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귀행(歸行)의 아침이 밝았다. 넓은 객잔을 통째로 빌려 머물고 있던 상단의 인원들이 새벽부터 산 밑까지 나와 인원을 점검하고 짐을 배분받았다. 험한 산길이라 마차를 동원할 수 없어 모든 것이 사람 손을 타야 했다.
“아, 이래 봬도 나랑 내 동생이 힘을 좀 쓴다니까? 한번 맡겨 봐요.”
“자식뻘 되는 애헌티 맡기긴 뭘 맡겨. 늬들은 그저 아저씨들 뒤에 딱 붙어서 뒤처지지나 말어. 산길이 오죽 험한 게 아녀.”
“산길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고요. 그러지 말고 딱 봇짐 하나만 줘 봐요. 그리고 중간에 맛있는 거 생기면 나 한 입만.”
“뭐 맛있는 거? 주전부리 살 돈도 다 뺏어 가 놓구선.”
“뺏기는! 주사위 하자고 조른 건 장 아저씨잖아요.”
초윤의 일행은 뒤늦게, 그것도 특혜를 받아 합류한 편이었지만 상단의 사람들과 꽤 좋은 관계를 쌓고 있었다. 초윤이 동료들을 여럿 구해 주기도 했지만 같은 객잔에서 지내는 동안 싹싹한 아이들이 짐꾼은 물론이고 호위 무사들과도 친밀한 사이가 된 덕분이었다.
지금만 해도 사영이 넉살 좋게 굴자 다들 흐뭇한 듯 아이들 손에 짐 하나 쥐여 주지 않고 있었다.
“사영, 담부(擔夫)님 준비하느라 바쁘시다. 그만하고 인사드린 뒤에 이리 오렴.”
“네, 스승님. 그럼 장 아저씨, 이따 봐요!”
초윤이 적절한 때에 부르자 사영이 냉큼 달려왔다. 분명 이 정도로 영악하게 키운 적은 없었는데 이게 바로 천성인가 싶었다.
‘어디 혼자 던져 놔도 잘 살 것 같네.’
역시 새로운 환경에 데리고 나오니 의외의 일면이 보인다. 초윤은 내심 귀엽다는 듯 웃으며 다가온 사영을 뒤돌게 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땋아 주었다. 사영이 문득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스승님, 현아는요?”
“천오와 함께 기어코 짐 내리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갔다. 착한 심성과 힘으로는 따를 자가 없지 않느냐.”
“제 동생은 그렇죠.”
천오는 안 그렇다는 소리였다.
하여간 이 은근한 적대감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았다. 이제 와선 그저 버릇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윤은 난처함을 숨기고 조용히 말했다.
“친동생을 아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막내 사제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말거라. 네게 좋을 것 하나 없어.”
“그러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요.”
아니, 진짜 좋을 거 하나 없다니까. 내가 데려와서 키웠기에 망정이지. 사실 커서 뭐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사영이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을 지킨다는 생각이 아주 깊게 박혀 있어서 그런지 한 번 경계를 하면 쉽게 풀지 않았다. 결국은 초윤이 힘닿는 곳까지 꾸준히 중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사영. 너와 사현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 배척하는 이분법은 너희를 폐쇄적으로 만들 뿐이다. 마음은 아직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알았어요. 조심하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천오에게도 꾸준히 얘기할 테니 마음 풀렴.”
애가 얼추 커서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되니 어째 잔소리만 늘어났다. 자중해야지, 생각하면서도 얘가 최종 보스랑 완전히 척을 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불안해지는 탓이었다.
사영의 머리를 만져 준 뒤 인파를 슬쩍 보자 아이 둘이 돌아오고 있었다. 장정 여럿이 붙어도 힘든 일을 돕고 왔으면서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칭찬을 잔뜩 받았는지 밝은 얼굴의 사현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 스승님. 누가 왔어요.”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이 드디어 온 것 같구나.”
한창 바쁜 사람들 앞에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털레털레 나타났단 말이지. 초윤은 노골적인 태도에 조소를 삼키고 내려놓았던 약함을 등에 지며 말했다.
“너희들도 슬슬 짐을 챙겨라.”
[산을 오르면서 전음(傳音)에 관해 가르쳐 줄 테니 집중해야 한다.]
뒷말은 무협지 특유의 LTE 서비스, 전음을 통해 아이들의 귀에 직접적으로 쏘아 주었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더니 희희낙락하며 준비를 위해 흩어졌다. 학구열이 넘쳐 나는 학생은 언제나 귀여운 법이라 내심 웃음을 지었다.
◇
화산파는 다른 곳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라고 하지만 명색이 도교에 본적을 둔 문파였다. 게다가 오악(五岳)중 서악(西岳)에 꼽히는 화산(華山)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 오르내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처음 화산파에 발을 들인 제자들은 경공이 최소한 오성에 달하기 전에는 절대 내려올 수 없었으며, 그마저도 웬만한 명분이 없다면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즉, 이렇게 자유로운 외유를 나온 것은 이례 중의 이례이며 아주 즐거워야 할 일이었다.
“쯧, 강소성의 비단으로 만든 장화인데.”
“얼마 전에 비가 와서 땅이 질어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희 단금상단은 사천의 촉금을 전문적으로 유통하고 있으니, 혹시 괜찮으시다면 향류검객께서 신고 돌아가실 장화를 새로 맞추어 드리겠습니다.”
“이런, 수양이 부족하여 무심코 내뱉은 말을 돌보아 주시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사천의 촉금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다니 기대가 큽니다.”
“화산의 영웅화뢰(英雄花蕾)께 어울리는 비단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화산의 일대제자 향류검객(香柳劍客) 유명우가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한나절 내내 겉옷이니 뭐니 하며 구두(口頭)로만 값비싼 비단을 몇 필이나 뜯어냈으니 만족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렇게 보여도 한 시진이 지나기 전에 다시 다른 것을 이유로 불쾌하다며 혼잣말처럼 투덜거릴 게 자명했다.
화산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단의 주인은 시작부터 불만이 많은 유명우의 곁에 붙어 횡포라고 불러도 좋을 그의 성질을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의 힘이 필수 불가결하다고는 하지만 거의 윗전을 모시는 듯한 저자세에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주변인들은 불편한 듯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층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단련된 감각으로 둘의 대화를 내내 듣고 있던 구양선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도사라는 자가 저렇게나 금단이 좋을까…….’
상단의 호위는 일류 무림 문파의 일원으로서 그다지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녹림왕도 아닌 일개 녹림채로부터 지켜 주는 간단한 일에 비해 넘치는 은자를 받게 되었으니 이쪽도 응당 정중한 태도를 보여야 했다. 물론 돈이 아니라고 해도 도사 된 몸으로서, 사람 된 몸으로서 저렇게 구는 건 도리가 아닐뿐더러 화산의 격을 깎아내리는 행위였다…… 고 구양선은 생각했다.
유명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은 소리였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일대제자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하는 실력이라서 이곳에 오게 된 건데……. 그저 화산의 명패만 달고 있다면 이대제자가 왔어도 되는 일이었어. 중요한 건 화산이 이 상단을 지키고 있다는 명분이니까.’
구양선은 스승에게서 상단의 호위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저의를 깨달았다.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자신을 뒷받침해 줄 가문도 돈도 없고 실력까지 모자란 그로서는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반면에 유명우는 섬서성에서 꼽아 주는 상단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화산에 들어오면서 막대한 희사(喜捨)를 했다.
실력이 없어도 앞길은 창창한 유명우가 이런 일에 기꺼이 나온 것은 단지 화산에 콕 박혀 있는 것이 답답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이 파견된 세 명의 화산 제자 중 남은 한 명, 이연은 동문 중에서도 손꼽히는 음침한 성격답게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길을 걷고 있었다.
‘가진 게 그렇게 많으면서 뭐가 더 그렇게 탐이 날까.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다…….’
구양선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마 보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린 순간, 문득 신기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