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막 산에서 내려온 참이라 아직 모르는 게 많다며 실드를 치려는데, 눈치 빠른 사영이가 먼저 포권을 취하며 냅다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당 대협! 말로만 듣던 당문의 초대를 받게 되어 잠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정신을 팔고 있었습니다. 독공의 대가를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 영광입니다.”
“…….”
사영이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멀뚱히 서 있던 사현과 천오도 따라 포권을 취했다. 무협지의 세계관은 명예와 서열을 지독하게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인사 한 번 잘못했다고 칼부림이 나는 경우도 흔했다. 사영이가 아니었다면 아이들의 첫인상이 완전히 망할 뻔했다.
‘뭐, 초윤의 제자라는 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미운털이 박히긴 했겠지만…….’
초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이런 곳에 더 있다간 체할 것 같았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가르칠 시간을 절약했으니 그리 보이겠지. 건넬 말이 있어 왔다. 서둘러라.”
“예, 자리를 만들어 두었으니 약선 어른께선 이쪽으로 오십시오. 위정아, 너는 무엇을 달고 온 게냐. 똑바로 처신하도록 해라.”
“예, 문주님.”
“운금아, 너는 약선 어른의 제자 분들이 무료하시지 않도록 당문의 전각과 기물을 보여 드려라.”
“네, 할아버지!”
당염초의 마지막 말에 명랑하게 대답한 건 열 살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동그랗게 묶은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대열에서 쏙 튀어나와 사영의 손을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언니, 언니! 이쪽으로 와 봐요!”
“어, 엇?”
친화력 좋은 아이가 처음부터 언니라고 부르며 들이대자 당황한 사영이 초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초윤도 초윤 나름대로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운금? 당운금?’
〈귀환영웅〉의 히로인 중 하나인 당운금?
‘초윤’이 치료하는 바로 그 당운금?
무협지에서 주인공 세대의 무림인 중 용모가 빼어난 여성들을 묶어 무슨 봉(鳳)이니 몇 미(美)이니 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다. 특히나 ‘사천당문이라는 폐쇄된 환경에서 자라 주인공 같은 타입의 남자를 처음 겪어 보는 미인’은 무협지를 읽는 남자들에게 꾸준히 인기 있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귀환영웅〉 역시 그 도식을 정확히 따라 했다.
‘하여간 똑똑하고 도도한 여자가 나한테만 푼수 기를 보여 줬으면 하는 망상은 버리질 못하지…….’
당운금은 정하윤이 식은 눈으로 〈귀환영웅〉의 페이지를 대충 넘기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사천당문의 사랑받는 막내라면서, 또 우수한 독공으로 촉망받는 무림인이라면서 마교와 남궁세가의 수작에 매번 걸려 들어가는 전개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다 중후반부에 당문에서도 해독하지 못하는 독에 걸려 약선 초윤을 찾게 되는 부분에선 설정의 조잡함에 기함을 했다.
게다가 말만 하면 앞쪽에 ‘흥!’ 하는 코웃음이 들어갔고, 주인공이 뭔가 한 마디만 하면 얼굴이 빨개져선 말을 더듬고 괜히 화를 내기도 했다. 읽는 내내 한숨이 다 나왔다. 작가가 정말 여성이라곤, 아니, 사람이라곤 만나 본 적이 없는 부류의 인간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당운금은…….
‘아직 어려서 그런가? 원작 성격처럼 이상하게 퉁명스럽거나 까칠하진 않아 보이는데?’
태어나서 처음 외부인을 만나 잔뜩 신이 난 듯한 아이는 오히려 귀엽기만 했다. 초윤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사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는 금방 끝날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위험한 것 만지지 말고,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도 말고. 또 동생들을 부탁한다, 사영아.]
당부하는 전음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영은 초윤을 보며 알았다는 듯 잠시 꾹 입을 다물더니 곧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운금을 돌아보았다.
“네, 당 소저. 잘 부탁드려요! 현아야, 천아야. 가자!”
“으, 응!”
“…….”
스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오도 초윤이 조용히 끄덕이자 아이들과 함께 저편으로 사라졌다. 초윤은 그제야 당염초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기가 빨려 흐늘흐늘해질 것만 같았다.
당염초가 초윤을 데리고 간 곳은 회의실도 아닌 본인의 전각이었다. 녹주각(綠柱閣)이라고 쓰인 현판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거대한 건물은 오로지 사천당문의 문주만을 위해 지어진 곳이었다.
‘무협 소설은 확실히 판타지에 가깝구나…….’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웅장한 자태였다. 붉은색으로 칠한 굵은 나무 기둥은 검은색의 기와지붕을 굳건하게 떠받쳤고, 하늘을 찌를 듯이 위로 치솟은 처마는 사천당문의 자존심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당염초의 뒤를 따라 전각의 안으로 들어가서도 초윤의 신기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종이를 바른 격자문으로 닫아 둔 방마다 익숙한 약초의 냄새가 풍겨 왔다. 당염초의 끈질긴 성격으로 볼 때 독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전각 가장 안쪽에 있는 개인실로 들어서자 당염초가 꼼꼼히 방의 문을 걸어 잠갔다. 활짝 열려 있던 둥그런 창문도 전부 닫고 내공을 전개해 차음막까지 펼쳤다.
내가 온 게 어지간히 보안을 지켜야 할 일인가 보다. 초윤이 떨떠름하게 생각했을 때, 당염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초윤의 예상을 초월했다.
“위정을 따라오신 것을 보아하니, 역시 약선께서도 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게 맞나 봅니다. 누구입니까? 제갈세가는 위정이가 다녀왔으니, 결패도 팽치정 그 애송이입니까? 아니면 땡중 그놈입니까?”
갑자기 웬 신물?
난 그냥 20년 전에 초윤에게 철저히 개박살 난 사천당문의 문주를 잘 어르고 달래서 봉문만 풀어 주려고 왔는데?
‘초윤’이 저질러 놓고 뒷수습은 안 한 일을 정리하러 온 것뿐인데?
알아듣지 못할 소리에 뻣뻣하게 굳은 초윤을 눈치 못 챈 당염초는 방 한가운데에 자리한 의자에 앉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아집과 자존심이 가득한 문주의 모습을 벗고 근심 가득한 70대 노인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난위정 그 약아빠진 놈이 약선께 주제넘은 청을 했다는 것은 전해 들었습니다. 못난 놈. 제 할애비의 속도 모르고……. 안 그래도 봉문은 조만간 풀 생각이었습니다. 약선께서도 이를 아시니 확답을 하지 않으신 것이겠지만……. 아, 이런. 앉으시지요.”
봉문을 곧 풀 생각이었어?
아니, 원작에서는 이미 풀려 있었으니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스토리가 시작할지는 모를 일이라 조금이라도 빨리 철회하게 만들려고 했다. 난위정의 단금상단을 비롯한 사천의 사람들이 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근데 난위정의 할아버지는 또 당염초라고?
머릿속이 새하얘진 초윤은 주춤주춤 당염초가 권하는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초윤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당염초는 주절주절 신세 한탄과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위정과 제가 범한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약선 어른.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지만 맘이 편치 않아 그렇습니다. 세간에 제가 어떻게 알려진 건지, 그런 식으로 괴팍한 흉내를 내지 않으면 장로들이 저마다 당문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며 앓는 소리를 내지 뭡니까. 덕분에 저만 민망해서 낯을 들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어, 어어…….
그냥 노인네가 떠받들리고만 살아서 꼰대가 다 됐네 생각하기만 했지 그렇게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위정이 그놈은…… 제 못난 둘째 아들놈이 전속 상단의 여식과 외도를 해 나온 손주입니다. 어린 것이 싹수가 보여 열심히 키워 봤건만 당가의 일원이 되기는 싫다고 끝내 입적을 하진 않지 뭡니까. 그래도 당문의 문도이며 제 핏줄이니 끝까지 책임은 질 생각입니다. 참, 차를 대접하는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 그랬구나. 좀 과한 개인 정보인 것 같긴 한데…….
당염초의 개인실에 들어온 지 반 각도 안 돼서 남의 집 사정을 줄줄이 들은 초윤은 좀 멍한 기분이었다. 딱히 알고 싶진 않았지만 알고 나니까 약간 이해가 가기도 했다.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쉰 당염초는 다기를 가져왔다. 주전자의 옆을 지그시 만지는 것으로 물을 끓이고 찻잎을 우린 뒤 따듯하게 데워진 잔을 초윤에게 건넸다. 초윤은 잔을 받아 바싹 마른 입 안을 서둘러 축였다.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의 가공할 내력으로 끓여 나온 차는 완벽한 풍미를 자랑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당염초는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문을 키워 놓는 데에만 열중해 형제와 자식들의 머리가 어떻게 굳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지 뭡니까. 에잉, 아집만 가득 찬 것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겸허히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아득바득 자존심이나 세우려 굴다니. 에잉…… 쯧쯧.”
“……제 인생 전반을 바친 일이 남보다 못하다 여겨지면 그럴 수도 있겠지.”
“작금의 무림이 어떤 상황인데 더욱 정진할 생각은 못 하고……. 약선 어른께선 이미 20년 전부터 알고 계셨기에 저희에게 내실을 다질 시간을 주신 것이겠지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야 조금씩 보입니다. 하물며 제가 살아온 세월의 세 배를 살아오신 약선 어른의 혜안이니, 속이 드러날수록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양반은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약선에게 뭔가 큰 뜻이 있어 당문에게 공식적으로 문파를 걸어 잠그고 조용히 힘을 쌓을 시간을 주었다 생각하는 듯했는데, 떠오르는 ‘초윤’의 기억을 되짚어 본 초윤으로선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니야! 약선 이 인간 그냥 당문의 독에 살짝 흥미가 생겼을 뿐이야!’
입이 멀쩡히 뚫려 있어도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을 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