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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27)화 (27/257)

27화

“크윽!”

“으아악!”

남자가 묵직한 중검을 설렁설렁 휘둘렀다. 하지만 대충인 것 같은 동작에도 담겨 있는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어 간신히 막아 흘려 낸 손에 전류 같은 충격이 흘렀다. 구양선을 지그시 눌렀던 칼날이 빠지며 유명우를 갖고 놀듯 스쳐 지나가자 호들갑스러운 비명이 울렸다.

“넷 중에 둘은 제대로 싸울 마음이 없고, 하나는 차라리 없는 게 도움이고. 에잉, 따분해서 손 섞을 맛도 안 나는구만.”

구양선은 그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어 이를 악물었다. 정말 그의 말마따나 상단의 무사는 뭘 기다리고 있는 건지 적당히 견제만 하고 있었고, 같은 화산의 제자인 이연은 뒤로 빠질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유명우는 말할 가치도 없었다.

저자가 방심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유일한 기회인데!

그렇다고 해서 전투 중에 같은 편을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 혼자 진심인 구양선으로서는 속이 터지고 답답할 일이었다.

그나마 남자가 무슨 연유인지 진심으로 죽이려 들지 않고 있다는 게 넷의 목숨을 이승에 붙들고 있었다.

절벽 끝에 몰린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 열여섯 개의 초식이 구양선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앞의 여덟 초식은 어렸을 때부터 부단히 연습해 몸에 배어 있었으며, 그 완성도와 정교함만은 동문 중에서도 따를 자가 몇 없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완벽한 선을 그리며 검을 긋고, 흔들리지 않는 하체의 힘을 담아 찔러 들어갔다. 손목의 흔들림으로 검날을 휘청거리게 만들어 눈속임을 자아내고, 바람에 흩날리는 수많은 매화 꽃잎이 살갗에 닿는 것처럼 불규칙적인 곳을 베었다.

하지만…….

‘묵철로 된 벽을 상대하는 느낌이다.’

믿어 왔던 몸이, 쌓아 왔던 기초가 배신을 한다. 매화접무, 매개이도, 매화낙락, 매화혈우. 숨을 쉬고 걷는 것처럼 익숙했던 동작들이 자꾸만 막힌다.

남자는 마치 가르치는 것처럼 느긋하게, 그러나 가차 없이 구양선의 검로를 잘라 냈다. 길게 베면 짧게 쳐 내고 짧게 찌르면 단단하게 막았다. 육식 동물처럼 형형한 시선은 분명 다른 곳을 향하지 않고 구양선만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온몸에 눈이 달린 것처럼 허초에 속질 않았다.

지지부진한 대치 속에서 애가 타는 것은 구양선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고민을 끝낸 듯 구양선의 검을 걷어 날렸다.

“⎯윽!”

“이놈아, 검이 몸의 힘을 받쳐 주질 못하는 게 안 보이냐? 지가 뭘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고. 아니, 가르치는 늙은이들 머리가 꽉 막힌 건가?”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거대한 힘을 받아친 충격에 팔꿈치까지 저릿해 감각도 없었다. 구양선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핏발이 선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고, 조 무사와 이연은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는 듯 사사삭 거리를 물렸다.

남자의 거대한 검이 볼품없이 굳어 있는 유명우를 가리켰다.

“오간 이야기가 있으니 당초 말한 대로 저 오줌싸개 놈만 받아 가도록 하지. 이거 본주가 아주 관대하게 양보해 주는 거야. 너네 다 죽이고 튀면 될 것을 칼질까지 했는데도 넘어가 주겠다잖아. 작정하고 싸울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이쯤 하자고.”

“흐이익!”

지목을 당한 유명우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무복의 사타구니 부분이 아예 푹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 지리다 못해 실금까지 한 것 같았다.

조 무사와 이연은 선택을 기다리듯이 구양선을 돌아보았다. 등 뒤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수십 명의 산적들이 상단의 일반 무사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전부 소득 없는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럴 바엔 죽어도 같이 죽는 편이 낫습니다.

동문을 버리고, 의뢰인의 의지마저 무시해 가며 살아남는 것만을 관철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구양선은 또 고민을 거듭했다. 알겠다, 그 한 마디가 쉬이 나오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하고 정직한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스승마저도 답답하다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결국 성격 급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남자가 먼저 혀를 차며 검을 추켜올렸다.

“이런 썅, 기다려 주다가 날 새겠네! 그럼 받아 간다!”

“안……!!”

투박하지만 잘 벼려진 검날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 빛났다. 구양선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유명우의 앞을 막아섰다.

그를 본 남자의 얼굴이 귀찮다는 듯 일그러졌지만 내리긋는 검의 속도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분명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그의 검이 이상하게도 너무나 선명했다. 세상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탈색됐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어 그런 것 같았다.

구양선은 아무것도 못 한 채 자신의 몸을 가르기 위해 내려오는 검을 멀거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솨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높게 자란 나무들을 뒤흔들었다. 진녹색의 나뭇잎들이 파르르 흔들리며 서로 부딪치다 가지에서 떨어져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산의 모든 나무들이 저마다 아우성을 쳤다. 한순간 몰아친 바람은 옷깃을 파고들어 전신을 차갑게 식힌 뒤 빠져나갔다.

자연의 조화라고 하기엔 시기와 규모가 너무나 작위적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상황을 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는 구양선도, 백호철도, 난위정도, 그리고 한창 싸우고 있던 모든 무사와 녹림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뭐, 뭐지?”

한차례 자리를 휩쓸고 지나간 바람이 잦아들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지내는 녹림의 사람들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무기를 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변은 구석에서부터 일어났다.

“컥……!”

“뭐, 뭐야!”

녹림 진영의 가장자리에 있던 추레한 행색의 남자가 갑자기 눈을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때가 낀 손톱으로 목을 벅벅 긁더니 뒤로 철퍼덕 쓰러져 전신을 덜덜 떨었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대경실색을 하며 쓰러진 남자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순차적으로, 빠짐없이.

녹림도들이 하나둘씩 목을 부여잡고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크억……!”

“어억…… 큭, 헉……!”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적들이 저절로 무력화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한 무사가 중얼거렸다. 자발적으로 병장기를 집어 던진 뒤 등을 보이고 부리나케 달아나던 녹림도 몇 걸음 가지 못해 엎어져선 발작을 했다.

미신을 믿는 짐꾼 몇 명은 짐을 내려놓고 벌써부터 숲을 향해 연신 절을 하고 있었다.

당황스럽기는 녹림왕 백호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분명 누군가가 무엇을 했는데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지나간 바람에 수작을 부렸다면 녹림의 일원들만 저렇게 콕콕 짚어 쓰러질 수 없다. 그렇지만 이상한 점은 바람밖에 없다.

백호철은 황망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 끝에, 멀리 필부들 사이에서 홀로 오연히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걸렸다.

“……!”

새하얀 무명옷을 입고 등에는 약함을 진 채 죽립을 매만지고 있는 남자.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백호철이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의 짓이다.

백호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터질 듯 벌게졌다. 남자를 가리키며 고함을 지를 듯 폐를 부풀렸다.

그러나 목 끝까지 차오른 노성(怒聲)은 소리가 되어 나가지 못한 채 꽉 틀어막혔다.

“……커헉!”

머리에 피가 쏠리고 숨이 막혔다.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며 얼굴에 핏줄이 곤두섰다. 관절이 뻣뻣해지고 근육이 천천히 굳어 갔다.

백호철은 검을 놓치고 목을 움켜쥔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눈으로 사람을 죽이기라도 할 듯 원망과 분노가 압축된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귀신같은 수법으로 독을 쓴 흉수는 가증스럽게도 얼굴을 가리고 있어 이쪽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방금까지 갖고 놀던 버러지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원인을 찾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백호철은 사력을 다해 남자를 노려보며 입을 뻐끔거렸지만 뜻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 자식이야.

저 자식이라고…….

웬만한 독은 듣지도 않는 강골에 절정의 실력까지 갖춘 백호철의 몸이 결국 앞으로 허물어졌다.

그를 끝으로, 땅 위에 제대로 서 있는 녹림은 아무도 없었다.

초윤은 난처하게 죽립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얼굴을 가렸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실처럼 가느다랗게 퍼졌던 독기가 입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무색무취의 독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짜 큰일 났다.

다급한 마음에 일을 쳐 버렸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죽은 거야?”

바닥에서 바르르 경련하고 있는 녹림 무리에게 아무도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와중, 무사들의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난위정이 몸소 나아가 정신을 잃은 백호철의 맥을 짚었다. 그리고 몇 명의 눈동자와 입 안을 더 확인한 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살아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에 당한 것 같네요. 그것도 극독은 아니고, 마비산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이게…… 마비산입니까? 절정 고수를 이렇게 무력화시키는 마비산이라니 사천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흰독말풀을 넣어 만드는 마비산은 의원들이 외과 수술을 시행할 때 마취제로 쓰는 약물로, 무림에서는 꽤 흔하게 쓰이는 독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는 보조제일 뿐이었으며 절정에 이른 고수들에게는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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