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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20)화 (20/257)

20화

초윤은 산길을 가볍게 뛰어 내려왔다. 발걸음 한 번에 수많은 나무와 바위를 지나가고, 스치듯 밟은 땅에는 흙이 쓸려 나간 흔적도 남지 않았다. 볼과 발목을 시원하게 감싸는 산바람이 초윤의 기분을 고양시켰다. 항상 나풀거려서 거슬리던 머리카락은 전부 올려 묶어 죽립을 쓴 덕분에 풀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분 좋은 것은 초윤을 놓치지 않고 따르는 세 개의 기척이었다.

“스승님, 너무 빨리 가지 마세요!”

가장 먼저 따라붙은 사영이 아우성을 쳤다. 연신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아 뒤따르는 두 명의 동생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초윤은 눈만 돌려 뒤를 힐긋 보고, 발에 공력을 모아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스승님!”

사영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초윤은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을걸.’

속도만 봐서는 사영이 가장 좋았다. 방금도 세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초윤을 한 번 따라잡은 아이였다. 사현은 아직 자세가 조금씩 불안정하긴 했지만 누나의 등만 보고 쫓아오는 것 같았다. 마냥 질투심만 품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괜찮은 승부욕도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서문천오.

‘쟤는 대체 매일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나 몰래 다른 사부라도 만나는 건가?’

나는 저렇게까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힘을 내서 빨라지는 것과 힘을 줄여서 느려지는 것은 쉽다. 어려운 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나 험난한 산길을 내려오는 것이라면 더욱이.

초윤이 앞서 내려오는 내내 천오는 일정 거리 뒤에서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초윤을 따라잡기 위해 가까이 오지도, 놓치지도 않았다.

아직 기척이나 흔적을 숨기긴 힘든 것 같았지만 그래도 훌륭한 보법이었다.

‘너무 강해지는 건 무서워서 약학까지 가르쳐 가면서 천천히 한답시고 했는데…… 보스는 보스네. 어쨌든 강해질 사람이라는 건가.’

조금 착잡해진 기분을 안고 발걸음을 멈췄다. 초윤의 앞에는 두꺼운 안개가 벽처럼 길을 막고 있었다. 재천산과 외공산을 지나가면 짐을 든 아이들이 탈진할 수 있으니 두망산에서 바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전부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사현이 가장 힘들어 보였다.

“헉…… 헉…… 스승님, 설마 내내 이렇게 가는 건가요?”

“그럴 리가. 짊어진 것을 다 흘리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느냐.”

“엇, 누, 누나. 매듭…… 다 푸, 풀렸다.”

아이들에게는 간단히 만든 배낭을 하나씩 나눠 준 뒤 갈아입을 것과 생필품을 각자 챙기도록 했다. 중간중간에 빼먹은 게 없는지 짚어만 준다면 자립심을 기를 좋을 기회였다.

초윤은 등에 지고 있던 약함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여러 개 달린 서랍을 뒤적였다.

“스승님은 그런 커다란 함을 지고도 힘들지 않으세요?”

“이런 일로 힘들다면 스승을 할 자격이 없지.”

사영의 질문에 대답하며 초윤이 꺼낸 것은 손바닥보다 작은 자물쇠 모양의 장신구였다. 새하얀 백옥으로 만든 자물쇠는 구름 문양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하늘 천 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천오야, 이전에 주었던 옥패는 갖고 있느냐.”

“네, 스승님.”

“이리 가져오거라.”

사저와 사형의 옆에 얌전히 서 있던 아이가 초윤의 부름에 쪼르르 다가와 품에서 옥패를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다. 초윤은 아이가 내민 것을 받아 든 뒤 대신 자물쇠를 올려 주었다.

“장명쇄(長命鎖)다. 이제부턴 옥패 대신 이것을 갖고 다니려무나. 이게 있다면 불귀 산맥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된다. 너도 이제 산하(山下)를 오가도 된다는 뜻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두어라.”

사양을 하려는 아이에게 선수를 쳐서 말한 초윤은 사영과 사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둘 다 잊지 않고 챙겨 온 것 맞느냐?”

“예, 스승님. 여기 있어요.”

“여, 여기요.”

사영은 품속에서 끝이 가늘고 날카로운 은보요(銀步搖)를 꺼내고, 사현은 소매에 가려진 손목에 둘러 두었던 은렴(銀簾)을 잘그락 흔들었다. 값비싼 보석을 쓰진 않았지만 세공만으로도 충분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신구였다.

“사저, 사형과 마찬가지로 네 것 역시 두망산의 열쇠 역할을 하게 됐을 뿐이다. 괘념치 말고 받거라.”

“……네, 스승님. 감사합니다.”

천오는 자물쇠에 새겨진 구름 문양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품 안에 넣었다. 초윤은 내심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커다란 약함을 등에 메고 뒤를 돌아 나아갔다. 처음으로 아이 셋을 데리고 나서는 여행이었다.

진령 산맥은 산세가 험준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물길이 난 곳을 따라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잔도(棧道)가 그나마 산적에게서 안전하고도 유일한 길이었다.

평소라면 봇짐을 멘 장사꾼밖에 오가지 않을 길을 백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각자 등에 커다란 짐을 짊어진 채 줄지어 지나가는 모습은 명백히 특이한 광경이었다.

그때, 짐꾼 한 명의 발밑에서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힉! 히익!”

“으악! 이봐! 거기서 휘청거리면 뒤에 오는 사람은 어쩌라는 소리야!”

기겁을 한 짐꾼이 허둥지둥 물러났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사람들도 중심을 잃고 기함하며 소리쳤다.

한순간에 줄이 아수라장이 됐을 때, 뒤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똑바로 서! 거리 유지해! 다 같이 죽고 싶어!!”

“윽…… 젠장, 빌어먹을! 길 같지도 않은 길을 통과한다 했을 때부터 진즉 빠졌어야 했는데!”

짐꾼들이 연신 욕을 지껄이면서도 다시 제대로 된 줄을 찾아 섰다.

고함을 친 장본인인 무사 조우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단주님,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절반은커녕 아직 절반의 반도 가지 못했는데 짐꾼들의 불안감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길이 없습니다. 녹림이 깃발을 폈으니 우리가 지나왔던 길로는 돌아가지 못해요. 하루빨리 도착해야만 하는데 산을 빙 둘러 돌아가기에는…….”

조우일의 곁에서 고운 손끝으로 아미를 문지르는 사람은 단금상단의 상단주, 난위정이었다. 이 길밖에 없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지금도 고민하고 후회하는 듯 어두운 안색이었다.

“품삯을 더 주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부탁드립니다, 조 무사님. 잘 다독여 주세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단주님입니다. 잔도를 지나는 이틀 내내 신경을 쓰실 것 아닙니까. 차라리 돌아가서 화산파에 도움을 구해 산길을 통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생각은 해 보았지만 화산파는⎯.”

“으아아악!!”

“뭐야!”

머리만 아프고 지지부진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와중 갑자기 앞에서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이 산을 울렸다. 서둘러 앞을 보자, 중간에서 끊어진 잔도와 절벽을 굴러떨어지는 짐꾼 두 명이 보였다.

“물러나! 물러나! 뛰지 말고!”

“으아아!! 무너진다!!”

조우일이 무너진 잔도 주위의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했지만 두려움에 몸이 굳은 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자리를 벗어나기에 바빴다.

난위정은 결국 귀환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단금상단의 피해는 짐꾼 네 명과 은자 서른 냥에 달하는 물품의 손실이었다.

“하아아…….”

난위정은 한 시진째 앞에 펴 놓은 지도를 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서안의 객잔에 오도 가도 못 하게 발이 묶인 지도 벌써 이틀째. 하물며 창문 밖의 잿빛 하늘에서는 아침부터 계절을 잊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위정은 손톱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섬서성의 남부를 꼼꼼히 다시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렇다 할 묘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망할 산적 놈들. 민간인들 등쳐 먹는 게 잘도 권력이고 사업이다.’

녹림이 약탈을 시작했다는 깃발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한 상행이었다. 간만의 외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준비한 촉금은 높은 값에 팔렸고, 또 저렴한 값에 필요한 것을 구비했다. 하지만 마침 돌아가기로 결정한 날에 산적들이 거창한 선언을 내린 것이었다.

이대로 저 깃발이 내려가기까지 몇 달을 서안에서 놀고만 있을 순 없었다. 역시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각오를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나.’

하여간 그놈의 무림과 엮여 제대로 된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위정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그대로 아무 생각도 없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단주님.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 무사님? 무슨 일인가요?”

“그게…… 왕평과 왕걸이 돌아왔습니다.”

“뭐? 어떻게?”

위정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놀랐던지 자신이 반말을 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간 위정은 우일의 안내를 따라 식당이 있는 객잔의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중년 남자를 발견했다.

“왕평, 왕걸! 살아 있었군요!”

“단주님!”

위정은 한달음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다리와 팔에는 부목을 대고 머리에는 붕대를 감는 둥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지만 정신은 맑은 듯했다. 위정은 누가 봐도 안도한 얼굴로 그들의 손을 꾹 잡았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구하러 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휴, 괜찮습니다, 단주님. 이분께서 구해 주신 덕분에 멀쩡합니다.”

“물에 빠져 못 움직이는 걸 건져다 치료도 해 주셨다구요. 왕초와 장강도 목숨을 구했습니다요, 단주님. 그 친구들은 걸을 수가 없어서 의원의 침상에 누워 있지만요.”

“왕초와 장강도 말입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전부 영락없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넷 다 살아 있었다니. 위정이 입을 딱 벌리며 왕평의 뒤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선 채 그들의 재회를 지켜보던 이가 그제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위정은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고 깊이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은인. 이들은 우리 상단의 중요한 일원입니다. 그 험난한 길을 넘어 치료까지 해 주시다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감사 인사는 아이들에게 해 주십시오. 그분들을 찾은 것도, 모셔 온 것도 이 아이들입니다.”

짐꾼들을 데려온 그는 깊게 눌러쓴 죽립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꽤 특이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으며 몸에서는 은은한 약향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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