다.

들끓는 열기는 매우 쉽게 지상의 것들을 태워 버리고, 찬란한 빛에 가려진 슬픔을 보지 못했다.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사람을 끝내 죽이고 마는 힘은 생보다는 죽음과 가까웠다.

태양은 지상에 내려오기엔 너무나 강해, 악마를 죽이기 위해 친히 내려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받아들일 대상을 필요로 했다. 너무나도 하찮고 초라해 보여, 감히 신의 현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존재 말이다. 신의 힘을 견딜 육신을 만드는 동안 악마의 눈을 속일 수 있도록, 태양은 볼품없고 형편없는 아이를 원했다.

레사스 솔리아스는 그런 운명을 타고 났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을 운명을.

각성과 함께 망각에 잠겨 있던 기억이 되돌아올 때면, 레사스는 언제나 큰 열병을 앓았다. 영혼까지 태울 듯한 열기 안에서 레사스가 제일 먼저 되찾는 기억은 항상 같았다. 그는 강렬한 허기를 먼저 떠올렸다.

죽어 가는 사람의 허기. 주린 배가 달라붙다 못해 위장이 꼬이고,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속이 스스로를 쥐어 짜내는 고통. 죽음보다 무서운 공허, 홀로 남아 있는 고독.

혹한기가 시작된 한 겨울의 밤이었을 것이다. 레사스는 굶어 죽어 가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남쪽 궁에서, 어머니인 레아나의 명으로.

겨울의 왕성은 레아나의 공간이었다. 국왕인 사이프리드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북부로 내려간 시기면, 왕궁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연히 왕후가 되었다.

레아나는 이때를 틈타 자신이 망친 것을 치워 버리기로 했다. 그것은 언제나 레아나의 마음 한편에 자리잡은 욕망이었다. 왕국의 역사상 가장 형편없는 왕족을 낳은 자신의 실패를 지우고자 하는 광증이 그때의 레아나를 휘두르고 있었다.

레아나는 왕궁의 검은 머리 괴물을 그냥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아이를 낳은 이후 한 번도 제 발로 자식을 본 적 없었으니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제 몸을 빌어 태어난 끔찍한 덩어리였다. 어차피 모두에게 잊혀 가고 있던 아이니 레아나가 할 일도 없었다.

왕후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명했다.

지독하게 추운 눈보라가 북쪽에서 수도까지 내려온 겨울이었다. 불을 때지 않는 궁은 한기가 자리를 잡아 바깥만큼 추웠고, 아무도 오가지 않는 어둠이 깔린 복도가 그 추위를 더했다. 어느 순간부터 오지 않는 유모를 찾아 배회하던 어린 소년은 이내 그녀가 자신을 떠났음을 직감했다.

레사스의 옆에는 항상 사람이 남아 있질 않았다.

아름답고 따뜻하게 빛나려면 모두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가능하다. 복도의 등불도 천장의 샹들리에도 죄다 시종이 손보던 것이라, 불빛이 사라진 궁은 레사스에겐 지나치게 광활하고 공허했다. 그 흔한 겨울옷조차 걸음마를 뗀 이후 가지지 못했던 레사스는, 얇은 면옷 하나만을 걸쳐 입고 남쪽 궁을 뒤졌다.

어디에도 먹을 게 없었다. 남쪽 궁에는 애당초 요리를 할 시종이나 창고가 없었으며, 대부분의 음식은 그를 불쌍히 여긴 유모가 본궁에서 얻어 온 것이었다. 그러니 부엌에 뭔가 있을 리 없었다.

텅 빈 부엌에는 먹다 만 빵이 굳어 있었는데, 그것을 파먹던 쥐를 쫓아내고 나서야 레사스는 겨우 사흘을 견딜 식량을 얻었다. 침으로 한참을 적셔야 혀에서 녹는 빵을 먹으며 아이는 비어 있는 궁을 지켰다. 그래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내길 빌면서, 그 대상이 부모님이길 남몰래 기원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마실 물조차 떨어져 기절하고 일어나길 반복하던 아이는 고통으로 인해 깨어났다. 위를 쥐어뜯는 통증이 그를 잠조차 들지 못하게 했다. 목이 타는 갈증과 영혼이 비는 듯한 허기에 레사스는 방을 벗어났다. 그 겨울의 가장 추운 밤이었다. 사방이 새카맸고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져 빛이 없었다.

고요한 암흑 속을 정처 없이 걷던 레사스는 화려한 성이 저만치에 보일 때쯤 멈춰 섰다. 더는 걸을 수 없다고 해야 했다. 전신이 얼어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발에는 감각이 없었고 다리는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곳이었구나. 내가 태어난 데가.

아이는 죽어 가는 눈으로 가만히 성을 보았다. 따스한 불빛이 반짝이는 왕성은 멀리서 보아도 온기가 가득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적막을 친구 삼아 살던 레사스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부산스러움을 멍하니 구경했다. 그저 누군가의 존재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이 가시는 것 같았다.

차마 그 안으로 갈 생각도 못하고, 아이는 천천히 웅크려 앉았다. 더는 움직일 힘이 없는 몸을 어떻게든 감싸고 무릎에 뺨을 기댔다. 이상했다. 제 앞에 저렇게나 커다란 성이 빛나고 있는데, 왜 주변은 여전히 어두울까.

나 같은 애는 왜,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걸까?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곧 까맣게 물들었다. 바람 소리가 무섭게 그의 귓가를 스쳤다. 언젠가 유모가 말해 주었던 어둠 속의 괴물이 당장에라도 그를 덮칠 것만 같았다.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이 곧 태풍처럼 거칠게 레사스를 밀었다. 앙상한 뼈만 남은 몸이 버티질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볼품없이 나뒹구는 소리가 바람 속에 섞였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울리던 누군가의 발소리가 멈췄다. 잘못 들은 건가, 하는 생각마저 곧 바람에 날아가려던 차. 뚜벅거리는 가죽 장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잠시만. 여기 사람이 있어.’

듣기 좋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눈을 뜰 힘조차 없이, 레사스는 그것이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다른 곳도 아닌 왕성에서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살아있는 것 같은데.’

곧 레사스의 뺨 위로 따듯한 온기가 퍼졌다. 너무 따듯해서 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살아있어. 데려가자.’

‘하지만 왕궁의 아이를 우리가 함부로 데려가도 될까요? 일단은 시종을 찾아 맡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에요. 이제 막 각성을 하신 참이니, 어서 본성으로 돌아가 의식부터 치르시는 게 우선입니다. 아스테르 전하를 뵈러 가셔야지요.’

‘퀼리.’

청년과 소년의 중간에 있는 단정한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간질거렸다. 우아한 말투에 녹아 있는 선의가 느껴졌다. 모두가 싫어하는 자신을 만져 준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죽어 가던 마음에 불쑥 욕망이 솟았다.

레사스는 안간힘을 다해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매끈한 턱선과 날렵한 콧날이 보였다. 얼핏 형체만 보아도 굉장한 미남임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그 사람을 더 보고 싶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몸이 쑥 들렸다. 다리와 등을 받친 단단한 팔은 소년답지 않게 강인했다.

‘여기는 왕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장소야. 그런 곳에서 죽어 가고 있는 아이라면, 처지가 어떤지는 뻔하지 않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쩐지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는데 말입니다…. 곤란해지실 수도 있어요, 세이아드 님.’

‘괜찮아.’

소년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품 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먹지 못하고 자라 또래보다 한참 작던 레사스는 체격이 다부진 소년의 품에 안기고도 남았다. 볼품없는 아이를 한 번 더 고쳐 안으려던 소년이 레사스가 깨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순간 두려움에 휩싸여 보랏빛 눈에 물기가 고이는 그 찰나.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하얀 웃음이 소년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진회색 눈썹이 둥글게 휘고, 그 아래에 자리한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희미한 웃음을 입술에 매다는 소년의 등 뒤로, 저 멀리 거대한 달이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밤하늘을 덮은 먹구름이 가시고 세상에 빛이 내렸다. 왕성을 밝히는 불빛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다정한 빛이었다.

북부의 겨울은 세이아드를 닮았다. 매서워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그 안에 자리한 풍경은 하얗고 잔잔했다. 겨울은 생명이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포식자를 피해 숨은 동물이 쉬어 갈 시간을 주고, 일 년 내내 무언가를 피워 내야 했던 식물은 잠시 숨 돌릴 겨를을 주었다. 레사스는 그래서 겨울이 좋았다. 아니, 사실은 세이아드가 생각나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전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두막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레사스는 오두막의 벽난로에 장작을 넣던 것을 멈추곤,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가을바람을 묻히고 온 세이아드가 서 있었다.

‘또 숲을 돌아보고 있으셨나요.’

겨울이 오기 전쯤이면 세이아드는 두꺼운 털 망토를 둘렀다. 낡은 티가 서서히 나는 망토는 레사스가 처음으로 사냥에 성공해 잡은 흰 늑대의 털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서둘러 세이아드에게로 달려간 그가 세이아드의 손을 잡았다.

‘추웠죠, 이드? 어서 와서 불 앞에 앉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전하께서 추우실 텐데.’

‘요즘 자주 나를 그렇게 부르네요. 말을 높이는 것도 그렇고요. 싫어요, 이드.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근래 들어 세이아드는 부쩍 레사스와 거리를 뒀다. 전처럼 그를 대해 주면서도 어느 순간 말을 높이거나 전하라고 칭하는 일이 많아졌다.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곧 성인이 되면 그때부터는 둘만 있을 때도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레사스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처럼 왕실을 벗어나 세이아드의 기사처럼 사는 쪽이 좋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울뿐인 왕자이고 싶지 않았다. 정화의 힘도, 치유력도 없는 등신보다야 세이아드를 지키다 죽을 수 있는 기사가 훨씬 낫다는 건 자명했다.

‘…둘이 있을 때만이야, 레사스.’

레사스의 보랏빛 눈이 슬픔으로 물들자 결국 세이아드가 한 발 물러섰다. 고작 그 한마디에 비통해졌던 얼굴 위로 기쁨이 피었다. 환하게 밝아진 얼굴을 본 세이아드가 옅게 웃었다. 피식 입꼬리를 올린 그가 레사스의 손을 맞잡아 주곤 말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성에 손님이 왔으니 그만 가 봐야 해. 들어가자, 레사스.’

‘손님이요?’

‘시온이 왔어. 실드라스 공작님과 함께. 반년 만에 보는 거니 어서 가지 않으면 녀석이 투정을 부릴 거야.’

세이아드는 잿가루로 장작을 덮어 불을 끄고는, 레사스를 이끌어 오두막을 나섰다. 겨울이 오기 전 숲을 시찰하는 그들이 종종 쉬어 가기 위해 만들어둔 오두막은, 어느 순간부터 레사스가 제일 편히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쪽 궁에 자리한 자신의 방보다 좁고 작은 오두막 한 평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세이아드와 그만의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남부의 숲에서 니르아가 사라졌다던 그 일 때문일까요?’

‘그런 것 같아.’

오두막을 나와 숲을 걷던 와중이었다.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근처에서 울렸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옆에 있던 나무 둥치로 향했다. 거기엔 작은 울새 하나가 있었다. 크게 다쳐 날지 못한 채 바르작거리는 몸짓이 제법 처량했다. 북부에서만 볼 수 있는 회색 울새였다.

안쓰럽긴 하나 저대로 두는 것이 자연의 섭리였다. 숲의 동물은 니르아의 영향을 받기도 하니 작은 새여도 위험할 수 있었다. 미련을 버린 레사스가 시선을 돌리려는데, 세이아드가 천천히 발걸음을 틀었다. 몇 발자국을 걸어 울새의 앞에 선 그는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새를 감싸 안았다.

‘이드, 숲의 동물을 데려가려고요?’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세이아드는 그리 말하고는 새를 면밀히 살폈다.

‘공격적으로 굴지 않는 걸 보니 정신을 먹힌 건 아닌 것 같다.’

‘다쳐서 그럴 수도 있어요. 괜히 데려갔다가 저것이 이드를 긁기라도 하면, 속상할 사람이 많아요.’

날을 세우는 레사스를 보며 세이아드가 눈꼬리만 휘어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동의했다.

‘치료만 해 준 뒤에 다시 숲으로 돌려보내면 별일은 없을 거야. 숲에서 사는 쪽이 이 녀석에게도 좋겠지.’

세이아드는 그렇게 말한 뒤 울새를 망토 안의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곤란하고 불쌍한 상황을 지나치는 법이 없던 세이아드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힘이 있었고, 자신의 사명에 아주 충실했다. 솔리아스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을 지켜 주는 것. 그게 세이아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다.

레사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 광경을 보았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을 의심하는 레사스로서는 세이아드의 이런 마음이 걱정될 때가 많았다. 다정한 사람은 상처를 입는다. 세상은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으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잦다.

그건 그냥 본능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베풀어 주는 사람을 보며 사람은 고마워하는 대신, 결핍에 분노한다. 대개 분노의 화살은 베풀어 준 이에게 향하길 마련이었고.

여전히 마음에 걸려 한 마디를 하려는 차, 저 멀리서 세이아드의 기사들이 뛰어왔다. 바인과 리그다는 세이아드가 시온을 보기 위해 남부로 가던 중 구해 준 이들 중 하나로, 그 길로 북부의 소속이 되어 세이아드를 충실히 모시고 있었다.

세이아드가 워낙 아끼는 사람들인지라 레사스 또한 그들에게는 사람처럼 굴려고 했다. 무표정하던 레사스의 얼굴 위로 지어낸 미소가 떠오르는 찰나 바인과 리그다가 세이아드의 앞에 섰다.

‘세이아드 님, 대공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고 왔는데, 역시 전하와 계셨군요.’

‘생각보다 심각한 사안인가 봅니다. 실드라스 공작뿐만 아니라 아스테르 전하께서도 오셨어요. 국왕 폐하의 명이라고 하네요.’

아름다운 시간은 잔인할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지난한 고통은 언제나 느리게 흘렀다. 찬란했던 시절은 이날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그 뒤부터 레사스의 시간은, 항상 이 겨울에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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