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다음 날 아침, 무사 몇 명을 대동한 난위정이 객잔으로 찾아왔다. 상단을 정리하는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거나 약선 초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다는 이유인 것 같았다.
초윤은 부랴부랴 아이들을 준비시켜 바깥으로 나갔다. 사천당문은 조금 동떨어진 곳에 있긴 해도 다행히 산을 오를 필요는 없었다.
가까운 곳에 장이 섰는지 오늘은 어제의 낮보다 거리가 복작복작했다.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혼잡한 도심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문득 익숙하면서도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어딥니까?”
“아, 문 닫은 지 한참인 집안을 왜 시장에서 찾아! 향채 안 살 거면 장사 망치지 말고 저리 가!”
초윤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선 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초윤의 귀에만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
의아한 듯 물어 오는 난위정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고 안력(眼力)과 기감을 예민하게 끌어 올렸다. 그러자, 시장의 저 끝에서 겸연쩍게 뒷목을 매만지며 서성거리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매몰차게 문전 박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게에 찾아가 끈질기게 말을 붙였다.
“저…… 실례합니다만, 사천당문이 어딥니까?”
“그런 꼬락서니로 당문은 왜 그리 찾으시우? 일단 저짝에 있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다지 친절하다고 할 수도 없는 말에도 몇 번씩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남자는 초윤과 일행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초윤이 바라보고 있던 곳을 함께 주시하던 난위정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
며칠 사이 거지꼴이 된 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든 몸을 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남자.
구양선이었다.
“하, 하하,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구양선을 안강에 떼어 놓은 장본인인 위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반면 원작을 읽어 구양선의 우직한 성격을 알고 있는 초윤은(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내심 한숨을 푹 쉬었다.
“가만두실 겁니까? 이대로 가다간 당문의 대문을 두드릴 것 같습니다만.”
“아, 그럼 안 되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형님.”
정신머리를 챙긴 위정이 조 무사와 함께 서둘러 구양선에게 다가갔다. 초윤은 아이들을 데리고 도로변으로 물러나며 그를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구양선은 위정을 보자마자 시장 바닥에 몸을 날려 오체투지를 했다.
털썩!
“난 단주님, 죄송합니다!!!!”
“아, 아니, 도사님, 왜 이러십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장터에 울렸다. 한순간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난위정은 처음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구양선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구양선은 거대한 덩치만큼 무게도 엄청난지 위정이 아무리 팔을 잡아 올리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가 아둔하기 그지없어 화산파의 속셈도 모른 채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한 몸이 화산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또 화산을 용서해 달라 몰염치하게 청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사죄를 해야 할 것 같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거든요. 일단 일어나셔서…….”
“죄송합니다!!!!”
업보다, 이놈아…….
초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위정을 보며 다소 고소한 웃음을 삼켰다. 객관적으로는 당한 게 없지만 주관적으로는 아직 쌓인 게 있는 초윤으로선 꽤 통쾌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목이 집중되는 지금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화산과 당문의 사이가 나쁜 건 공공연한 일이었지만, ‘화산파의 속셈’과 ‘화산파 소속 도사의 공개 사죄’ 같은 주제는 분란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위정이 구양선을 일으킬 길은 요원한 것 같았다. 결국 초윤은 남몰래 슬쩍 수면독이 담긴 숨을 불었다.
“……흐억!”
구양선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순식간에 소리 소문 없이 곯아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구양선을 등에 업은 조우일과 난위정이 초윤의 일행으로 돌아왔다. 위정은 초윤을 보며 평소처럼 웃었지만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것을 보아 곤욕을 치른 것 같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더 소란스러울 일은 없을 테니 어서 가시죠.”
글쎄다. 과연 그럴 일이 없을까.
초윤은 몸을 돌리며 세상모르게 잠든 구양선을 힐끗 보았다. 어째선지, 저 남자가 앞으로도 난위정의 평탄하고 자신만만한 인생을 자꾸만 뒤흔들 것 같았다.
◇
봉문 중인 사천당문의 정문으로 들어갈 순 없어, 일행은 샛길로 난 뒷문을 택했다.
뒷문보단 비밀 문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복잡했다. 먼저 당문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대나무 숲의 중간으로 들어가 허름한 오두막을 찾고, 오두막의 바닥에 난 문을 통해 지하로 이어진 길을 한참 걸어간 뒤에야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지하에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는 천오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초윤은 그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엄지로 손등을 쓸어 주며 최대한 걸음을 빨리했다. 앞서 걸어가는 남매는 땅을 파서 만든 길이 마냥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이 각이 지났을 때 드디어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먼저 나간 무사들이 열어 주는 문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자, 드디어 사천당문의 내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약선 어른.”
“어서 오십시오.”
……상당히 부담스러운 환영 인사도 덤이었다.
올라오기 전부터 감지하곤 있었다. 그래도 진녹색 무복을 맞춰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로 잰 듯 열을 맞추어 선 채 깍듯이 고개를 숙여 포권을 취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과 기척으로 느끼는 것은 달랐다.
저쪽이 저렇게까지 예를 취하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초윤은 가볍게 손을 내저은 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죽립을 벗었다.
“세상에…….”
“허어…….”
올려 묶었던 머리카락이 휘청휘청 풀어져 내리자 곳곳에서 조그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젊은 얼굴에 노인 같은 백발을 지니고 있으니 탈색도 없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놀랄 만도 했다. 아무래도 20년 만의 방문인 만큼 초윤을 처음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어르신들 뵙는데 모자를 쓰고 있으면 안 되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초윤은 쑥스러울 뿐이었다.
환대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입이 열리질 않았다.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늘어선 사람들을 둘러보자,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진한 녹색 비단 무복을 입은 노인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걸어 나와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약선 어른.”
사마귀가 우둘투둘 난 눈가와 찡그린 채 주름이 잡힌 미간, 그리고 좋은 말을 하는데도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칼칼한 목소리.
‘초윤’의 기억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이자가 바로 사천 제일의 패자, 독과 암기로는 중원의 어느 곳도 따를 수 없다는 사천당문의 문주임과 동시에 한 방울로 수많은 목숨을 결정지을 수 있다 해서 일적결(一滴決)이란 별호를 가진 당염초였다.
동시에 사천당문의 독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나서 사사건건 ‘초윤’과 마찰을 일으켰던 괴팍한 노인네기도 했다. 일적결은 독이 한 방울이라도 필요했지만, 약선은 형태 없는 독으로 사람들을 쓰러트렸으니까.
평생 동안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매진했는데 약선이라는 은거 기인 한 명이 꼬박꼬박 자기 위로 거론되면 짜증이 나기도 하겠지…….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당한 적의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 부담스러운 자리에 서서 계속 인사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초윤은 눈을 내리깔고 나직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괜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이리 올 일도 없었겠지. 인사치레나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생각도 없었다…….
양심이 아팠지만 ‘초윤’의 몸을 빌리고 있는 이상 정하윤의 유교적 마인드와 노인 공경 정신은 잠시 접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새파랗게 어려 보여도 ‘초윤’은 이백 년을 넘게 산 무림 고수였으니 이런 대접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염초를 비롯한 당문의 사람들은 ‘초윤’의 무심하고 냉한 성격을 미리 들었는지 특별히 불쾌하게 여기진 않는 듯했다. 당염초는 포권을 취한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약선 어른. 그나저나…….”
당염초의 탁한 눈이 초윤의 곁에 조르륵 서 있는 아이 셋을 향했다.
“말로만 듣던 약선 어른의 제자인 모양입니다. 내포한 기운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걸출한 것이, 당금의 무림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의 인재로 보입니다.”
‘아차!’
내용만 보자면 칭찬 일색이었지만 당염초의 목소리에선 불쾌한 기색이 가득 묻어났다.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지 않는답시고 학번 꼰대 짓을 하던 선배들과 꼭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