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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26화 (126/147)

#126

밤부엉이가 요란히 우는 저녁이었다. 어둑어둑한 자줏빛을 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따듯하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고요한 여름밤이 문득 아주 평온하게 세이아드를 감쌌다. 코끝으로 풍기는 풀냄새나 작은 풀벌레의 속닥거림이 긴장을 한층 풀어 주었다.

끔찍했던 낮의 일은 여전히 세이아드의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그 순간의 불쾌한 감정들은 레사스로 인해 사라졌다. 죄책감이 들 때면 그 잔여물이 거머리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 달라붙곤 했는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자각하니 많은 게 바뀌었다.

세이아드는 이제 레사스를 위해 살고 싶었다.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를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 행위가, 제 아름다운 왕자를 무척이나 비통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그는 이제 안다. 좋아하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 않기에, 세이아드는 본인을 좀 더 중요하게 여기기로 했다. 그것은 두 번의 삶을 통틀어 처음 가진 자각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속으로 작게 읊조린 말은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이렇게나 선명하고 간절한 감정을 겨우 깨달은 제가 어리석었다. 레사스를 제 삶에 다시 되찾은 뒤로, 떨어져 있든 붙어 있든 단 하루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 그걸 이제 자각했다.

어머니께서는 티테르와 가이드의 관계에 항상 명확한 구분을 요구하셨고, 정해진 규율 또한 그들을 가로막고 있지만 그게 세이아드의 감정까지 막을 순 없었다. 마음에 세워 둔 벽이 너무 많아 자신을 돌아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세이아드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자문했다. 서로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으면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세이아드는 당연하게도 자신의 가이드를 다른 이에게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제 것이다.

제 가이드고, 제 하나뿐인 작은 사슴이다.

현실적인 문제가 머리를 스쳤지만 세이아드는 일단 그것을 잠시 제쳐 두기로 했다. 당장 레사스가 보이는 언행이 자꾸만 불안한 탓에, 세이아드는 빠르게 그들의 관계를 정의하고 레사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 국왕을 비롯한 타인들의 개입 이전에 서로를 공고히 다지는 게 우선이었다.

레사스가 제 손을 잡아 주긴 했지만, 그는 아직 본인이 세이아드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죄인이니, 한심하니, 자신이 최악의 인간인 것처럼 두려워하며 말하던 걸 떠올리면 말이다.

곁에 와도 된다고 허락하자마자 그렇게 잡아먹을 듯 달려들어 놓고선.

세이아드는 아까 전의 정신을 놓을 듯한 입맞춤을 떠올렸다. 그간 제법 입을 맞춰 왔지만, 숨조차 쉬지 못하게 몰아붙이던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오두막에서 그의 첫 입맞춤을 가져갔던 때가 딱 이랬던 듯한데, 이제 보니 레사스의 방식은 아무래도 그런 쪽인 것 같았다.

적나라하게 혀를 빨며 온 숨을 앗아 가던 행위를 떠올리니 속이 간지러웠다. 등줄기를 타고 가벼운 전율이 일었다. 초점이 나간 보랏빛 눈에 온통 세이아드 자신만이 담기던 장면이 지나치게 퇴폐적이었다. 사방이 훤히 뚫린 정원에서의 입맞춤이었는데, 마치 밀실에 갇혀 그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화가 필요했던 건 세이아드 본인인데, 오히려 티테르인 저보다 이성을 잃고 달려들던 광경을 곱씹고 있자니 새삼 레사스가 많이 자랐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가 소년이 되고, 소년이 다 큰 남자가 되어 절 그렇게나 사모하고 있다는 게….

나비가 속에서 날갯짓을 하는 듯한 간지러움이 커졌다. 레사스를 생각하고 있자 입가가 점점 허물어지고, 서늘한 회색눈에 부드러운 빛이 돌았다. 아까까지도 같이 있었으면서 당장 그를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세이아드는 충동을 따르기로 했다. 잠시 마구간에 들러 루나의 등에 매어뒀던 라벤더를 챙긴 그는,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세이아드, 석찬이 준비 됐어. 시종이 널 찾고 있던데 여기 있었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스텔라와 마주쳤다. 피가 묻은 옷을 갈아입은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선선한 여름밤, 동부에 부모님과 함께 들러 스텔라와 어울리던 시간이 떠올랐다. 스텔라도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입술 위에 띠었다.

“옛날처럼 같이 들어갈까?”

“그래.”

살짝 장난기어린 목소리에 동의하며 세이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돌아온 뒤 레사스는 곧장 그를 보러 갔기에, 아마 석찬이 준비된 홀에 같이 있을 것이다.

“이러니까 어릴 적 생각이 나. 그때는 참 아무 걱정도 없었는데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하던 농담, 기억나?”

“너와 내가 결혼할 거라고 농을 자주 하셨던가.”

“응, 턱도 없는 소리셨지만 말이야. 아버지께서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지 보셨으면 그 말 못하셨을 텐데.”

스텔라의 아버지는 훌륭한 기사였는데, 아내인 셀피니를 도와 니르아를 처치하다 이른 나이에 숨을 거뒀다. 고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세이아드가 반문했다.

“너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른 적은 없던 것 같은데.”

“그런 거 말고. 나랑 놀고 있으면 항상 레사스 전하 이야기만 했잖아. 하루는 네가 너무 레사스 전하만 챙겨서 세실리아가 토라졌던 적도 있는데, 기억 안 나?”

스텔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말을 듣고나자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 세이아드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셋이 놀고 있는데 내가 전하께 드릴 여우를 잡겠다고 사라졌던 날 말이지.”

“맞아. 얼마나 서러웠는지 세실이 울면서 네 뒤를 따라다녔잖아.”

어린 세실리아는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는 꼬마였어서, 엉엉 울면서 숲으로 가는 세이아드를 뒤따르며 종알거렸다. 그런 세실리아를 스텔라가 달래 줬던 기억이 떠오르자 웃음이 짙어졌다. 이렇게 귀엽고 우스운 순간을 긴 시간 잊고 있었다.

“다시 이야기하니 좋다, 세이아드.”

저택으로 들어서 시종의 안내를 받는데, 스텔라가 조용히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치자, 스텔라 또한 마주 웃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네 옆에 있어 줄게. 티테르들 모두, 분명 그럴 거야.”

스텔라는 상냥하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로 약속했다. 세이아드가 알고 있던 스텔라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 한 제 행동으로 인해 그동안 이렇게나 좋은 친구를 멀리 하고 있었음이 와 닿았다. 깊게 파인 감정의 골이 대화와 용서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고, 마음 어딘가를 먹먹하게 했다.

혼자서 하는 것만 같았던 싸움에 믿고 의지할 동료가 있음이 비로소 느껴졌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막막했는데, 점점 길이 보였다. 악마는 더 이상 스스로를 숨길 기미가 없어 보였고, 모습을 드러낸 적은 오히려 죽이기 쉬우니, 세이아드가 할 일은 이제 검을 찾아 그것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어렵지만 간단했다.

“고맙다, 스텔라.”

진심을 담아 대꾸하자 스텔라가 웃었다. 거미줄처럼 그의 영혼을 감싸던 안개가 완전히 걷혀 나갔다. 세이아드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메인 홀에 들어섰다. 그러자 넓은 원형 식탁에 이미 앉아 있는 레사스와 사클라니 후작이 보였다.

무표정하다 못해 어딘지 서늘하게 보이는 얼굴로 후작과 이야기하던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오자마자 고개를 틀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가 없음에도 몸을 일으킨 그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그들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하얀 얼굴 위로 묘한 불안함이 이는 것이 보였다. 무엇이 또 레사스를 불안하게 했나 싶어, 그를 당장 껴안고 달래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오셨습니까, 악시드 대공. 베트리아 공작.”

충동을 막은 것은 후작의 인사였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종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이 자리를 안내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지난 삶과 이번 삶을 통틀어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지만,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그는 항시 웃는 낯을 하는 이였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샬로트에게 그대로 물려 준 초록색 눈이 의중을 알 수 없이 휘어져 있었다.

“전하와 막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던 중이었습니다. 별장인지라 식사 장소가 다소 초라하지만, 솜씨 좋은 요리사가 있어 가장 좋은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그의 여식과 얽힌 불미스러운 일을 모르는 것처럼 후작은 태평히 설명했다. 세이아드의 기분은 괜찮았으나, 후작을 그렇게 상대할 순 없는 일이라 표정을 지웠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세이아드는 후작의 옆에 앉았고, 스텔라가 레사스의 옆으로 갔다. 원형 탁자인 탓에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형태가 되었다.

네 사람만이 참석한 석찬 홀이 조용했다. 시종이 옮겨 오는 요리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세이아드가 본론을 꺼냈다.

“왜 우리를 이곳까지 불렀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후작의 청을 따라 살피러 간 숲에서 생긴 일을 고려한다면, 신중히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홀에 들어선 순간부터 스텔라 또한 매서운 눈으로 후작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스텔라의 관할인 동부의 일이라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나, 후작이 그들을 함정에 빠트리려 했음이 명백한 상황이었다.

후작은 덤덤한 얼굴로 그들을 훑더니, 마지막으로 레사스와 눈을 마주쳤다. 무척이나 레사스를 의식하는 티를 낸 후작이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저는 아스테르 전하의 명을 따라 세 분을 이곳까지 불렀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후작이 순순히 굽히고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발뺌을 하며 부정할 그를 상대할 계획이었던 세이아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스텔라도 이것은 예상치 못했는지 가늘게 눈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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