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객잔을 대관하고 짐을 풀자 피곤한 인부들이 하나같이 식당에 늘어졌다. 다들 식사만 하고 나면 쓰러져 잘 것 같았다.
초윤은 이때다 싶어 가져온 커다란 호리병 몇 개를 꺼내 들었다.
“근육통에 좋은 골담초로 담근 술입니다. 한 잔씩 드릴 테니 드십시오.”
“우오오!”
“술! 술!”
꽉 눌러두었던 마개를 열자 쌉싸래한 향이 알싸하게 퍼졌다. 피로에 찌든 사람들의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초윤은 탁자를 돌며 모두의 잔에 두 모금 정도의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 겨우 이만큼?”
“식전주 겸 약주입니다. 이만큼이 적정량입니다.”
“스승님, 저도 도울게요!”
“앉아 있으렴. 애는 술을 마시는 것도 따르는 것도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착한 아이들을 한마디로 앉힌 초윤은 바지런히 식당을 돌아다녔다. 잔에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사람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에퉤퉤, 쓰잖아!”
“그려? 난 좋은디. 향을 맡어 봐, 향을.”
“골담초는 쓰고 매운 약재입니다. 대신 먹는 동안 특별히 자제해야 하는 음식은 없으니 편히 드십시오.”
몸에 좋다는 말에 다들 인상을 쓰면서도 남김없이 잔을 비웠다. 몇몇 사람들은 마시자마자 속이 뜨끈해지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초윤은 새로운 호리병을 들고 상단주 난위정과 호위 무사 조우일, 그리고 화산의 구양선이 모여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이쪽에 계신 분들께서는 근육통을 보하는 약재보다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실 것 같아 따로 준비했습니다. 사군자탕(四君子湯)입니다.”
“아, 형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님에 해당하는 구양선부터 차례로 난위정, 조우일에게 따라 주자 공손히 받은 이들이 잔을 입에 댔다. 조우일이 술이 아닌 것에 살짝 실망하는 기색이 보여 마개를 닫으며 덧붙였다.
“인삼과 감초, 복령과 백출을 달였으며 위장을 보호하고 기를 더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과로를 하면 위장의 벽부터 얇아지는 법이니 모쪼록 보중하십시오.”
특히 너, 난위정. 하루 종일 이만한 인원을 이끌고 산을 넘는다 산적을 상대한다 여관을 잡는다 난리도 아니었으니 제대로 관리를 해야지.
‘초윤’의 무심해 빠진 심성은 몰라도 약학 실력은 믿을 만했다. 혹시 팔 일이 있을까 싶어 주렁주렁 갖고 온 것이 도움이 되어 은근히 기분 좋기도 했다.
마개를 다시 꾹꾹 눌러 닫고 있자, 구양선이 긴 의자를 조금 옆으로 비켜 앉았다.
“감사합니다, 약사님. 동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형님, 어서 앉으세요.”
……생글생글 웃는 난위정까지 가세하자 거절하기가 어려워졌다.
고개를 돌려 아이들이 있는 쪽을 보니 이미 같이 앉은 어른들과 화기애애하게 말을 튼 것 같았다. 시선을 느끼고 귀신같이 고개를 돌린 천오에게 편히 있으라며 손짓하고는 구양선의 옆에 앉았다.
“다른 도사님들은…….”
“아, 유 형과 이연은 따로 여독을 풀고 싶다며 방에 있겠다 했습니다.”
하기야, 창피해 죽겠지. 대화산의 제자가 자비롭게도 상단 따위를 호위해 준다는 마음가짐으로 와선 오줌싸개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기척을 느끼고 혹시나 싶어 말을 꺼낸 것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그 자체였다. 구양선까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다들 조용히 유명우를 비웃었을 게 분명했다. 지금도 꿈틀거리는 조우일의 입꼬리를 봐서는 이미 늦은 듯싶기도 했다.
구양선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잔에 미지근한 물을 채워 단번에 넘겼다.
“유 형의 무례에 관해선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단주님. 그 형이 워낙…… 대접을 받다 보니 아직 미숙한 면이 많습니다. 자주 지적을 들어도 고칠 생각은 없어 보였는데, 이번에 아주 호되게 당했군요.”
“무례라니요. 먼 곳에서 기꺼이 저희를 보호하러 와 주신 도사님들께 감사한 선물을 했을 뿐입니다.”
“그 선물이 도사로서는 탐내선 안 되는 당연한 것들인데 말입니다.”
민간인들의 술자리에서 입에 담기에는 민감한 말이었다. 어찌 보자면 자신이 소속된 화산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었지만, 구양선은 거침이 없었다.
화산의 명예를 고민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화산의 위명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전과 같지 않은데 이름이 여전히 드높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지요. 단주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울적하게 웃으며 잔을 매만지는 구양선의 곰 같은 손 위에 난위정의 손이 가볍게 겹쳐졌다. 생김새로만 보자면 구양선보다도 어릴 것 같은 위정은 한 점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의 손을 도닥였다.
“세상이 혼돈하면 사람 또한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화산에 구양 대협과 같은 인물이 있으니, 다시 일어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미래의 가능성이 창창하신 분 아닙니까.”
난위정의 위로에 감명을 받았는지, 구양선이 묵묵히 시선을 내렸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초윤은…….
‘부, 불편하다.’
이 자리가 심히 불편했다.
흡사 기밀이 오가는 남의 회사 미팅에 잘못 참석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끝에 있는 안강이라 해도 여전히 섬서성 안쪽인데 화산의 민감한 이야기를 하다니. 작중에서 묘사되는 화산의 자부심을 생각하자면 이 자리에서 오간 말이 조금만 왜곡되어 퍼져 나가도 피를 볼 게 자명했다.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난위정이 저렇게 동요 하나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역시 난놈이었다. 싹싹하고 능력 있고 똑똑하고, 또 제 사람을 아끼는 면모도 있으니 사천행을 결심하길 잘했다 싶었다. 사천당문의 봉문만 사라지면 앞길이 창창해질 테니까.
초윤만 혼자서 어색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자 드디어 주방에서 주문한 요리가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다. 밀 음식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섬서성답게 면 요리가 주를 이뤘다. 이외에도 푹 찐 민물 생선이나 데친 새우, 볶은 채소가 있었다.
‘초윤’은 아주 맵고 신 것 아니면 아예 심심한 것을 좋아하는 극단적 미각의 소유자였다. 입맛은 몸을 따르는 건지, 지금의 초윤도 식초와 마늘을 잔뜩 사용하는 섬서성의 요리가 입에 맞았다.
허기진 사람들이 줄줄이 나온 음식을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얼른 먹고 들어가서 자자!’라든지, ‘내일도 한참 걸어야 하니까 술은 작작 하라고!’ 같은 말이 들려왔다.
초윤 역시 자극적인 맛이 기대되는 마음 반,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게 됐다는 마음 반으로 내심 희희낙락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선 그릇을 가슴 높이로 들고 면을 집어 먹는 올바른 자세였다.
이런 단정한 몸가짐이 처음부터 몸에 배어서 그런지 초윤에게는 느슨히 앉거나 비스듬히 축을 기울이는 자세가 오히려 불편했다.
말없이 세 젓가락쯤 집어 먹었을까.
초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맞은편의 난위정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초선 형님. 식사를 하실 때만큼은 죽립을 벗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젠 죽립이 너무 제 몸처럼 여겨져서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초윤은 반사적으로 죽립을 꾹 내리누르려는 손을 멈췄다. 여기서 이걸 건드렸다간 아주 기를 쓰고 얼굴을 가리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필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얘는 왜 이제 와서 이런 걸 물어봐? 둘이서 밥 먹을 때는 잘만 넘겼으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자연스럽게 알려 주려고 이러는 건가?’
“……흉한 낯을 하고 있어 보여 드리기 저어됩니다. 궁금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초윤은 조금 과할 정도로 딱 잘라 단호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모름지기 사람이란 안 된다 하면 더욱 하고 싶어지는 호기심의 동물인지라, 구양선을 비롯해 주변 탁자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인부 몇 명이 초윤에게 궁금증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아, 죄송합니다. 불편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여쭈었던 것뿐입니다. 괘념치 말고 어서 드세요.”
“……예.”
금세 사과를 해 오는 얼굴이 말끔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그저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려 한 걸지도 모르겠다.
참한 청년이라는 생각은 취소다. 이런 여우 같으니.
초윤은 연이어서 나오는 부담스러운 대화 주제를 바꾸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녹림의 우두머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구양 대협의 도움을 받아 꼼꼼하게 점혈을 한 뒤 광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무사 분들이 절반씩 번갈아 가며 지키고 있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걱정은커녕 얌전히 점혈을 받고 찌그러져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장본인이다. 초윤의 독과 이를 다루는 방식은 작가의 판타지가 가미된 만큼 독특하고 강력했으니 원작에서도 주인공의 전투력 측정기로 쓰이는 백호철 따위는 간파하기 어려웠다.
백호철에 대한 말을 꺼내자 대화의 흐름은 예상한 대로 흘러갔고, 곧 주변으로 번졌다.
검을 맞대 보니 흔한 강자가 아니던데, 그런 녹림이라면 녹림왕 백호철밖에 없지 않은가. 백호철이 왜 이곳에 혼자 와 있겠냐. 아무래도 지나가던 신수가 도와준 것 같다. 아니다, 은거 기인이다. 어느 쪽이든 오늘 운 좋게 목숨을 보전한 건 똑같지 않냐.
고단한 이들이 왁자지껄하게 갑론을박을 벌였다. 어른들이 술 마시고 목소리 높이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 애들은 얼른 데리고 들어가서 재워야 할 것 같았다.
초윤은 이제 당연해진 아이들 생각을 하며 백주 잔을 기울였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