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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22화 (122/147)

#122

하얀 낮이었다. 시체를 태우는 매캐한 잿더미와 통곡 소리, 슬픔에 젖은 적막, 피를 덮은 눈더미를 밟고 레사스는 성벽의 가장 후미진 장소로 향했다. 기다란 뱀의 몸통은 성벽 전체를 똬리 틀고 감싼 상태라 어딜 가도 그것의 몸통이 보였다.

아셀라는 이것을 ‘녹스’라고 불렀다. 세상에 태양이 떠오르고 낮이 생기기 전, 이 광활한 하늘을 지배하던 것의 흔적이라고 추측한 탓이다. 그러나 레사스는 이것에게 이름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존재에 의미가 생기는 탓이다.

뱀의 몸통은 밤하늘 그 자체 같았다. 빛조차 고이지 않는 반투명한 어둠은 안으로 파고들수록 새카맣게 변해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이는 몸통에 뒤따르던 시온이 허공에서 속삭였다.

‘이렇게 무서운 걸 우리가 죽일 수 있을까요?’

‘네. 그대들은 이미 대단한 것과 싸워 왔으니까요. 충분히 죽일 수 있어요.’

‘전하께서는 형님처럼 용감하시네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나는 이드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닌걸요.’

‘이곳에 자처해서 오신 것만으로도, 전하는 대단하신 거예요. 형님께서 왜 전하를 아끼시는지 알 것 같아요!’

세이아드의 말대로 시온은 저와 동갑이나 소년 같은 면이 남아 있었다. 다정하고 정의로운 청년은 곁에 있기만 해도 밝아지는 기분이 들어, 세이아드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둘은 먼젓번의 기사들이 만들어 둔 개구멍을 찾아 성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미 거기엔 세뇌된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림잡아 서른이 넘는 숫자에 레사스는 긴장을 삼키고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새까맣게 변한 눈들이 레사스를 일제히 쏘아보았다. 스르릉,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찢었다.

내가 들어와서 다행이야.

레사스는 그를 죽이려 달려드는 기사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며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세이아드가 왔더라면, 무고한 목숨을 죽이며 지나치게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레사스는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자신의 목숨에 별다른 미련이 없기에 이럴 것이다. 그의 생명은 목적을 위해 존재했다.

시온이 도운 덕에 달려드는 기사들을 처리하고 그들은 성으로 진입했다. 최대한 체력이 버텨 줄 때 검을 찾아야 했기에, 그는 쉬지 않고 길을 뚫었다. 아무리 살육에 무던한 레사스에게도 이 뒤는 생지옥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할 일을 하던 평범한 시종들이 그들을 보자마자 정신을 놓았다. 마주치는 모든 이가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성에서 나고 자란 적이 없던 레사스는 국왕 내외가 머무는 곳을 일일이 직접 찾아내야 했다. 출신은 왕족이나 부모의 거처조차 모르는 처지로 인해 시간을 지체했다. 그 사이 시온이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부작용이 쌓인 상태에서 힘을 쓰면 굉장한 고통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시온은 그것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압도되고 있었다. 흘끗 그를 살필 때마다 앳된 청년의 얼굴 위로 슬픔과 공포가 가득했다. 눈물이 고인 갈색 눈을 보고 있으려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세이아드가 아끼는 사람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마침내 그들은 국왕이 검을 지키고 있는 중앙의 홀에 도달했다. 높은 꼭대기에 자리한 홀은 왕실의 정예들이 지키고 있었다. 아니, 지킨다기보다는 사실상 고립된 것에 가까웠다. 왕의 충실한 수족들이었던 기사들이 까맣게 물든 눈으로 국왕이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피에 젖은 몸으로 그 앞에 선 레사스를 보자마자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여기는 내가 처리할게요, 시온. 그대가 안으로 들어가 검을 가지고 나가요.’

레사스는 제 여정이 여기서 끝나야 함을 직감했다. 왕의 근위 기사는 하나하나가 수준이 대단했다. 개개인으로는 이길 수 있어도 그들이 힘을 모으면 저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창백한 안색의 시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렇게 많은 수를 전하 혼자 상대할 순 없어요…!’

‘둘 다 지친 상황입니다. 검을 회수해 나가려면 그대의 능력이 필요해요. 나는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가세요, 당장. 그렇지 않으면 이드를 비롯한 그대의 소중한 사람들이 다칠 겁니다. 바깥의 악마를 죽여야죠.’

레사스는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시온은 죄책감에 질식할 듯한 표정을 하며 레사스와 눈을 마주치다가, 떨리는 입술로 사과하며 모습을 감췄다.

‘미안해요.’

티테르답게, 시온은 시간을 낭비하지도 더는 망설이지도 않았다. 레사스가 바라던 대로였다. 그렇게 시온이 빛 속으로 그의 인영을 감추는 동시에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쏟아지는 살수는 깔끔하게 레사스의 급소만을 노렸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검을 모두 피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티테르도 가이드도 아니었으니, 결국 점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등이, 어깨가, 팔이, 허벅지가, 하나하나 갈라졌다. 긴 상흔이 피부를 가르며 벌건 속살을 드러냈다. 즉사하지 않을 급소만을 간신히 피해 가며 레사스는 기사들을 죽였다. 자신의 피와 땀이 자꾸만 흘러내려 눈이 감기려는 걸 어떻게든 부릅뜨고 검을 휘둘렀다. 단내가 짙게 스민 무거운 숨이 그때마다 피와 섞여 토해졌다.

할 수 있어. 시온이 무사히 검을 들고 나갈 때까지 살아야 해. 그래야 이드가 살 수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막이 터진 건지 윙윙거리는 진동만이 귓가를 울렸다. 그저 의지만을 따라 움직였다. 가르고, 베고, 또 찔러서, 시체의 수를 더하고 더했다.

하지만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다 죽여서라도 그를 막으려는 듯한 공격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자신이 실패해 이드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때였다.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쾅, 쿠르릉, 부서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내리꽂히더니 복도가 흔들렸다. 레사스를 비롯한 기사들이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동시에, 복도의 왼편이 무너져 내리며 성의 바깥이 보였다. 하얀 돌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레사스를 공격하던 기사들을 짓이겼다. 무슨 영문인지 모를 상황에 혼미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꺄아아악!’

‘악!’

‘다들 피해! 다들, 성벽이 무너진다!’

훤히 뚫린 복도 너머, 성 아래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딘가에서 세이아드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주인의 부름에 반응하듯 세이아드의 흔적을 따라 바깥을 살피려는 찰나, 무너진 성을 타고 기어오르는 시꺼먼 몸뚱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수십 명을 한 번에 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뱀이 지나치는 곳마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뱀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태껏 성을 막고 있을 뿐, 직접 공격하진 못했었는데…?

불안한 예감과 함께 홀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의 시체가 내던져지며 문을 부쉈고, 그 틈으로 국왕 내외가 달려 나왔다.

‘레아나, 어서 도망가시오!’

이제 갓 네 살이나 되었을 법한 남자아이를 안은 여자가 뛰쳐나왔다. 공포로 얼룩진 검은 머리의 여인을 마주치자마자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라색 눈과 검은 머리카락이 레사스 제 것과 똑같았다. 태어나 버려진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기에 못 알아보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머니는 아름다운 녹색 드레스에 피가 묻어 엉망이었다. 안에 있던 기사들은 시온이 모두 죽인 것인지, 그 뒤를 쫓아 나오는 이는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뱀의 머리와 대치하는 시온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검을 등 뒤로 감춘 채 어린 청년은 혼자 그것과 맞서고 있었다.

뱀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자 홀 안에서 거대한 빛이 퍼졌다.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오며 국왕 내외의 등을 밀었다. 도망치려는 그들을 복도에 남아 있던 기사들이 추격해 왔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레사스는 부모님에게로 다가갔다. 종종 북부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아버지가 절 기억했다.

‘레사스, 우리를 호위해다오!’

국왕의 부름에 왕후가 흠칫 그를 보았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검을 휘두르려는 기사에게 달려든 레사스는, 자신의 어깻죽지를 내어주곤 그의 목을 베었다. 숨을 몰아쉴 기력조차 없어 꺽꺽거리는 숨을 삼키며 균형을 잡았다. 기사만 상대하면 승산이 있을 것도 같은데, 무너진 벽을 타고 니르아가 기어 올라왔다.

‘가세요.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네가 따라와야 우리가 살아!’

왕후가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붙들었다. 태어나 두 번째로 마주하는 어머니와 말을 섞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레사스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레아나는 품에서 떨고 있는 제 동생을 더욱 끌어안으며 그를 당겼다.

‘어서 우리를 안내하거라. 네 동생을 살려야지! 가이드가 하나라도 더 살아남아야 왕국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어!’

짧은 실랑이가 벌어지던 차, 안에서 굉음이 울렸다. 고통스러워하는 비명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모두 일제히 안쪽을 보았다. 그곳엔 무릎을 꿇고 쓰러진 시온이 있었다. 쿨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피를 뱉어 내는 걸 보자마자 레사스는 무작정 뛰었다. 어떻게든 그를 돕고자 레사스가 달려가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기사들이 그를 막았다.

그 뒤로 펼쳐진 광경들이 괴로울 정도로 선명히 레사스의 눈동자에 박혔다. 피를 토하면서도 검을 지키고 있는 시온에게 기사들 중 몇 명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오는 것을 보면서도 시온은 움직이지 못했다. 한계에 이른 것이 명확한 죽어 가는 얼굴과 순간 눈이 마주쳤다. 갈색 눈이 간절히 자신을 쳐다보는 찰나, 끝내 죽음이 그를 덮쳤다.

기사들의 검이 시온의 전신을 꿰뚫었다. 성물을 품에 안은 채로 시온은 몸을 웅크려 어떻게든 그것을 보호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자신이 무어라 외친 것 같았는데, 제 목소리보다 더욱 큰 절규가 뒤에서 들렸다.

‘시온, 안 돼―!’

실드라스 공작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사방으로 눈이 멀 듯한 빛이 퍼졌다. 레사스를 막고 있던 기사들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피를 뒤집어쓰며 쓰러진 레사스의 머리맡에 공작의 발이 스쳤다. 아무래도 공작의 힘이 저에게까지 닿은 듯싶었다.

‘안 돼, 내 아들, 내, 아가…! 제발…, 이 아비가 왔다…!’

기울어져 뒤집힌 시야 너머로 울부짖는 시르칸 실드라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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