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사저가 싫어하더라도 같이 돌아가는 편이 나았을까.
지금은 일단 물러나자는 마음으로 순순히 남겨지긴 했지만, 스승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혼자 다니지 말라고 말했다. 우호 관계의 조성에는 문제가 됐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덜 막막했을 터였다.
……아니지, 그것도 마냥 좋은 방법은 아니다.
뒤늦게 합류한 자신이 본래 있던 제자들만큼 소중하다고 단언할 순 없다. 첫 분란은 예상했던 거라고 쳐도, 그 둘과 계속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며 문제를 일으킨다면 스승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천오에게는 이곳밖에 없고, 매달릴 곳도 그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애착을 가진 아이들이 있었다.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벌써 큰 문제가 두 번이나 터졌고 둘 다 자신이 원인이었다.
천오는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발치를 응시했다. 음험한 발상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바닥에 처박히고, 우울한 생각은 먹처럼 마음을 물들였다. 의식 깊은 곳에서 숫자를 세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무심서의 약초 냄새 나는 방이었으면 좋겠다. 막무가내로 떼를 쓰듯 원하는 것만 자꾸 떠올랐다. 스스로를 우습게 여기며 물먹은 솜옷처럼 늘어지는 눈을 감았다.
그때, 토굴의 안쪽에서 자갈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오는 화들짝 깨어나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돌렸다. 깜깜해서 다 들어가지도 않은 토굴의 저편에 둥실둥실 떠 있는 두 개의 붉은빛이 보였다. 그게 무언가의 눈이라는 사실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도망가야 한다.’
본능이 알렸다.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으며 토굴의 입구를 등지고 일어났다. 하지만 아픔조차 마비된 발목이 뒤늦게 지끈 울리는 바람에 뒤로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이어 다 낫지 않은 정강이와 무릎까지 아파 왔지만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눈도 떼지 않은 채 바닥을 짚어 천천히 물러났다.
그러다 한 손을 품에 넣어 사저가 던지고 간 비도를 꺼내 들었다. 얇은 날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빗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두 눈과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물러서는 만큼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우리를 뚫고 튀어나올 듯 뛰는 심장과 끝도 없이 거칠어지는 자신의 숨이 느껴졌다. 잘그락, 잘그락, 네 개의 발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의 발이 그늘 속에서 희미한 양지로 나왔다. 금속처럼 빛나는 날카로운 발톱과 주름이 잡힌 세 개의 발가락은 흔한 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번들거리는 눈에는 미물을 향한 잔인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뒤를 짚던 천오의 손바닥이 토굴의 입구에 닿았다. 천오는 등 뒤의 경사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손에 밀린 몇 개의 돌 조각이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무섭지는 않았다. 천오는 목숨이 위협당해 무섭다는 감정을 몰랐다. 눈에 보이는 죽음을 앞두고 몸이 멋대로 반응할 뿐, 머리는 차갑게 돌아갔다.
아무래도 경사 밑으로 몸을 던지는 게 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더 가까워진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천오의 손보다도 큰 이빨이 뾰족하게 들어차 있었다. 괴물이 바닥을 짚고 목을 쭉 내밀었고, 천오는 그와 동시에 뒤로 몸을 기울였다. 굴러떨어질 수 있도록 바로 몸을 웅크리자. 나무를 잡을 수 있도록 정신은 꼭 차리고 있자. 계획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눈을 감은 몸에 와 닿은 건 각오했던 바닥의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감촉이 아니었다. 여러 번 느껴 보았던, 애타게 기다렸던 품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천오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비도를 놓치고 양손을 뻗어 스승의 옷을 붙잡았다. 물에 젖은 약 향이 물씬 올라왔다.
초윤의 팔과 소매가 천오를 감쌌다. 단정하며 차가운 손은 아이의 조그만 머리통을 붙잡아 두 귀를 막았다. 한순간 바람 같은 무언가가 지나갔을 때, 아이를 위협하던 괴물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초윤은 아이를 안고 토굴의 안으로 들어간 뒤 허벅지에 작은 몸을 앉혔다.
“아가, 천오야. 다친 데가 있느냐?”
몸이 얼음장 같구나. 스승은 명백히 동요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천오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올 것이다, 올 것이다 생각하긴 했지만 이 넓은 산의 조그만 구멍에 틀어박혀 숨어 있는 자신을 찾아낸 그를 막상 마주하니 이유 모를 벅차오름이 느껴졌다.
자신의 볼과 손을 문지르는 그의 손이 천천히 따듯해졌다. 닿아 오는 흰옷은 그새 보송보송했다. 스승의 몸이 비에 젖어 차갑게 식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언가 수를 쓴 듯했다. 천오는 전해지는 온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퍼뜩 입을 열었다.
“그것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면 내쳐질지도 몰라.’
문득 든 생각에 열었던 입을 한 번 꾹 다물고, 말을 고쳐 다시 얘기했다.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
스승이 가만히 시선을 마주쳐 왔다. 햇빛 아래에서 황금색으로 반짝이던 그의 눈은 날이 어두워지자 그늘진 연갈색이 되었다. 속으로 켕기는 게 있는 천오는 침묵의 추궁이 계속되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따듯해진 그의 손이 갑작스레 다친 발목에 닿았다.
“……!”
“다치지 않았다면서.”
가까스로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고통에 몸이 굳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스승이라면 어렵지 않게 눈치챘을 게 뻔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천오의 눈이 갈팡질팡 갈지자를 그리다가 조용히 밑으로 떨어졌다.
어떡하지. 거짓말을 한 게 되어 버렸다. 그것도 이렇게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아, 스승이 한숨을 쉬는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불호령까지는 아니어도 질린다는 듯한 꾸중을 들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을 끌어안고 연신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다, 아가. 정말 다행이야. 얌전히 잘 숨어 있었구나. 하마터면 잃어버리는 줄로만 알았잖니.”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서 나왔다. 천오는 조금 당황한 채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지만 곧 포옹이 풀어져 아쉽게 손을 놓았다. 스승은 겉옷을 벗어 자신에게 둘러 준 뒤 조그만 몸뚱이를 가볍게 들어 맨바닥에 앉히며 말했다.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 내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너는 잘했다, 천오야. 정말 잘 버텨 주었구나. 무서웠을 텐데 기특하게도.”
잘했다고? 내가?
무엇을?
영문을 모르겠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승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오의 다친 발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다시 눈을 마주쳐 왔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고아한 얼굴에 희미하게 떠오른 절박한 빛은 착각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천오야.”
“……예, 스승님.”
비 쏟아지는 소리가 이렇게 울리는데도 선명하게 들리는 소슬바람 같은 목소리.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둡기만 한 곳에서 한없이 밝고 뚜렷한 신형. 물비린내에 섞인 탕약 냄새와 발목에 닿는 건조한 온기.
이상한 기분이다. 목구멍이 울렁거리고 속은 메슥거리는 것 같지만 결코 불쾌하지 않다. 어둡고 음산하고 갑갑하기만 했던 토굴이 이 사람 하나 나타났다고 이제는 안락하게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 괴물이 있던 자리를 확인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스승이 있는 이상 자신은 누구보다도 안전할 테니까.
“어떠한 사실이든 내가 그렇게 알고 있기를 바란다면 믿어 주겠다.”
“……예, 스승님. 죄송합니다.”
침을 한 번 삼켜 술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낯을 들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스승의 손을 통해 발목으로 무언가 따듯한 것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온기와는 다른, 명백히 물질감을 가진 것이었다.
빨갛게 부어올라 두근두근 맥동하던 발목은 금방 가라앉았다. 아픔도 한결 가신 것 같아 신기한 마음에 저절로 눈이 갔다. 슬그머니 시선을 든 그때, 스승이 마치 알아차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다만 아픈 것을 숨기지는 말거라.”
“…….”
“다친 것은 폐가 아니야. 약속하렴. 어떤 일이 있어도 내게 이런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고.”
말을 마친 스승이 입을 다물고 자신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 말이 자신의 평생을 옭아맬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던 천오는 낙원이 펼쳐진 절벽에 몸을 내던지는 심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습한 공기 중으로 흐트러지는 목소리는 목줄이 매인 사람처럼 작고 가여워서 스스로에게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예, 약속하겠습니다. 아프거나 다친 것을 스승님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바라던 답을 들은 스승의 눈이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들어오는 빛은 어둡기만 하고 표정의 변화는 미미했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스승은 곧 다시 자신의 작은 몸을 안고 품에 기대기 쉽도록 토굴의 벽에 등을 기울이며 말했다.
“비는 금방 그칠 것 같다. 몸이 더 젖으면 고뿔에 걸릴 게 뻔하니 조금만 기다렸다 가자꾸나. 고단할 테니 이만 자도 좋단다.”
이대로 잔다니 말도 안 된다. 천오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필사적으로 수마에 저항했다. 하지만 천천히 등과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은은한 온기에 지극히 안도한 마음은 쉬기를 바랐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오의 숨소리는 새근새근 고르게 변했다. 스승의 흰 옷자락을 꼭 붙잡은 작은 손은 초윤이 아이를 안고 무심서로 돌아갈 때까지 풀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