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열심히 산길을 오르는 짐꾼들의 무리에 딱 봐도 아직 연치가 어린 세 명의 소년 소녀가 끼어 있었다. 짐꾼의 자식인지 개인 물품처럼 보이는 신기한 모양의 봇짐 말고는 별다른 짐을 짊어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것을 감안하고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며 험한 산길을 오르는 것은 명백히 기이한 모습이었다.
‘무공을 배운 건가?’
구양선은 눈을 빛내며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별달리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가진 내력도 민간인 수준인 것 같고…… 가볍긴 하지만 발꿈치가 닿도록 투박하게 걷는 것을 보면 보법도 딱히 배우진 않은 것 같은데. 여기까지 누가 업어 준 건가?’
“나리, 뭘 그렇게 보시우?”
이런,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나.
바로 옆을 걸어가던 중년의 짐꾼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구양선에게 말을 걸었다. 구양선은 멋쩍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아이들이 이 험난한 산행을 잘 따라오는 것 같아서 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아이들입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약사 양반이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라우. 애들이 어찌나 영악스러운지 깜찍하기가 그지없어.”
“약사 말입니까?”
의원도 아닌 약사가 상행을 따른다고?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하기만 한 이야기다. 호기심을 담아 주위를 휘휘 둘러보자 아이들의 뒤를 사뿐사뿐 따르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시야를 가리는 죽립을 쓰고, 등에는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약함을 진 채 아이들처럼 가볍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가파른 산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특별히 단련된 내력이나 외공(外功)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정형화된 보법을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하지만 구름 위를 걷는 신선처럼 고아하고 꽃길을 지르밟는 사슴처럼 부드럽다. 구양선은 자신이 어느새 일다경에 가까운 시간 내내 한눈을 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정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초윤도 구양선이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화산의 구양선(歐陽鮮)이면 그 구양선 맞지? 배화구검(背華龜劍) 구양선?’
등에 꽃을 진 거북이, 구양선. 화려하고 변칙적인 환검(幻劍)을 쓰는 화산파의 일원답지 않게 느리고 묵직하며 방어와 일격에 치중한 중검(重劍)을 써서 괴짜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화산파의 일반적인 지향점이 화려하게 휘날리는 매화 꽃잎이라면, 구양선은 거대한 매화 고목을 키워 냈다.
누가 비웃으며 폄하하든 말든 정말 거북이처럼 강인하고 꿋꿋하게.
원작 내에서는 우직하고 정의로우며 조금 답답한 성격으로 평탄하게 주인공의 동료1 포지션을 차지한 친구다.
양분된 백협맹 내에서 악역으로 묘사되는 남궁세가 쪽에 붙은 화산파지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주인공과 구양선이 의형제 관계가 되어 시원하게 화산파를 청소하고 구양선의 스승을 화산파의 장문으로 올리게 된다.
즉, 구양선은 하루아침에 화산파의 대제자가 되어 주인공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준다.
‘그런 애가 겨우 상단 호위로 나온 걸 보면 아직 헤매고 있나 보지?’
구양선은 어깨가 넓고 곰처럼 두툼하면서 근골과 관절이 단단했다. 나는 중검을 들어야 한다며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몸이었다. 하지만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화산파의 제자들에게 기본적으로 보급되는 일반적인 장검이었다.
자신이 제힘을 낼 수 있는 무기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른 채 하위권의 실력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눈치채자마자 초윤은 빡센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저걸…… 말을 해 줘야 해? 아님 말아?’
초윤이 저지른 게 없다면 원작의 전개를 믿고 ‘누군가가 알려 주겠지’ 내지는 ‘스스로 알게 되겠지’ 생각하며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초윤은 원작 스토리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터트린 폭탄이 있었다.
바로 옆에서 초윤과 속도를 맞추어 묵묵히 걷고 있는 천오의 존재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는 절대 악역, 최고의 경지에 이른 무림인이었다. 그런 사람의 스토리라인에 개입해 홀라당 데려왔으니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비 효과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조용히 걸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맹렬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걷던 천오가 초윤과 구양선을 번갈아 보더니 대뜸 전음을 보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까?]
……이거 천재 아냐?
천재는 맞지, 참. 그렇다고 해도 반 시진 만에 전음의 요결을 체득할 줄은 몰랐다. 이런 애를 도맡아서 앞으로 더 가르쳐야 할 것을 생각하면 입맛이 썼다.
초윤은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같은 전음으로 답했다.
[잘했다. 이제 진동을 미세하게 조정해서 전해지는 목소리의 성질과 크기를 바꾸는 연습을 하거라. 그렇게 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 봐야겠지. 잘한다면 이렇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제 것처럼 쓸 수 있다.]
“……!”
마지막 문장은 사영이의 목소리로 명료한 발음과 까칠한 말투까지 흉내 냈다. 그러자 천오가 퍼뜩 놀라며 사영과 초윤을 연달아 보았다. 곧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발밑을 보는 아이의 무표정에 희미한 의기가 깃들었다.
심화 과정은 꽤 어려우니까 아무리 얘라도 시간이 걸리겠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초윤은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남매에게도 다시 말을 걸었다.
[소리란 진동이다. 말을 할 때 목을 만져 보면 떨림이 느껴질 것이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고, 음절마다 발음이 다르지. 이에 따라 말에서 느껴지는 진동 또한 다르다.]
전음을 들은 아이들이 반사적으로 손을 제 목 위에 올렸다. 아, 아 소리를 내며 성대를 더듬는 것을 보니 진동을 직접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열정적인 모습에 내심 흐뭇하게 웃은 초윤은 속성 강의를 계속했다.
[내력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원초적인 힘이다. 이를 가공해 말의 형태를 띤 진동으로 바꾼 뒤 사람의 귀 안쪽에 있는 작은 막으로 쏘아 내듯 보내는 것이 전음이다. 나를 대상으로 연습을 해 보거라.]
말을 마친 초윤은 걷는 속도를 조절해 남매의 앞으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음을 흉내 낸 내력 덩어리가 귓가를 마구 후려쳤다.
‘초윤이니까 이걸 받아 내지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고막 터졌다.’
[무작정 힘만 많이 싣는 게 아니다. 전음은 섬세한 기술이야. 가느다란 내력의 실 안에 많은 걸 담아야 한다.]
[스…….]
[시작은 좋았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의 진동을 조금 더 분석할 필요가 있어. 아니면 말하듯이 목을 울리고 그것을 증폭해 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소리 없이 도란도란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어느새 녹림이 나온다는 산 깊은 곳이었다. 짐꾼들을 둘러싼 채 바깥쪽을 걷는 무사들이 바짝 긴장한 게 느껴졌다.
이쪽으로 한눈을 팔던 구양선도 문득 먼 곳을 보더니 자리를 옮겨 난위정에게 다가갔다. 위정은 아직도 넉살 좋게 유명우를 달래는 중이었다.
“난 단주님, 곧 녹림패들이 떼거리로 몰려올 겁니다. 무사들에게 일러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하십시오.”
“예, 예?”
“방금 멀리서 망을 보던 녹림도 중 한 명이 산채로 급히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을 이끌고 조만간 나타날 겁니다.”
“세상에.”
위정이 새파랗게 질린 채 최측근인 조우일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곧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촘촘한 대형을 맞추었고, 산행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안 그래도 힘겨운 길을 잔뜩 긴장한 채 느린 걸음으로 가서 그런지 짐꾼들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산맥의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아직 해가 쨍쨍한데도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찌르르 울던 산새와 벌레가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대신 곳곳에서 꿀떡꿀떡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윤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어 뒤따르던 아이들을 세웠다. 시기적절하게 구양선이 맨 앞으로 나서며 비어 있는 길에 대고 묵직하게 호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