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다녀왔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이거 봐.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고 했지.
저 밑에서부터 알아차렸지만 아이는 그새 깨어 있었다. 초윤은 허술한 담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나직하게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올게요. 이런 건 기본으로 하도록 해야지.’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목이 나을 때까지는 말을 하지 말라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천오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기도 했다.
초윤은 먼저 나무 문을 열고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를 산발한 작은 아이가 오도카니 침상에 앉아 있었다. 초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일어났구나. 목의 상태는 괜찮더냐. 가슴은 답답하지 않았고?”
초윤은 침상 옆에 앉아 아이의 손목과 목을 가볍게 짚었다. 경혈에서 전해지는 작은 진동과 기운으로 아이의 상태를 짐작하고 뒤이어 마른 등의 이곳저곳도 꾹꾹 눌렀다.
천오는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눈을 바닥의 어딘가에 고정한 채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교사란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도 끈질기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초윤은 작은 서랍에서 나무 빗을 꺼내 아이의 머리카락을 빗어 주며 조곤조곤 말했다.
“사영과 사현은 저녁거리를 사러 산을 내려갔다. 당분간은 네 기운을 보하기 위하여 계탕(鷄湯)을 쓸 생각이다. 못 먹는 것이나 좋아하는 맛이 있다면 최대한 맞추어 볼 터이니 지금 말하거라.”
“…….”
“환을 먹을 몸이 된 것 같으니 내일부터는 탕약과 함께 환약도 주도록 하겠다. 떫고 신맛이 나겠지만 입에 머금고 녹여 먹어야 네 갈라진 목을 적시고 내려갈 것이다.”
아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초윤은 아이의 산발이 된 머리를 묵묵히 빗어 준 뒤 흰 명주 끈으로 단정한 반묶음을 해 주었다. 이전에 사영과 사현의 머리를 만져 주며 알았지만, 초윤은 꽤 손재주가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이렇게 잘하면서 애들 머리를 그따위로 둬? 하여간 칼밥 먹는 놈들이란.’
초윤은 입술을 비죽 비틀며 속으로 스스로를 타박했다.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보았던 남매의 잔뜩 뒤엉켰던 머리카락을 생각하니 ‘초윤’의 방치형 교육이 생각나 불만스러웠다.
물론 ‘초윤’은 그저 아이들의 머리를 만져 주는 법도, 필요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었을 뿐이지만 그건 정하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애들을 냅뒀으면 머리 좀 빗어 줬다고 그렇게 좋아해. 단정한 머리를 하고 기뻐하던 사영과 사현을 생각하니 괜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제부터 잘해 주면 되는 일이지.’
초윤은 생각을 정리하고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계속 앉거나 누워만 있는 것도 그리 좋은 회복 방법은 아니다. 너만 괜찮다면 나를 도와주지 않겠느냐.”
아이에게서 처음으로 반응이 돌아왔다. 초윤은 자신을 물끄러미 돌아보는 천오의 새까만 눈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고로 의기소침한 어린아이에게 가장 잘 듣는 처방은 자기 주도형 감각 체험 학습이라고 했다.
◇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온 아이는 걷는 게 조금 버거운 듯 비틀거렸다. 초윤은 자연스럽게 아이의 옆에 서서 어깨를 잡아 기대게 했다. 그리고 눈이 부신 듯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에게 말했다.
“이 앞에 햇빛이 좋은 곳을 봐 둘 테니 마당에서 돌돌 말려 있는 대나무 돗자리를 찾아오거라. 무릎이 덧나면 큰일이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아이는 별다른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비틀비틀 돗자리를 찾으러 갔다. 초윤은 그런 천오를 보며 내심 생각했다.
‘도와 달라는 말에 반응하는 걸 보면 그렇게 나쁜 애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하긴, 원작에서도 주천오는 ‘멋진 악역’이었다. 고강하고 냉철하지만 비열하지는 않은 인물. 오히려 더러운 수작으로 주인공을 방해하려 하는 수하를 제 손으로 죽인 적도 있었다. 그만한 카리스마와 나름의 신조가 있었고, 백협맹과 정파 무림을 증오해 반대의 길을 걷게 된 이유도 충분했다.
‘그러면 역시…… 잘 키워 보면 악역까지는 안 되지 않을까? 어릴 때 교육이 평생의 성격을 좌우하는 거잖아.’
초윤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몸으로는 나무 사이로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았다. 사실 이리로 오는 길에 이미 봐 둔 곳이 있었다. 울타리 바깥, 조금 걷다 보면 있는 평평한 바위였다.
마침 오전의 선선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초윤은 한 몸에 햇빛을 받으며 아이를 돌아보았다. 대나무 돗자리를 한 아름 품에 안은 천오가 아슬아슬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커다랗고 새까만 눈이 자신에게 날아와 박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장 순수하고 본능적인 어린아이여서 그런 건가. 초윤의 가슴 한구석이 어쩐지 불안한 것처럼 술렁였다.
초윤은 내색하지 않고 아래에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이곳에 돗자리를 넓게 펼쳐 보거라.”
천오의 발이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바닥을 디뎠다. 신은 단화가 조금 큰 것 같기도 했다.
‘사영이가 여덟 살 때 신었던 신발이라 그런가? 하긴, 저 나이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지. 산길에 넘어지면 큰일이니까 조만간 발에 맞는 걸 구해 주든 해야겠다.
아이가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초윤이 오두막을 뒤지고 뒤져 겨우 찾아낸 것이었다. 아직 일곱 살인 데다가 바짝 마른 천오에게는 헐렁하게 클 터였다.
초윤은 아이를 주시했다. 올바른 자립심을 길러 주기 위해선 힘들어 보인다고 아이의 일을 마음대로 뺏어 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천오는 불안한 걸음걸이로도 어찌어찌 잘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둘 사이의 거리가 일 장으로 가까워지고, 아이의 조그만 발이 초윤을 감싼 햇빛의 테두리로 들어왔을 때.
타악─
험한 산길이 결국 일을 냈다.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걸까. 천오의 발이 돌부리에 걸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 길에 철퍼덕 넘어지면 거의 다 나은 무릎과 정강이가 덧날 게 틀림없었다. 천오는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다가올 아픔에 대비했다.
하지만 중심을 잃은 몸에 닿은 것은 딱딱한 바닥이 아니었다. 어느새 천오의 앞에 선 초윤이 넘어지는 몸을 받아 주고 있었다.
“신이 큰 것 같구나.”
초윤은 칭찬의 뜻을 담아 아이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넘어지면서도 아이가 품에서 놓지 않은 대나무 돗자리를 자연스럽게 넘겨받아 바위 위에 넓게 펼쳤다.
“이리 오렴.”
아이가 가까이 오자 초윤이 소매 안에 넣어 온 만병초 잎을 돗자리 위에 우수수 뿌렸다. 아이는 조금 놀란 건지 표정 없는 얼굴에 눈만 몇 번 껌벅였다. 초윤은 나뭇잎이 이룬 산을 대충 손으로 흩트리며 말했다.
“만병초 잎이지. 쓸 곳이 많아 말 그대로 만병초(萬病草)다. 이파리는 따로 석남엽(石南葉)이라는 이름이 있단다. 여름철에 하얀 꽃이 피며 두견화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두견화를 본 적이 있느냐?”
“…….”
“이렇게 햇빛 아래 잘 말려서 보관하는 생약이다. 하나하나 빛을 못 받는 잎이 없도록 잘 널어 보아라. 힘을 주어 잡으면 잎이 상하니 살살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손을 많이 다쳤으니 말이야. 초윤은 마냥 조용한 아이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잠시 멈춰 있는가 싶더니 바위 앞으로 주춤주춤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진녹색의 나뭇잎을 하나하나 대나무 돗자리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초윤은 나름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섬세한 손을 갖고 있구나. 도움이 되겠어.”
도대체 ‘아유, 우리 귀염둥이 꼼꼼하게 잘하네.’가 어떻게 하면 이 말이 되냐고. 이게 최선인 거냐, 약선?
초윤이 입 안쪽의 살을 꽉 깨물었다. 그래도 듣는 아이의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으니(정확히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 같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초윤은 아이가 정리하고 있는 반대쪽부터 약초를 정리하며 말했다.
“여름에 꽃이 만발하면 좋은 향기가 나서 향수(香樹)라고도 하는 식물이다. 키는 나보다 두 배는 더 크며 사시사철 푸른 잎이 특징이지.”
“…….”
“온 세상이 눈에 뒤덮여도 이 나무는 홀로 푸르게 살아 있어 눈에 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으니 만병을 치료하는 약초가 되었겠지.”
그 밖에 효능은 쇠약해진 기력을 찾고 비장과 위장을 보하고 관절의 염증을 치료하고 통증과 열을 식혀 주고…….
초윤의 약초 오타쿠 같은 말이 한참 이어졌다. 애한테 동화책 대신 전문 약학 서적을 읽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과연 재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한번 약으로 운을 떼니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약초가 전부 정리되었을 때는 초윤이 만병초의 아종 두 가지까지 줄줄 설명을 마친 뒤였다. 제 소임을 마치고 손을 거두는 아이를 보며, 초윤은 일각 만에 약초가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이만하면 됐다. 기력이 충분치 않을 땐 햇볕을 쬐는 것도 힘들 테니 들어가자꾸나.”
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봐, 아이 기운 돋우는 데에는 자기 주도형 감각 체험 학습이랬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초윤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잠시 놀란 듯 굳었던 아이는 곧 초윤의 품에 안정적으로 몸을 맡겼다.
‘이제 들어가서 죽 먹이고 다시 재워야지.’
이런 식으로 하루에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초윤의 희망 가득한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