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번에 오신 손님들은 아주 중요한 분들이야. 혹시라도 실수를 한다면 어떤 치도곤을 당하게 될지 모른단다. 남은 음식이라면 그냥 줄 테니 영업이 끝나면 다시 오겠니?”
“아…….”
이런, 이렇게 나오면 조금 곤란했다.
차라리 몰래 주방을 가로지를 걸 그랬나. 사영은 조금 후회하며 양손을 모아 잡고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죄송스러워서…… 물 긷는 일이라도 하면 안 될까요? 식당이나 객실에 가까이 가지 않고 뒤뜰에서만 움직일게요. 빨래와 설거지도 할 줄 알아요.”
“음……. 그래, 그건 괜찮겠다.”
주방 뒤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숙수가 사영을 데리고 설거지감이 쌓여 있는 구석으로 갔다.
“여기 있는 그릇과 수저들을 씻어 주면 돼. 깨지지 않게 조심하고, 꼭 다 끝낼 필요는 없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았지?”
“네, 아저씨! 감사합니다!”
일을 시켜 줘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아이를 반쯤은 대견하게, 또 반쯤은 안쓰럽게 바라본 숙수는 사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사영은 의기양양하게 지었던 표정을 지우고 넓적한 나무통에 지저분한 식기를 담아 낑낑거리며 다시 뒷문으로 나갔다.
어느 정도 고급스러운 객잔은 객잔 내부에 연못을 조성해 두는 일이 흔했다. 그 정도의 수로를 조성할 자금이 있으면 주방 가까운 곳에도 물을 끌어와 개울을 만들어 두었고, 그것은 풍랑객잔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영은 뒤뜰의 구석에 있는 작은 개울에서 고사리손으로 열심히 설거지를 하며 눈알을 바쁘게 굴렸다. 장위의 행방을 찾기만 해도 어려울 판에 이런 잡일을 떠맡은 것은 나름의 노림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오면 반드시 붙잡는다.’
최소 열 명 남짓은 왔을 테니 그중 한 명쯤은 뒤뜰까지 오겠지. 풍랑객잔은 조경을 잘해 놨기로 유명하니 산책을 하다가 여기까지 올 수도 있겠지.
운에 희망을 건 사영은 차가운 물에 손이 얼어도 열심히 그릇을 닦았다.
그리고 나무통에 그릇을 한가득 담아 주방을 세 번이나 들락날락했을 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저 사람이다.’
남궁세가의 상징인 우아한 하늘색과 고급스러운 남색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훤칠한 남성이 저벅저벅 뒤뜰로 들어왔다. 칼자루에 세 개의 금술과 옥으로 된 패가 달려 있는 것을 보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사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길을 잘못 든 것을 깨닫고 발걸음을 돌리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서선 뒤를 돌아보았다.
“…….”
남자는 뜰의 구석에 있던 사영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사영은 헤벌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시선을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신기해서 그만…….”
당황한 것처럼 말을 더듬고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순진해 보이는 반응에 흥미를 가졌는지, 고개를 푹 숙인 사영의 시야에 남자의 장화가 들어왔다.
위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어느새 사영의 앞까지 다가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 사과를 할 필요까지야. 그나저나 무엇이 그리도 신기했기에 사람을 보며 넋을 잃느냐?”
“그것이…….”
공교롭게도 남자는 사영이 제일 싫어하는, 동시에 이번 일에 가장 필요했던 유형의 사람이었다.
의도하긴 했지만 잠깐 쳐다본 걸 또 ‘넋을 잃었다’고 표현하냐. 자화자찬도 정도껏이지. 사영은 속으로 남자를 욕하며 빨갛게 곱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오늘 오신 손님들께서 무림인 중에서도 굉장하신 분들이라고 하는 것을 어쩌다 들었습니다. 산적 따위는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는, 아주 강하고 의로운 분들이시라고…….”
“하하! 겨우 산적 나부랭이에 비교하다니!”
챙⎯!
광소를 터트린 남자가 갑자기 허리춤에 매여 있던 패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빛을 흩뿌리는 검이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사영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이런 미친 새끼!’
민간인, 그것도 어린아이 앞에서 사사로이 검을 뽑다니!
하지만 경멸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됐다. 사영은 딱 봐도 비싼 것 같은 검에 경탄하는 것처럼 홀린 얼굴을 했다.
“와아…….”
“자, 보거라. 고작해야 산적의 피를 묻힐 검이 아니지 않느냐. 이건 잔악한 마교 놈들의 모가지를 썰고 마교와 결탁한 위선자들의 내장을 가른 것이다. 어떠하냐? 굉장하지?”
“예, 나리. 굉장해요!”
엄청나요. 대단해요. 온갖 아양을 다 떨자 남자는 흡족한 듯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사영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제안을 해 왔다.
“하루 종일 뱀 같은 인간들만 상대하다 너 같은 것을 보니 그나마 근심이 풀리는구나. 이 시간까지 허드렛일을 하는 것을 보면 형편이 넉넉한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석반은 먹었느냐?”
“석반이요?”
“저녁밥 말이다, 저녁밥.”
사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남자가 활짝 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가서 같이 먹자꾸나. 사양할 것 없다.”
“예? 하지만 아직 설거지거리가 남았는데…….”
“이 남궁호관이 너를 옆에 앉혀 놓고 식사를 하겠다는데 겨우 설거지가 문제더냐. 네 가족 입에 들어갈 것도 넉넉히 챙겨 줄 터이니 잔말 말고 따라오거라.”
“가, 감사합니다, 나리…….”
사영은 기쁜 듯 웃으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훤칠한 남자, 무림인, 그것도 남궁세가 사람과 닿다니 지네 대여섯 마리가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이 흐름은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남자, 남궁호관은 사영의 손을 잡고 풍랑객잔 1층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객잔 전체를 전세 낸 덕분에 안에 있는 손님들은 온통 남궁세가 소속의 사람들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자면 호랑이 굴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영은 다분히 계산적으로 위축된 듯 어깨를 웅크렸다.
“대공자님, 웬 꼬맹이입니까?”
“아, 말하는 게 아주 깜찍하기에 데려왔다. 가정 형편이 곤궁한지 이 시간까지 일을 하지 무어냐. 밥이나 한 끼 먹이고 보내려 하니 신경 쓰지 말거라.”
남궁세가의 대공자야?
파리를 쫓듯 휘휘 손을 저어 사람들을 물리는 남궁호관을 보며 사영은 볼 안쪽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무림 정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남궁세가의 첫째 적자라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 사람들이 과연 정말 장위를 데리고 갔을까? 어디에 필요하다고?
남자는 사영을 자신의 맞은편에 앉히고 점소이를 불러 되는 대로 음식을 주문했다. 곧 호화스러운 음식이 탁자를 가득 채우자, 그가 자비롭게도 먹으라며 손짓을 했다.
“먹어라, 먹어. 네가 평생을 일해도 입에 대지 못할 것들이니 지금 실컷 먹어 두거라.”
“가, 감사합니다, 나리.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혹시 제가 다 먹지 못하면 남은 것을 챙겨서 가도 괜찮을까요? 집에 있을 동생들한테도 맛을 보여 주고 싶어서…….”
“심성이 아주 바르고 착한 아이구나. 아무렴, 괜찮고말고. 그렇다 해서 네가 덜 먹으면 혼이 날 줄 알아라. 이건 어디까지나 네게 보이는 호의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나리. 그럼 잘 먹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한 사영은 곧 차려진 음식을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상황을 생각하면 당장 명치에 걸려 체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해야만 했다.
걸신이 들린 듯, 그러나 추잡스러워 보이지는 않게 오리찜을 입 안에 밀어 넣는 사영을 가만 보던 남자는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의 무용담을 슬쩍슬쩍 늘어놓았고 사영은 볼이 빵빵하게 부푼 상태에서도 아금받게 맞장구를 쳤다.
“마교의 것들은 하나같이 악독하기 그지없어서 손가락 좀 자르는 것 가지고는 고문으로 치지도 않지. 그래서 강구를 좀 해 보았다.”
“어떻게 말입니까?”
“자식이 있다면 일이 아주 쉬워지더구나. 양잿물에 애새끼를 하나씩 집어 던졌을 때 견디는 놈을 본 적이 없다. 마교의 끄나풀들이 제 자식을 아끼다니 개도 웃고 지나갈 일이지만 말이다.”
“자, 잘하셨습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뿌리를 뽑으실 수 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 맞는 말이다.”
남자가 대답하며 파안대소를 했다. 사영은 배 가운데가 살살 아프고 손끝이 식는 것을 느끼며 따라 헤헤 웃었다. 밥 먹을 때 들을 만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지만 사영은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리고 끈질기게 기다린 끝에, 다시 한번 기회가 왔다.
“너는 어떠냐. 이런 곳에 살면서 힘든 것은 없느냐? 모질게 구는 놈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특별히 기분이 좋으니 내 할 수 있는 한 편의를 봐주도록 하겠다.”
그것도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은 기회였다.
배부른 짐승처럼 느슨히 턱을 괴고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사영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사영은 표정을 단계별로 울적하게 바꾸며 음식을 집어 먹던 손을 내렸다.
“얼굴을 보니 뭔가 있긴 한가 보구나.”
“그것이…….”
생각만 해도 울음이 나올 것 같다는 듯, 사영의 눈에 금세 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사영은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눈물을 참고 목이 멘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실은…… 실은 걱정이 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리께서 도와주실 수 있다면 정말 하늘 같은 은혜일 것 같습니다. 아니, 물론 지금 베풀어 주시는 것 역시 감사한 일이지만…….”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눈물을 짓느냐? 어서 말해 보거라.”
“그것이…… 저와 아주 친한 친구가 오늘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사영이 젖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장위라는 아이인데, 키는 저보다 조금 크고 머리가 짧습니다. 낮 내내 마을을 온통 헤집고 찾아보았지만 아무 데도 없어요. 그 아이의 아버지도 장위가 어디에 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혹여 어디서 다친 것은 아닐까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호오?”
남자가 흥미를 가진 듯 비스듬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사영은 아래를 향했던 눈을 들어 조심스레 남자를 관찰했다.
그는 사영의 말에 잠시 먼 곳을 보더니 손끝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러냐? 네 친우더냐?”
“예, 나리. 그, 혹시…… 장위를 아십니까?”
역시 네놈들이구나. 하지만 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듯 멍청하게 물으며 사영은 날카로운 의문을 품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비틀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이다. 우리가…….”
하지만 사영이 남자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얼 그리 미주알고주알 말씀하고 계십니까, 형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계단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청년이 보였다. 그는 맞은편의 남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호리호리하고 낭창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에 막 대답을 하려던 남자는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옥리구나. 오늘 하루는 속이 상해서 나오지 않는다더니 웬일이냐?”
“형님이 웬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쥐새끼를 가만 놔두고 계신 것 같기에 직접 나왔습니다. 객잔의 질이 영 좋지 않군요.”
옥리라는 이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대로 계단 아래에 던졌다. 작은 자루 같은 것이 계단을 한참 구르고 굴러 툭 하니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조그만 아이였고,
또 사영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