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직 말하지 말거라. 목이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소슬바람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천오는 이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한 손으로 문틀을 잡고 선 사람의 뒤에서 시원한 산바람이 들어왔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하늘거렸다. 그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걸음으로 사뿐사뿐 안쪽에 발을 들였다.
“사영, 사현. 손이 끝나면 먹고 싶은 것으로 저녁거리를 구해 오렴. 나머지는 내가 하겠다.”
“예, 스승님.”
소녀와 소년은 명랑하게 재잘거렸던 조금 전의 일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입을 다물고 빠르게 처치를 마무리 지은 뒤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막 들어온 백발의 남자는 그들의 뒷모습을 힐긋 보더니 천오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눈썹과 속눈썹까지 희게 반짝이는 색이었다. 표정은 희미했지만 생김이 단정했고, 연갈색의 두 눈에는 차분한 현기가 가득했다. 그저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천오에게 적갈색의 투명한 액체가 담긴 사발을 내밀었다.
“일어나서 마셔라. 목이 한결 나을 게다.”
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선 머뭇머뭇 양손으로 사발을 받자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반신반의하며 한 모금 넘겨 보니 가벼운 단맛이 느껴졌다.
천오가 탕약을 조금씩 마시고 있을 때, 남자는 이불을 헤쳐 천오의 두 다리를 꺼내더니 허벅지까지 하의를 걷어 올렸다. 다녀갔던 아이들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말 다리에도 손과 같은 치료가 되어 있었다.
남자는 능숙한 손길로 천오의 다리에 비슷한 처치를 해 주며 말했다.
“나는 초윤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약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이곳은 두망산에 있는 내 집이다.”
“…….”
천오의 궁금증을 전부 꿰고 있는 것 같은 말이었다. 천오는 다 비운 사발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초윤의 말을 경청했다.
“너는 심신을 전부 심하게 다쳐 정신을 잃었다. 어딘가에 맡기기엔 마땅치 않아 이리로 데려온 참이다. 몸이 다 낫거든 갈 곳을 말하렴. 딱히 없다면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
다쳐? 어째서?
의문을 갖는 순간 벼락처럼 기억이 내리꽂혔다. 어두운 지하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쉴 새 없이 들려오던 고통스러운 비명, 바닥의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뜨거운 화마, 어머니의 말을 따라 십만을 세고 바깥을 나갔을 때 목도했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너무 세차게 박동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끝과 발끝에서 싸악 피가 빠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뇌는 뻣뻣하게 굳어 단단해졌고, 목구멍 뒤쪽에선 가시 같은 응어리가 몸을 불렸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 한없이 믿을 수 없고 죄스러웠다.
몸에 담기 힘들 정도의 감정이 몰아쳐 속절없이 휩쓸리기 직전, 천오의 새까맣게 죽은 눈을 가리고 품에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천오는 그 품에서 몸을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손을 들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려 했지만 다친 상처를 염려하는 것인지 훨씬 큰 손이 역으로 작은 손을 감싸 쥐어 왔다.
소리를 지르며 발광하고 싶었다. 차라리 다시 혼절할 때까지 울고 싶었다.
하지만 목은 망가졌고, 몸은 단단히 붙잡혔다. 눈물은 나지 않았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폭신하게 쌓이는 첫눈처럼 내려앉는 목소리가 있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네가 기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는 것도 만만찮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지. 하지만 한 번 그렇게 울고 나면 네 안에 무언가 뚫리는 게 있을 것이다.”
천오는 가쁘게 헛숨을 삼키며 끅끅거렸다. 초윤이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내 옷을 쥐어뜯고 소리치며 발을 굴러도 좋으니 그리 울 수 있도록 먼저 몸을 회복하지 않겠느냐. 네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그 뒤에 생각하자꾸나. 힘겨울 테니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렴. 네 탓을 할 사람은 없다.”
이상하게도 그의 말은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정말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아무도 자신의 탓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자신을 이대로 지켜 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생기든 이렇게 안아 줄 것 같았고, 모든 일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악몽을 꾼다면 깨워 주겠지.
천오는 다시 한번 정신을 놓고 까무룩 잠들었다.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아이의 입에 초윤이 직접 미음을 흘려 넣어 준 것은 천오가 평생 모를 일이었다.
◇
“스, 스승님, 그런데 저기…… 누구예요?”
“어디서 데려오신 거예요? 분위기가 영 이상하던데.”
산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초윤의 뒤로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초윤은 뒷짐을 진 채 험한 산길을 가볍게 내려가며 말했다.
“일어나면 직접 물어보려무나. 당사자가 없을 때 함부로 신상을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그, 그렇지만 보, 보름은 말…… 못 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게다가 저희들이 가면 무슨 생선 같은 눈으로 입을 딱 다물어요. 대꾸도 안 해요! 지 잠들어 있을 때 닦아 주고 입혀 준 게 누군데 은혜도 모르고.”
“어린 나이에 힘든 일을 겪어 그런다. 너그럽게 이해해 다오. 회복만 된다면 금세 너희들을 부르며 뛰어다닐 게다.”
초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을 어르며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만을 이야기하던 사영과 사현은 조금 토라진 듯했으나 곧 마음을 풀고 초윤의 곁을 걸었다. 데면데면하던 아이들과 며칠 사이 같은 사람을 돌보며 꽤 친해진 것 같았다.
초윤은 흐뭇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미끼를 내밀었다.
“그래서 말인데, 보신을 위해 윤폐환과 닭을 먹여야겠다. 내려가서 잘 자란 놈으로 네 마리를 사 오련. 남은 돈으로는 군것질을 하고 와도 좋단다.”
“군것질!”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초윤을 올려다보았다. 초윤은 품에서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누나인 사영의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소매치기를 당하면?”
“찾으려 하지 말고 돌아옵니다!”
“어른이 시비를 걸어오면?”
“응대하지 않고 벗어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너희를 끌고 가려 하면?”
“손가락을 물어뜯거나 급소를 때리고 도망칩니다!”
“마지막으로?”
“조심해서 다치는 일 없이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아이가 초윤에게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한 뒤 쏜살같이 산을 내려갔다. 저 멀찍이서 뒤를 돌아보며 손을 붕붕 흔드는 아이들에게 초윤도 살짝 손 인사를 해 주었다.
아이들의 인영은 금세 사라졌지만 그들이 내려가는 기척은 초윤의 예민한 기감에 선명히 느껴졌다. 활달한 움직임이 귀엽게 느껴져 미소를 짓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사영과 사현은 약선 초윤의 제자로 들어온 열한 살, 아홉 살 아이들이었다. 부모를 잃고 거리에서 떠돌던 남매를 초윤이 거두어 3년 전부터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다 좋은데, 아니, 좋진 않은데. 아무튼 기억을 한꺼번에 떠올릴 방법은 없는 건가? 일이 닥쳐야 알게 되니까 당황스럽단 말이지. 이백 년 가까이 되는 기억이 한 번에 업데이트 되면 그것도 문제인가?’
“아, 만병초다. 이게…… 진통 해열부터 신기 허약까지 잘 쓰이지. 독하지 않아서 많이 먹어도 괜찮고.”
커다란 진달래나무 같은 만병초가 눈에 들어오자 마치 자신이 외운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 약재의 효능이 속속들이 생각났다. 맹세컨대, 이 나무를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지식이었다.
초윤의 방대한 지식은 이런 식으로 일종의 방아쇠가 되는 일이 있어야만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떤 증상을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약재의 배합이 떠올랐고, 손길이 닿은 물건을 보아야 그것에 얽힌 일들이 생각났다.
덕분에 기억이 마구 뒤엉키는 일은 없었지만 당황스러운 일은 종종 일어났다.
“여관에서 눈뜨자마자 이미 키우는 애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으면 얼마나 좋아……. 애 키우는 데 필요한 게 이만저만이 아닌데.”
초윤은 투덜거리면서도 벌레 먹지 않은 만병초 잎을 착실하게 따서 소매에 넣어 챙겼다.
정하윤이 초윤의 몸으로 눈을 뜬 것은 어느 허름한 여관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생각하자 운한산의 청명 여관이라는 것이 떠올랐고.
왜 여기에 있지, 생각하자 가까운 운한산의 온갖 약초가 떠올랐다.
정하윤의 의식이 떠오른 건 그 뒤였다.
생각보다 혼란스럽진 않았다. 요즘 웹소설에 비슷한 개요로 시작하는 작품이 넘쳐서 그런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이해가 갔다. 정하윤은 조금 멍한 기분으로 침상에 앉아 초윤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여관과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참극과 그곳에 있을 원작 속의 인물이, 초윤의 기억과 정하윤의 지식이 뒤엉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운한산 아래, 서문세가의 비호를 받고 있던 마을은 서문이 뒤집어쓴 불길이 자신들과 같은 일반인에게도 끼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초윤이 이곳에 막 도착한 전날에도 분위기는 어수선했던 것 같았다.
만약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정말 초윤이었다면 자신이 상관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떠났겠지만, 그곳에서 막 눈을 뜬 정하윤은 그럴 수 없었다.
설마 이곳이 정말 〈귀환영웅〉인가 싶어 긴가민가하며 찾아가 본 곳에 쐐기를 박듯 주천오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서 치료할 곳’으로 두망산에 있는 자신의 집, 무심서(霧深墅)가 떠올라 이곳까지 데려왔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스승님을 외치는 아이 둘이 뛰어나왔을 땐 정말 당황스러워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애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육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크는 존재가 아니다. 정하윤은 보육의 중요성과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졸지에 세 아이를 키우게 되었으니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누르는 느낌마저 드는 것 같았다.
초윤은 신선놀음을 하고 있어서 정도가 덜할 뿐 현대인인 정하윤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미 아동을 방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단은 돌아가자. 어린애를 혼자 오래 둘 순 없지.”
얌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나오긴 했지만 자고로 육아란 마음을 놓으면 안 되는 법이다. 초윤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소매를 부풀리고 내려온 산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망산의 험한 산세는 이미 자신의 집인 양 익숙했다. 제집이 맞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