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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3)화 (3/257)

3화

서문세가는 무공으로 이름난 곳은 아니었지만 드높은 덕과 명망으로 유명했다. 서문이 자리 잡은 운한의 사람들은 배를 곯지 않는다는 말도 나돌았다.

천오는 그 집안의 외동딸 서문정혜가 낳은 아이였다. 미스터리하고 스릴 넘치는 외간 남자와의 연애 끝에 임신을 했지만 남편 될 사람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고, 정혜는 마땅한 결혼 상대도 찾지 못한 채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서문정혜와 조부모는 천오를 사랑하고 아꼈다. 천오는 가족들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만 자랄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르면 좋았을 아버지의 정체는 아이가 일곱 살이 되는 해에 강제로 까발려졌다. 서문세가가 가진 운한산(雲翰山)에 새로 발견된 야명주 광맥을 탐한 백협맹의 수작이었다.

백협맹은 서문세가의 약점을 잡기 위해 세가의 모든 구성원을 철저히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가까스로 정혜가 정을 통한 남자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는 바로 무림의 공적으로 여겨지는 마교의 소교주였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서문세가는 하루아침에 가문의 영달을 위해 마교에게 딸을 바친 간악한 무리로 낙인찍혔으며 변명할 틈도 없이 집행단의 무사 무리를 맞이했다.

백협맹의 집행단 50명은 순식간에 서문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내 내동댕이치고, 목창에 몸을 꿰뚫은 뒤 기름을 뿌려 산 채로 불태웠다. 서문의 유서 깊은 기둥을 꺾고 벽을 허문 뒤 구름 모양 지붕도 무너트렸다. 무릉도원 같다던 연못에는 독을 풀고 피가 섞이지 않은 잡부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다.

천오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 증조부모가 60년 전 우연히 만난 진법가의 도움을 받아 집 바닥에 은밀한 금고를 만들어 둔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늘 보니까 그 진법도 초윤이 만들어 준 것 같던데……. 원작에는 없던 내용이었지. 하여간 작가가 누군지 쓸데없는 설정도 많다니까.’

초윤은 흙먼지로 더러워진 명주 천을 조물조물 빨며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을 힐긋 보았다. 탁한 갈색의 토사물이 묻어 있어 다시 입긴 힘들 것 같았다.

이런 구토를 한 이유는 아이가 일주일 동안 먹은 양식이 풀과 곡물을 뭉친 구황벽곡단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서문정혜는 집행단의 무사들이 들이닥치자 지하 금고에 있던 물건을 꺼내 다른 곳에 숨긴 뒤 천오를 밀어 넣고 당부했다.

-이 아래에 있으면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할 것이다.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속으로 십만을 세거라. 그 전에는 절대 나오면 안 돼. 약속해 다오, 아가.

그리고 엉기어 오는 손을 뿌리친 뒤 문을 닫고 무사들의 앞으로 나선 서문정혜는 아이를 찾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아이의 행적을 말하지 않아 더욱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진법은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미숙한 기척을 완벽히 가려 주었다. 무사들은 결국 천오를 찾지 못하고 세가에 불을 지른 뒤 떠났다.

그렇게 서문정혜의 말을 받들어 한참 뒤에 밖으로 나온 천오가 가장 먼저 목도한 것은 멸문지화를 당한 세가와 혈육의 모습이었다.

천오는 그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며 복수를 결심한다. 얼마 뒤 자신을 데리러 온 마교의 손에 기꺼이 몸을 맡기고 살아남은 자가 없다는 일백여덟 개의 지옥으로 자신을 단련한다.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무협지 악역으로 거듭나 세상에 혈겁을 일으키게 되는 인물.

……이 〈귀환영웅〉 최종 보스 주천오의 배경 설정이었다.

그리고 초윤은 거창한 설정과는 달리 원작에서도 아주 쓸데없는 역으로 나오는 조연이었다.

‘하여간 툭하면 여캐들부터 죽이려고 하지. 위험에 빠진 예쁜 여자를 구해 주고 일방적인 선망과 사랑을 받고 싶단 로망이란.’

초윤은 주인공의 히로인 중 하나가 어쩌다 극독에 중독되었을 때 이를 구해 주고 사라지는 일회용 디버프 해제 서비스였다.

그 뒤로 초윤이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아직 연재 중인 소설이었으니 후반부에 등장할 예정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초윤에게 이만한 힘과 설정이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듯 찾아온 주인공에게 흥미를 갖는 떡밥도 있었으니 나중에는 주인공의 믿음직한 우군이 될 캐릭터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런 소설 속 만악의 근원 주천오를 충동적으로 냉큼 데려온 것은 시나리오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소설에 빙의를 했다면 그나마 쓸 만한 장점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 이것 하나뿐인데, 이마저도 스스로 망치고 만 것이다.

‘아니, 잠깐만.’

천오에게 새 옷을 입혀 주던 초윤의 손이 우뚝 멈췄다.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 얘가 마교로 가서 사파를 일통하고 염라군이 되는 일만 없으면 마교도 비교적 얌전하고 주인공도 순탄하게 부패한 무림을 뒤엎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초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아이를 보았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는 자신이 지금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솔직히 어린애한테 그런 훈련은 좀 많이 너무한 거 아냐? 아동 학대라고. 무협지는 아동 학대에 너무 무덤덤하다니까?’

복수야 물론…… 하고 싶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걸 굳이 마교에 들어가서 해야 할까? 이래 봬도 최종 보스인데, 마교의 도움이 없어도 복수 정도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약선 초윤은 현경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다. 반로환동(返老還童)과 반박귀진(返璞歸眞)을 넘어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이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초윤의 몸에 들어와 그의 모든 능력을 물려받은 정하윤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교대 졸업생이었다. 그러니,

‘아직 어디 부임도 해 본 적 없지만…… 아무튼 내가 더 잘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초윤은 아이의 옷에 옷고름을 매어 준 뒤 자세를 바로 했다. 부드럽게 자신을 보듬던 손길이 사라지자 내내 조용했던 아이가 신음 같은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뜨렸다. 초윤은 화들짝 놀라 아이의 상처투성이 손을 서둘러 잡아 주었다.

초윤은 아이를 바라보며 어렴풋이 기억나는 소설 속의 천오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뒤에서는 보글보글 약재 끓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천오는 입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미지근한 액체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초점이 흐렸지만 눈이 부시진 않은 것을 보아 어두운 실내에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느낌은 한 박자 늦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푹신하고 따듯한 것을 보면 어딘가에 감싸 안긴 채 기댄 것 같았다.

몽롱한 정신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입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와 혓바닥을 가볍게 눌렀다. 나무로 된 숟가락이었다. 천오는 반사적으로 목울대를 움직여 액체를 삼켰다.

“그래. 그렇게 마셔라. 억지로 깨어나지 않아도 좋다.”

아슴아슴한 와중 선선한 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오는 그에 몸을 맡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액체가 입 밖으로 흘렀지만 떨어지진 않았다. 볼에 가재 수건을 대고 있는 듯했다.

“더 자렴. 그래야 내가…….”

너 몰래 도착하지 않겠니. 뒷말은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을 수 없었다.

어쩐지 이전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다시 잠들기 전 천오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의 상황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천오는 천장이 달린 짐마차에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에게서는 지울 수 없는 약초 냄새가 났고, 기골이 장대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을 밟은 짐마차가 덜커덩 크게 흔들려도 천오에게는 아무런 충격이 없는 것을 보아 팔의 힘이 허술하진 않은 것 같았다.

생각이 뚝뚝 끊어졌다. 몸도 축축 무겁게 늘어져서 눈만 간신히 깜빡였다. 주위로 드리운 하얀 면사와 가느다란 백발이 수면 위의 물결처럼 일렁였다. 깨어난 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는지 정체 모를 사람이 천오의 등을 부드럽게 도닥이며 말했다.

“아직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다. 좀 더 자도 좋아.”

그 말을 들으니 다시 홍수처럼 잠이 쏟아졌다. 천오는 그에 반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마음이 편안하고 잠잠하기만 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을 해야 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이대로도 전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천오가 정말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한낮의 오수를 만끽한 것처럼 기분 좋은 나른함이 온몸에 퍼졌다. 산새와 풀벌레가 찌르르 울고, 물이 흐르는 개울 소리도 가까이서 들려왔다. 코끝에는 습하고 깨끗한 나무의 공기와 약 향(藥香)이 느껴졌다.

천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뒤늦게 올라온 따끔한 감각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천으로 꼼꼼하게 싸매 둔 양손이 눈에 들어왔다. 약초와 꿀 냄새가 나는 걸 보아하니 안쪽에 고약을 바른 것 같았다.

천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워 있던 자리를 비롯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그만 방의 한쪽 벽에는 천장까지 빼곡한 약재 서랍장이 있었다. 칸마다 쓰여 있는 한자는 천오가 아직 배운 적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약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머리맡에는 대나무로 살을 덧댄 창문이 있었고, 발치에는 책자와 등잔이 올라간 낮은 반상이 있었다. 바닥에 깔린 이불이고 모든 집기가 전부 소박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귀해 보이는 것이라고는 약재 서랍장 옆에 서 있는 금 한 대뿐이었다.

고상하고 부유한 집에서 자란 천오에겐 당연히 낯선 광경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말하려 했지만 숨이 목에서 콱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칼칼하게 갈라진 바람 소리가 픽 새어 나와 천오를 당황스럽게 했다. 제 목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덜컥 겁이 나는 마음에 목을 더듬었지만 다친 손만 아플 뿐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

그때, 나무 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낯선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 깨, 깼다. 누나, 얘 깼어.”

“깼네? 야, 왜 일어났어. 다시 누워.”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제각기 손에 대야와 상을 든 두 명의 아이였다. 흰색 무복을 입은 소년과 소녀가 쫑쫑 걸어 천오의 자리까지 다가왔다.

천오는 순식간에 그들의 손에 잡혀 다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자, 잠깐 있어 봐. 너…… 마, 많이 다쳐서 약재를 갈아 줘야 해.”

“조금 아플 수도 있지만 잘 참아 봐.”

“누나, 오, 옷을 아예 벗길까?”

“그래. 야, 가만히 있으라니까.”

아차 하는 사이에 후루룩 옷고름이 풀리고 상의가 벗겨지며 마른 몸이 드러났다. 두 명의 힘이 어찌나 좋은지 잡힌 손을 빼내려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오의 손에서 무명천을 풀어내고 끈적한 고약을 천으로 닦아 주며 둘만 아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역시 스승님 약이 좋아. 벌써 이만큼이나 나았잖아.”

“휴……. 흉도 안 질 것 같아. 다행이다…….”

“정말 말씀하신 시간에 깼네. 배는 안 고파?”

“미, 미음…… 끓여 왔어. 먹어. 수…… 숟가락 들기 힘들면 먹여 줄게.”

“무릎이랑 다리는 어떡하지? 벗길까?”

손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아픔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천오가 마지막 말에 깜짝 놀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놀란 당사자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들은 둘이서 서로를 바라보며 옷을 벗기네 마네 상의하고 있었다.

“안…….”

안 해도 괜찮습니다. 천오는 차분하게 그들의 재기 발랄함을 막아 보려 했다.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가에서 들려온 또 다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시선을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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