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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21)화 (21/257)

21화

그가 아이들을 언급하자, 그의 뒤에서 여인 한 명과 소년 두 명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위정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인은 본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 난위정이라고 합니다. 은인 분들의 존함을 감히 들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대답 대신 죽립을 쓴 사람을 힐끗거리다,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먼저 자신들을 소개한 것은 비교적 나이를 먹은 여인 쪽이었다.

“사영입니다. 이쪽은 제 동생 사현과 천오입니다.”

“사현이라고 합니다.”

“……천오입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이 위정이 보답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찬은 하셨습니까?”

“아니요.”

아이들이 거의 동시에 입을 모아 말했다. 위정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주방을 향해 외쳤다.

“여기, 황 숙수! 내 은인께 대접을 해 주게. 유발면과 양육포막이랑…… 이럴 게 아니라 자네가 자신 있는 요리라면 전부 내오는 게 낫겠군. 그리고 내 방에는 서봉주 두 병과 어제 주었던 돼지 대창 볶음을 올려 주게!”

“와아.”

둘째처럼 보이는 남자아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아이들은 이번에도 일제히 허락을 구하듯 죽립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고 나서야 위정에게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희희낙락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예의 바른 아이들이네.’

난위정은 흐뭇하게 웃고 죽립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은인께선 저와 함께 상층으로 올라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곳의 안주와 술은 끼니보다도 맛있더군요. 아이들은 조 무사에게 잘 돌보도록 전하겠습니다.”

남자가 고민하듯 죽립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고 허둥지둥 뒷말을 덧붙였다. 그는 조우일을 보며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아이들의 등을 토닥이며 몇 가지 말을 당부한 후 위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은인. 그럼 조 무사, 부탁해요.”

“예, 단주님.”

위정은 조우일이 충성스럽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몸을 돌려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걸음이 뒤따르는 것을 느낀 위정의 입은 남몰래 만족스레 웃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초윤은 속으로 생각하며 맑은 술을 한 모금 삼켰다. 깨끗하게 목 넘김이 좋은 술이 꽤 마음에 들었다. 매콤하고 새콤하게 볶은 돼지 대창과도 잘 어울려서 그야말로 만족스러운 술상이었다.

애들 키우느라 입에 댈 기회도 없었지만 ‘초윤’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건가, 그래서 무심서 뒤편에 묻어 놓은 술이 그렇게 많았던 건가 싶었다.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요?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이렇게! 떡하니 깃발을 올릴 수가 있는지 말입니다. 보름이라도 더 빨리 올렸으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요!”

초윤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난위정이 식탁에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벌써 술기운이 오른 건지 얼굴은 발그레했고 언성은 높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왜 데려왔나 싶었더니, 속내를 토로할 사람이 어지간히도 없었나 보네.’

젊은 사람이 안됐다. 초윤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윤’이 얼마나 무뚝뚝한 인물인지 맞장구를 쳐 주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초면의 예의라고 존대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왔을 때, 산과 산 사이에 흐르는 물길에 사람의 그림자가 동동 떠 있는 모습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저걸 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 아닌가. 애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웅대한 정의감은 딱히 없는 초윤이 잠시 고민하는 찰나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놀랍게도 천오였다.

천오는 조금 얼떨떨한 초윤이 허락을 하자마자 겉옷과 배낭을 벗고 강에 뛰어들었다. 막내 사제가 나서니 사형과 사저는 물론이고 초윤까지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렇게 그 주변의 사람 네 명을 구해 내고, 응급 처치를 한 뒤 섬서성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는 첫 나들이치고는 시작부터 험난한 길이었다.

아무튼 중태에 빠진 두 명은 설비가 구비된 의원에 맡기고, 정신을 차린 나머지 두 명에게 물어 그들이 일한다는 상단을 찾아왔다. 그랬더니 낮부터 젊은 상단주에게 붙잡혀 술판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파렴치한 도적놈들. 남의 피 같은 재물을 저리도 당당히 빼앗겠다 하는 게 도리랍니까. 관아는 저런 것들도 무림인이라고 손대지 않더군요. 게다가 약아빠진 것들이 민간인은 건드리지 않아요. 꼭 무림과 관련이 있는 상단만 콕콕 짚어 약탈을 합니다.”

“통행세를 주는 건 안 됩니까?”

“통행세로 8할을 요구한답니다. 이문은커녕 손해를 볼 게 뻔해요.”

젊은 친구가 고생을 하네.

초윤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술을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이어진 위정의 말에 그대로 뿜을 뻔했다.

“제가 이곳에 발목이 묶인 지금도 사천은 죽어 가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전부 다 그놈의 약선 때문에…….”

“⎯⎯⎯콜록! 콜록!”

“헉, 괜찮으십니까?”

“예, 예. 괜찮습니다. 잠시 사레가 들린 것뿐입니다.”

초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위정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이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술이 묻은 입가를 닦았다. 침착하고 점잖아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죽립에 가려진 눈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약선? 약선이 거기서 왜 나와? 나 말고 약선이 또 있나?’

“그보다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습니다. 약선……이라면 약선 초윤……말입니까?”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지만…… 천천히 드세요, 초선 형님. 이 위정이 전부 대접하는 것이니 마음 놓으시고요.”

벌떡 일어났던 위정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름을 묻는 말에 어쩌다 초선이라 대답해 버린 초윤은 그저 가만히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위정은 누가 봐도 불쌍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어 제 접시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사천당문의 봉문 말입니다, 형님. 그 일 때문에 사천에서 당문과 거래하던 곳들은 전부 쪽박을 차게 됐잖아요. 봉문도 일이 년이어야 말이지. 이십 년이 말이 됩니까? 죽으라는 거지요.”

“약선 초윤이 당문의 봉문과 무슨…….”

사천 지역의 패자라고 불리는 사천당문은 당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무가였다. 주로 쓰는 무기는 독과 암기였으며, 그 실력은 동영이나 천축에서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다고 했다.

하지만 폐쇄적이고 괴팍하며 독에 미친 집단이 산에 틀어박혀 살던 초윤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순간, ‘초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마에 저절로 손이 갔다.

“형님? 정말 괜찮으신 것 맞나요?”

“……예, 괜찮습니다. 오랜만의 음주라서 조금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죽립을 벗지 않았지만 위정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초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보란 듯이 자세를 바로 했다. 대화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건지 위정은 곧 다시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 뒤로 사천은 온통 엉망입니다. 당문이 휘어잡고 있던 사천 제일의 자리를 청성파와 점창파가 차지하려 암투를 벌이지, 아미파는 애초에 비구니들만 모여 사니 중재할 생각도 없어 보이지. 괜히 사이에 끼어든 상단들만 등이 터지고 있어요. 거기다가 저희 단금상단은 아주 오래전부터 당문과의 거래만 해 온 터라 이미…….”

투정을 부리는 듯한 위정의 목소리를 BGM으로 깔고, 초윤은 초윤 나름대로 죽을 맛이었다. 위정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되 정신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초윤!!!! 뭘 하고 다니던 거야!!!!!’

아무리 속으로 소리를 쳐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올 리 없는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방금 떠오른 기억에 따르면, 백협맹을 이루는 중요한 주축인 사천당문을 봉문시켜 어떠한 대외적 활동도 할 수 없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약선 초윤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사천당문의 봉문은 원작 소설의 스토리 시작 지점에서 이미 풀려 있어 조금 언급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만, 설마 봉문 중인 지금 이런 식으로 원인을 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왕년에 한가락 하던 할아버지도 아니고 이게 뭐야. 당문도 왜 하필이면 이 약초 오타쿠한테 시비를 걸어 가지고!’

“……그래서 섬서성의 다른 세가에도 도움을 청하기가 영 어렵습니다. 당문의 심복이라는 각인이 깊어요. 물론! 당문은 저희 상단의 비단만을 들여 쓰긴 했지만! 값싼 무명만 주문한 지도 벌써 이십 년이란 말입니다. 예?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시간이에요.”

저지른 일의 결과가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입맛이 썼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초윤의 손이 우뚝 멈췄다.

‘아니, 잠깐만. 굳이 말하자면 내 잘못은 아니지. 초윤은 내기에서 이겼을 뿐이잖아? 생각해 보니까 먼저 봉문하겠다고 말을 꺼낸 것도 그 고약한 장문인 아니야? 적당히 몇 년 자숙했으면 알아서 기어 나왔어야지 왜 아직도 걸어 잠그고 있대?’

그러니까,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이 서안을 벗어나고 진령 산맥과 대파 산맥을 넘어 사천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위정의 질문이 불쑥 찔러 들어왔다. 초윤은 무성하게 떠오르던 생각을 차곡차곡 접어 두고 먼저 대답부터 하기로 했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화산파에 가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 하지만 화산은 당문과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백협맹에서도 대립하고 있고요. 분명 문전 박대를 당할 텐데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있는 돈으로는 먼저 선금을 치르고, 후금은 도착해서 지불하겠다고 하십시오.”

초윤이 탁자에 잔을 내려놓고 입을 대고 있던 잔의 모서리를 엄지로 닦았다. 50도에 가까운 술을 한 병 다 비운 것치고는 흔들림이나 고양감도 하나 없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초윤이 역시 똑똑하긴 한가 봐.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좋네. 나였으면 상상도 못 했을 생각이 저절로 떠올라.’

“일단은 가서 도움을 얻으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또 그만인 일 아닙니까. 비가 그치는 대로 찾아가 보십시오. 단언컨대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상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야 복이 들어올 리 없죠.”

취기가 올라 침울하게 늘어져 있던 위정이 굳건해진 얼굴로 허리를 펴고 앉았다. 초윤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위정의 빈 잔에 맑은 술을 채워 주었다.

“내일, 늦어도 모레면 비가 그칠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양껏 드시고 마시며 쉬십시오.”

“예, 형님. 형님이 들어 주셔서 속이 얼마나 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더 드세요. 제 사람들을 구해 주시고 앞길까지 보여 주셨는데 이만한 대접이 대수랍니까.”

역시 언변으로 살아남는 상인답다. 이제 약관을 조금 넘은 것 같아 보이는데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하는구나.

초윤은 새로 생긴 아우의 속풀이에 조금 더 어울려 주기로 했다. 선생님으로서가 아닌, 비슷한 연배의 사람으로서 간만에 나누는 대화가 은근히 즐거운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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