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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9)화 (19/257)

19화

돈이 없다.

초윤은 서랍을 다시 한번 뒤지고 난 뒤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역시 돈이 없다.

쌀도 많이 안 남았다.

애 셋을 키우는 데에는 당연히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아무리 속세와 멀리 떨어져서 신선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해도 사람은 무언가를 먹어야 하고, 입어야 했다.

특히나 그게 한창 활달하게 뛰어다닐 나이의 애들이면 더욱이.

“하아…….”

또 그 머나먼 길을 가야 하는 건가.

점점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의 식사량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일 년에 쌀 두 섬은 먹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들어가는 돈은 대략 은자 한 냥이었는데, 이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초윤을 한숨짓게 만드는 것은 쌀을 사러 가기까지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었다.

원작 〈귀환영웅〉의 배경은 신무협 소설답게 중국이 배경이었다. 하지만 실제 중국의 지형을 철저히 고증한 소설은 거의 없었고, 동시에 한국식 해석과 특유의 판타지가 듬뿍 들어가 실제 고대 중국과는 상당히 달랐다. 지리적 위치와 지명이 같을 뿐 아예 다른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나마 최대한 실제와 비슷하게 묘사되는 것은 중국에 다수 포진한 거대 산맥이었다.

초윤과 아이들이 사는 불귀 산맥은 중국을 반으로 나누는 진령 산맥에 포함되어 있었다. 섬서성의 남부, 사천성의 북부에 있어 중원의 가까이에 위치했지만 자연적인 진법이 불귀 산맥을 전설 속의 장소가 되도록 숨겼다. 항상 구름과 안개가 끼어 있는 것도 모자라 외부의 사람은 이 커다란 여섯 개의 산을 눈치도 채지 못하고 지나가거나 홀릴 뿐이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항상 양식을 사러 갈 때마다 고생이었다. 물론 초윤 혼자만 산 밑에 휘리릭 다녀오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네 명이 몇 달을 먹을 양을 꾸준히 구하기 위해선 조그만 마을의 시장으로는 턱도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중원의 주식은 쌀보다 밀가루여서 그런지 쌀 한 섬을 통째로 파는 곳을 찾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하지만 초윤의 안에는 ‘애들이 잘 크려면 밀가루 음식보단 밥이지’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초윤 혼자 섬서의 번화한 도시로 다녀오곤 했다. 섬서는 사천에 비해 외부인에 대한 텃세가 덜했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떠돌이 약사 따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섬서의 남쪽에 자리 잡은 종남파는 제갈세가에 밀려서 그런지 잠잠하고 얌전한 편이었다.

‘이번에도 혼자 슉 다녀올까? 사영이가 있으니까 열흘 정도는 비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올해로 열다섯 살이 된 사영은 좀 짓궂고 영악한 면이 있어도 동생들을 아끼면서 책임감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한때는 셋의 관계가 깨지는 것은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했는데 그럭저럭 잘 극복한 것 같았다. 곧 사춘기가 올 나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성장이 더욱 기대됐다.

초윤은 서랍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사현이가 요즘 누나 말을 안 듣던데. 사영이가 서열을 잘 잡는다 해도 셋만 있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사현은 사영의 말을 무엇보다도 잘 들었다. 아무래도 피붙이라고는 서로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지 누나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열세 살, 현대 한국으로 치자면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슬슬 사영의 말에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동생을 달래기보단 동생에게 명령하는 데에 익숙한 사영에게도 조금씩 불만이 쌓이는 것 같았다.

초윤이 함께 있을 때는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해 주었지만 멀리 떨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또 몰랐다.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남매 사이란 나빠지는 게 좋아지는 것보다 훨씬 쉬웠으니까.

‘천오는…… 얘도 진짜 어떡하냐. 역시 셋만 두면 안 돼.’

초윤은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눈을 가진 아이를 떠올리고 한숨을 쉬며 다시 이마를 붙잡았다.

천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천오는 일곱 살 때 보여 준 충격의 도끼 사건 외에는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도덕과 윤리적 기준이 설립되지 않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긴 했어도 전부 초윤이 알려 주고 가르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었다. 초윤의 말을 성실하게 잘 듣고 괜한 불만을 갖지 않아서 아주 고마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오는 명실상부 하늘이 내려 준 기재였다.

작가의 역량이 높지 않아서 그런지 소설 내에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겼음’ 식으로 묘사됐지만, 원작의 주천오라는 인물은 천하제일의 무공으로도 모자라 엄청난 지략가로 알려졌었다.

즉 천오의 머리가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고, 더불어 제 스승의 모든 지식을 쪽쪽 빨아먹으며 자란다는 뜻이었다.

4년 전, 운기요상을 알려 준 지 몇 시진이 지나지도 않아 애가 축기를 시작했을 때는 정말 기함을 했다. 보통은 몸과 기반을 만들고 나서도 2년 만에 축기를 시작하면 빠르다고 하는데 자신이 제자로 들인 아이는 그날 바로 단전에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아이는 일취월장이라고 일컫기도 힘들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무공을 배우는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진밖에 되지 않아 그나마 이 정도지, 온종일 매진하게 했다면 마교의 마천동(魔淺洞) 따위 금방 이겨 내고 나왔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진짜 마천동을 깨부수고 나왔잖아. 말 다 했지…….’

초윤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래서 문제였다.

아무래도 사현이 자신의 무공 경지를 뛰어넘은 천오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누나만큼 영악하지는 못했기에 안 보이는 곳에서 천오를 괴롭히지는 못했지만, 사현은 요즘 들어 대놓고 천오를 불편하게 여기며 피해 다녔다. 그로 인해 사영과도 빈번히 부딪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무리 말해 봤자 알았다고만 하지 해소된 것 같지는 않고…… 뭔가 다른 계기가 필요해.’

하여간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서너 개의 문제가 한꺼번에 더 튀어나왔다. 초윤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너희 모두와 함께 갈 것이다.”

갑자기 떨어진 선언에 젓가락을 쥐고 있던 천오의 손이 우뚝 멈췄다. 사영이 먼저 스승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희 세 명 전부요? 바로 아랫마을에 가시는 건가요?”

“아니. 시간을 오래 잡고 멀리까지 다녀올 생각이다. 너희 다 몸이 많이 자라지 않았느냐. 지금의 옷을 더 입기도 힘들 테고, 집기도 새로 장만하는 게 낫겠지.”

“세상에.”

사영과 사현이 남은 밥을 반찬도 없이 파바박 넘기고 그릇을 비운 뒤 환약을 만들고 있는 초윤의 곁에 옹기종기 앉았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스승님?”

“글쎄다. 사현이는 어디로 가고 싶으냐?”

“저, 저는…… 하, 하남으로 가 보고 싶어요. 하남이 그, 그렇게 번화했다면서요?”

“현아는 그런 곳으로 가면 길만 잃어버릴 거예요, 스승님. 사천으로 가요. 양하주와 고기 요리가 그렇게 맛있대요.”

“기……길 안 잃어! 누나는 먹을 것만 밝히면서!”

“어디서 언성을 높여? 그러는 너는 먹을 것 안 밝혀?”

“그만, 그만. 사영, 동생을 함부로 재단하면 안 되지. 사현, 너는 네 누나이자 사저에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

사영과 사현이 서로를 노려보다가 눈을 돌렸다. 자리에 앉아 환을 빚던 초윤이 고개를 돌려 식탁에 홀로 앉은 채 남은 음식을 꼭꼭 씹어 먹고 있는 천오에게 물었다.

“천오는 어디로 가고 싶으냐?”

“……저는 어디든 좋습니다.”

입 안에 있는 것을 씹어 삼키고 대답하느라 한 박자 늦게 목소리가 나왔다. 천오는 미지근한 차로 입가심을 한 뒤 다 먹은 그릇을 정리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남매도 자리에서 일어나 천오를 도왔다.

천오는 설거지를 끝낸 뒤 마당으로 나가 운기요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주변으로 하얀 안개가 천천히 자욱해졌다. 천오가 익힌 미무일식심법(瀰霧日蝕心法)의 부산물이었다.

천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뱉으며 고민에 잠겼다. 아직 초식의 형을 벗을 정도가 되진 못했지만, 벗는다면 어떻게 할지도 정하지 못했다. 이 안개를 무엇으로 바꿔야 내게 딱 맞게 어울릴까. 요즘 천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다.

밤이 깊어지고 나서야 천오는 침실로 돌아왔다. 스승은 침상에 걸터앉아 새끼손톱만 한 환약을 계속 빚고 있었다. 한 번의 손길에 열 이상의 환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이리 오렴.”

초윤이 천오를 보지 않고 불렀다. 천오는 의관을 정리하고 다가가 초윤의 맞은편, 침상의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초윤은 나무로 만든 깊은 그릇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반죽을 떼어 조금 먹어 본 뒤 안에 들어간 약재를 말해 보거라.”

그릇의 안에는 초윤이 빚고 있는 환의 반죽이 들어 있었다. 천오는 손을 뻗어 반죽을 살짝 덜어 내고, 입에 넣어서 혀로 살살 풀었다.

“당귀와 감초…… 고삼(苦蔘)과 치자가 들어간 듯합니다. 작약과 연교(連翹), 금은화의 냄새도 납니다.”

“또?”

“또…… 괴화(槐花)인 것 같습니다. 우방자 특유의 향도 느껴집니다. 이를 봉밀에 반죽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몇 개를 빼먹은 것 같으냐?”

“모르는 맛이 하나, 헷갈리는 맛이 넷 있습니다.”

“맞췄다. 약서랍으로 가서 백강잠과 방풍, 백선피, 형개와 황금(黃芩)을 찾아오거라. 이름은 전부 쓰여 있다.”

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의 반대쪽에 있는 커다란 약서랍으로 향했다. 수십 개의 작은 서랍에 각기 약재의 이름이 쓰여 있어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오는 약재 다섯 개를 작은 나무 그릇에 담아 초윤의 앞으로 가져왔다. 초윤은 옆에 있는 대야에 손을 씻고 명주 천으로 닦은 뒤 그릇을 받아 들었다.

“네가 모르는 맛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보다시피 냉큼 먹기에는 혐오감을 느낄 수 있어 이제껏 알려 주지 않았다.”

“……벌레입니까?”

“희게 굳어 죽은 누에를 말린 것이다. 누에는 꽁무니에서 비단실을 뱉는 중요한 곤충이지. 풍사를 제거하고 경을 풀어 주며, 담을 삭이고 기생충과 반점, 흉터, 종기까지 없애는 효능이 있다.”

초윤이 백강잠을 하나 들어 천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천오는 말라비틀어진 하얀 벌레를 유심히 내려다보다가, 한순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맛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입 안에서 오독오독 오래 씹었다.

“……역하진 않으냐? 벌레인데.”

“백강잠의 맛과 냄새를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초윤이 자신이 마시던 백차의 잔을 내밀었다. 천오는 그를 감사히 받아 한 모금 넘기며 입 안에 남은 백강잠의 맛을 털어 냈다. 말린 벌레에게선 텁텁하고 메스꺼운 맛이 나는 것 같았지만 먹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약을 배우는 시간은 사저도, 사형에게도 없는 자신만의 것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노력을 하면 할수록 스승은 한층 다정하게 자신에게 괜찮은지 물어보고, 직접 잔을 빌려주기도 하는 등 더욱 큰 배려를 해 주었다. 멈출 수도, 멈출 생각도 없었다. 스승에게 약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기꺼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네 개의 약재를 하나씩 먹어서 기억한 뒤, 천오가 물었다.

“이 많은 약재를 합쳐서 무엇을 만들고 계신 겁니까?”

“양매창(楊梅瘡)에 듣는 약이다. 양매창이 무엇인지 아느냐?”

“아니요, 모릅니다.”

“가면 볼 수 있을 게다. 이쯤이면 되었으니 잘 준비를 하렴.”

“빚으시는 일을 도와 드릴 수는 없습니까?”

“네 손으로 하다간 밤이 다 지나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

감출 수 없이 뚱한 얼굴로 자리를 펴고 돌아보자 창가에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달빛과 일렁이는 등잔불의 주홍색 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집중하는 초윤이 보였다. 천오는 금세 기분을 풀고 초윤에게 단정히 인사한 뒤 자리에 누웠다.

기분 좋은 인기척과 달달한 약 냄새가 느껴졌다. 천오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잠시 스승을 바라보다가 금세 잠에 들었다. 오늘도 충실하고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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