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수도까지 내려오는 일이 없던 북부의 바람이 사방에 휘몰아치더니, 함박눈이 수도 전체를 덮었다. 매서운 칼바람만이 불어닥치던 긴 겨울 사이 처음으로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주 잠깐 숨 돌릴 시간을 주는 것처럼.
지난밤에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악마와의 싸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신이 극도로 소모됐다. 끝없이 밀려들던 니르아가 마침내 사라져 가나 싶었는데, 악마는 다른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들의 정신을 파고들어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기 시작했다.
믿을 사람이 극도로 줄었다. 제아무리 강한 의지를 지닌 기사라도 결국에는 거대한 존재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서로의 뒤를 지켜 주던 동료들이 갑자기 정신을 놓고 등에 칼을 꽂았고, 충직한 마음을 오래 지켜 왔던 기사들 또한 결국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충성스러웠기에 그나마 이 정도를 버텨 온 것이리라.
세이아드 또한 어제 아끼는 기사를 잃었다.
성안에서 검을 빼내기로 했던 기사를 기다리던 밤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를 주고받던 리그다를 모나가 갑작스레 공격했다. 이미 앞선 이들이 동료를 살려 보려다 죽고 말았던 걸 보아 왔음에도, 리그다는 어떻게든 모나를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이지를 앗아 간 저주는 끝내 누군가의 죽음을 보아야만 끝이 났다. 결국 바인이 모나를 죽였다. 오래간 좋아해 온 소꿉친구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바인이 비로소 모나를 제압한 찰나, 정확히 그 순간 정신을 놓은 리그다가 바인의 목을 베었다.
허공으로 날아간 목이 세이아드의 앞에 떨어졌다. 다른 기사들을 어떻게든 제압해 낸 세이아드가 때맞춰 그곳을 본 차였다. 눈치 없고, 단순하고, 그럼에도 유쾌하고 다정해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던 기사는 죽은 순간에도 그런 모습이었다. 툭, 떨어져 굴러온 얼굴은 괜찮다는 듯 리그다를 달래던 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악마는 참으로 간교하게도 사람의 정신을 무너트리는 법을 알았다. 바인의 목을 베는 순간 정신을 차린 리그다가 우뚝 멈춰서 그 광경을 보았다. 하나뿐인 친구를 죽인 검에서 핏물이 뚝뚝 흘렀다.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본 리그다가 이윽고 덜덜 떨며 비명을 질렀다.
‘바아아인―!’
끔찍한 절규가 터졌다. 세이아드가 미처 그녀를 막을 틈도 없이, 리그다는 끝내 정신을 놓고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여러 명이 죽었다. 사랑하는 기사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세이아드의 곁에 남은 것은 결국 레사스 혼자였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기사들을 죽이고 돌아온 레사스는, 기사들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세이아드를 발견했다. 커다랗고 단단하던 등이 그날따라 지독히 아프고 쓸쓸해 보였다. 세이아드는 울지 않았으나, 아주 오래간 말이 없었다.
기사들의 피가 흘러 땅을 붉게 적셨다. 피비린내가 바람에 흩어지고 흩어져 멀리 사라졌을 때쯤에야, 그는 천천히 허리 숙여 그들의 유품을 거뒀다. 레사스는 말없이 그들을 묻을 땅을 팠다. 그들은 침묵 속에 시신을 수습하고 막사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티테르들과 합류한 세이아드는 지친 얼굴로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게 지난밤의 일이었다.
레사스는 등불이 꺼지지 않는 세이아드의 막사 근처를 밤새 지켰다. 희미하고 낮은 흐느낌이 막사 아래로 새어 나오는 것을 몰래 들으며, 레사스는 어두운 밤하늘을 보았다. 깊은숨을 조용히 내쉬자 하얀 입김이 부서졌다. 얼어붙은 손과 발보다 마음이 훨씬 아팠다. 핏줄에 흐르는 것이 유리 조각인 양 전신이 아리고 고통스러웠다.
울지 마세요, 나의 달.
그의 아름다운 사람은 항상 기쁨만을 제게 줬는데, 자신은 그를 기쁘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 밤이 잔인하게도 길었다. 뜨지 않는 해를 기다리며 레사스는 어릴 때나 했던 헛된 상상을 그려 나갔다. 자신에게 힘이 있어, 세이아드를 슬프게 하는 악마를 죽이고 그를 행복하게 해 주는 상상을.
그러나 결국 망상에 불과했다. 레사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군가를 대신해 죽는 것 외엔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목숨은 하나뿐이라, 세이아드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살릴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중요한 순간을 위해 아끼고 아껴 놔야 했다.
마침내 새벽이 되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쯤 아스테르가 막사로 왔다. 앞을 지키고 있던 레사스와 눈이 마주친 그는, 불편한 티를 적당히 숨기며 그의 반쪽짜리 동생에게 명령했다.
‘이만 쉬러 가. 네가 그렇게 있으면 이드가 신경 쓸 테니.’
‘…허락해 주신다면 주변을 지키겠습니다. 언제 습격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레사스는 언제나 아스테르의 앞에 서면 한없이 초라해졌다. 외양부터 능력까지 완벽한 태양의 표식을 지닌 아스테르는, 세이아드의 가이드로서 그가 이 끔찍한 겨울을 버티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서로를 형님과 아우로도 불러보지 않았을 만큼 거리가 먼 사이였기에, 레사스에게 그는 무한히 높은 곳에 있는 성스러운 자였다.
‘그렇다면 멀리 떨어져 있거라. 내 티테르를 정화하는 순간을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으니까.’
정화라는 말이 나오자 레사스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현재 세이아드와 아스테르는 가장 중요한 인력이었고, 그들의 상태가 전투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었다. 악시드 대공의 가이드인 제 아버지는 성에 고립되어 있었으며, 브레드히트 공작과 베트리아 공작의 가이드는 며칠 전 죽었다.
어린 티테르들은 애당초 가이드가 없어 한계에 이른 상태였고, 실드라스 공작은 가이드가 있긴 하나 둘 다 너무 지친 판국이었다. 결국 아스테르와 세이아드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네, 전하.’
분수를 알라는 듯한 아스테르의 푸른 눈을 피해 레사스는 고개 숙였다. 아스테르는 다소 오만하고 권위적인 사람이었으나, 세이아드만큼은 무척 아꼈다. 세이아드를 슬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가이드인 아스테르를 옆에 두는 쪽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미련이 남은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등을 돌려 멀어지려던 레사스는 마지막으로 뒤를 살폈다. 아스테르가 들어간 막사의 천막 틈이 바람에 펄럭였다. 작게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를 안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형님의 손이 부드럽게 제 달의 머리칼을 넘겨 주더니, 이윽고 뺨을 감쌌다. 다정한 손길을 따라 세이아드가 고개를 들었다. 타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친밀하고 애틋한 모습이었다.
나도….
나도, 당신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두커니 서서 다른 세상을 눈에 담던 레사스는 이윽고 근처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틀었다. 어떠한 감정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기사들의 눈을 살핀 후, 동공이 사라져 까맣게 변한 것을 확인한 후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에 울리더니 이윽고 눈 위로 피가 번졌다.
습격한 기사들은 실드라스의 소속이었다.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죽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돌아와도 다시 나갈 확률이 높으니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팔을 크게 베여, 레사스는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혼자 붕대를 감았다. 안 그래도 많은 이가 다친 상황이었는데 저에게까지 의사를 붙여달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피가 워낙 묻어 상의를 벗은 채 살갗을 닦고 있는데, 막사 입구에서 세이아드가 그를 불렀다.
‘레사스, 곧 회의가 시작될 테니 같이 가자.’
‘네, 이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 말한 레사스는 입구로 걸어가 천을 걷었다. 바깥이 추울 테니 잠시라도 세이아드가 안에서 기다렸으면 싶었다.
‘추우니까 들어와요, 이드.’
상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라는 걸 깜빡하고 천을 걷자, 그 모습을 본 세이아드가 일순 눈을 깜빡거렸다. 회색 눈동자가 당혹스레 물들다가 이내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린 그가 낮게 속삭였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레사스.’
세이아드의 말에 토를 다는 법이 없는 청년은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영문도 모른 채 막사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온 세이아드가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왕족의 몸은 함부로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게 좋아.’
얼마나 보기 싫었던 것인지 세이아드는 자신을 볼 생각도 않고 뒷모습만을 보여 주었다.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 레사스는 서둘러 옷을 집어 들고는 사과부터 했다.
‘아, 깜빡했어요. 보기 싫었죠? 미안해요.’
어릴 때는 그래도 종종 절 씻겨 주거나 같이 멱을 감았던 것 같은데, 작년부터는 서로 같이 씻는 일이 없어졌다. 흉터가 상당히 많은 몸이라 보기 좋은 꼴이 아님을 알아 레사스는 미안해졌다. 그러자 말이 없던 세이아드가 휙 몸을 돌렸다. 보기 좋은 미간을 살짝 찡그린 그는, 짙은 눈썹을 엄하게 굳히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너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야. 스스로를 비하하고 낮출 필요가 없어.’
분명 혼나고 있는 것 같은데, 놀라고 두려운 마음보다 이상한 기쁨이 차올랐다. 속이 간질거리고 몸이 홧홧해져 레사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뺨이 너무 뜨거워 느낌이 묘했다. 피가 묻은 옷을 어쩌지 못하고 쥐고만 있자 세이아드가 그걸 보고 다가왔다.
‘…또 다쳤구나.’
조심스럽게 뻗어진 손이 붕대를 감은 레사스의 팔을 매만졌다.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황송해 레사스는 불긋해진 눈으로 남몰래 세이아드를 살폈다. 저같이 하찮은 존재를 이리 소중히 대해 주는 세이아드가 너무나 상냥해, 슬픔에 가까운 애틋함이 밀려들었다.
‘제발… 너를 소중히 여기도록 해.’
‘큰 상처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것보다는, 실드라스 공작의 기사들을 살리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이드는 사람이 죽는 걸 싫어하는데.’
레사스의 사과를 듣고 있는 세이아드의 얼굴 위로 회색빛 슬픔이 퍼졌다.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홀로 끔찍이 괴로워하는 것을 알아, 레사스는 이런 말을 전해 준 스스로를 대신 죽이고 싶어졌다.
무엇이든 그를 위해 하고 싶다는 열망이 고통처럼 퍼졌다. 어떻게든 이 싸움을 끝내고 세이아드에게 행복한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뭐든, 뭐든 해야 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은 생명의 본능이니,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있길 마련이지. 내가 슬픈 것은… 죽음에 무던해지는 거야. 목숨에는 귀천이 없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잊게 되는 게 두렵구나.’
감정을 최대한 갈무리한 목소리로 덤덤히 중얼거린 뒤, 세이아드는 레사스와 눈을 마주쳤다. 차분한 회색 눈이 영혼을 뚫어보듯 날카롭게 레사스를 주시했다.
‘그러니 레사스, 네 상냥한 마음이 악마에게 끌려 내려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 절대로 선을 넘는 짓은 하지 마.’
레사스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자신은 상냥한 사람도 아니고, 세이아드의 생각과 달리 목숨에는 귀천이 있다고 여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아드는 그의 세상이고 규율이었기 때문에, 설령 그가 죽음을 명하더라도 기쁘게 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달이 원한다면 레사스는 기꺼이 지옥에 떨어질 수 있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나의 사랑스러운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수도를 점령한 니르아를 물리쳤지만, 왕성 앞에 똬리를 튼 거대한 뱀과 대치하기를 벌써 열흘이었다. 끝이 보이나 싶던 싸움이 갑자기 막혔다.
한때 티테르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가졌던 실드라스 공작과 브레드히트 공작으로 인해 악마의 존재에 대해 알아내고, 브레드히트의 가이드가 데려온 학자, 아셀라를 통해 그것을 죽일 법까지 알아낸 건 좋았다. 성물을 전달받기만 하면 된다며 모두가 기뻐했으나, 악마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것을 막고 있었다.
왕성 자체를 둘러싼 라만 솔리아스의 힘이 악마를 성벽 앞에서 멈춰 뒀지만, 악마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홀렸다. 번번이 검을 전달하려던 기사들이 세뇌되어 서로를 죽였고, 티테르가 직접 나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한 명이 사라지면 득달같이 알아차리고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쉽게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웠다. 티테르들이 지키는 최종 전선 뒤로는 수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기에 이곳이 뚫린다면 피해가 막심했다.
하여 악마의 힘이 통하지 않는 가이드를 직접 보내기도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브레드히트 공작과 베트리아 공작의 가이드인 유세프, 파르마가 지나가던 시종에 의해 죽었다. 삽시간에 전력을 잃은 것이다.
‘아무래도 제가 들어가는 게 맞겠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세이아드가 입을 열었다. 힘의 부작용으로 인해 지친 기색이 역력한 공작들이 그를 보았다. 파리한 기색의 세레나가 아들의 말을 막았다.
‘너와 나는 둘 중 하나가 죽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이곳을 지켜야 한다. 악마를 죽일 수 있는 건 프로시어스만이 가능하다고 아셀라가 말했던 걸 듣지 않았더냐?’
엄격한 목소리는 전과 달리 힘이 없었다. 가이드 없이 한 달을 싸워 온 악시드 대공은 이제 스스로를 억누르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것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저뿐입니다. 검을 전달받을 방법이 모두 막혔으니 제가 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요.’
덤덤하게 반박을 뱉는 세이아드는 죽음을 이미 각오한 듯 초연했다. 의지가 굳어진 목소리를 듣자 두려움이 덜컥 일었다. 레사스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여태까지 존재감 없이 지내던 사람답지 않게 그의 의견을 반대했다.
‘아뇨, 안 돼요. 악시드 대공의 말이 맞습니다. 현재 악시드 대공께서는 지친 상태니, 악마를 죽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세이아드뿐이에요. 성에는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
그러자 베트리아 공작이 침울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누굴 보내시겠다는 겁니까, 레사스 전하?’
마지못해 그를 높여 부르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뭘 알고 그리 말하냐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좌중의 시선이 레사스에게 쏠렸다. 기대라곤 하나도 없이, 정화조차 하지 못하는 무쓸모한 왕족을 보는 눈길들이 서늘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레사스가 조금이나마 힘을 쓸 수 있는 존재였다면 크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무리 빌어 봐도 그에겐 정화의 힘이 나타나질 않았다.
무미건조한 눈빛들 끝에는 지쳐 보이는 형님의 얼굴이 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힘을 쓰고 있는 아스테르의 푸른 눈은 전과 달리 생기가 없었다. 언제나 도도하던 형님마저 절망을 보이는 모습에 레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아침부터 생각했던 말을 뱉었다.
‘내가 가겠습니다.’
순간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뜬 베트리아가 보였고, 표정을 굳힌 세이아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악시드 대공이 레사스의 의견을 기각했다.
‘송구하옵니다만, 전하, 앞서 들어간 기사들은 모두 악마에게 정신을 내어주었습니다. 전하께서 가셔도 별반 다르진 않을 겁니다.’
보통의 기사와 별 다를 바 없는 취급에 레사스는 잠시 움찔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분명 아무 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리아스의 피를 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자아를 잃어버렸음에도 아직 이 자리에 있지요. 그러니 내게 어느 정도의 면역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나는 정화 같은 대단한 일을 하진 못하나, 검을 휘두를 줄은 압니다. 기사들을 제압하고 돌아올 수 있어요.’
상당히 합리적인 말에 모두 생각에 잠겼다. 악시드 대공마저 고민이 되는지 입을 다무는 찰나, 세이아드가 그것을 반대했다.
‘안 됩니다. 전하 혼자 가시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수많은 기사를 홀로 상대할 순 없어요.’
‘그럼 제가 같이 갈게요!’
그때, 시온이 손을 들며 나섰다. 가이드 없이 싸우느라 상당히 지쳐 보이는 얼굴 위로 웃음을 지어낸 그가 해맑게 말했다.
‘제 능력은 형님처럼 스스로를 숨길 수 있으니, 전하와 함께 잠입하기 수월할 거예요. 가이드가 없어 크게 싸울 수도 없으니 형님이 빠지시는 것보다 낫고요. 어때요?’
맞는 말이었다. 빛을 사용하는 실드라스의 속성을 그대로 이은 시온은 세이아드처럼 자신을 빛에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그 덕에 숲을 정찰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으니, 그의 말을 반박할 이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다. 올해 겨우 성년을 맞이한 두 명을 보낸다는 생각에 좌중이 망설이는데, 실드라스 공작이 나섰다.
‘그러거라, 시온. 이런 날을 위해 우리가 있는 거니까.’
‘네, 아버지.’
평소 엄격하게 시온을 키워 온 실드라스 공작은 이 순간에도 의무에 철저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어린 청년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세이아드는 이 결정이 못내 불안한지 입매를 굳혔으나, 고개를 젓는 악시드 대공에 의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성으로 들어갈 이들이 정해졌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레사스는 항상 이날의 결정을 후회했다. 만약 자신이 홀로 성에 들어갔고, 시온이 성밖에 남았다면, 어쩌면 티테르들 모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악마를 물리쳤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실드라스 공작 또한, 자신이 짐작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비틀리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이드 역시, 전과 같이 사랑받는 삶을 살았을 텐데….
아니.
그냥….
자신이 죽고 모두가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