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크아아아악! 으어어어억, 그으아아아아아악!!!”
“…….”
“흐헉, 헉, 큭, 우아아아아악!!! 흐아아아악!!!!”
부…… 불편하다.
초윤은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맡겨 둔 죽립이 절실했다. 차마 눈을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다. ‘초윤’의 얼굴 근육이 굳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의 정신력과 몸이 아니었다면 이미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이 자리를 뛰쳐나갔을 것 같았다.
‘애들 눈에 청소년 시청 금지 붙을 만한 게 안 들어가도록 그 고생을 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지금이라도 다른 곳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니야?’
힐긋 고개를 돌려 보자 천오는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사현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사영이는 하품을 참고 있었다.
‘아니, 왜 다들 멀쩡해? 왜 다들 태연하지? 이거 애가 봐도 되는 것 맞아?’
좀 더 먼 곳을 보니 당문의 제자들은 좀 반응이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유심히 살피자, 그것이 측은지심이나 고통에 대한 공감과는 아예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보기에 안쓰럽고 왠지 미안할 정도로 바닥을 발발 기는 백호철을 관찰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독의 효과에 신기해하는 것 같았고, 또 죽고 싶을 만큼의 아픔을 주면서 실신을 하진 않도록 절묘하게 조제한 문주의 실력에 감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초윤은 정말 오랜만에 이곳이 무협지 속이라는 사실에 겁을 먹었다. 무공 실력이 약하면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해도 당연한 세상이 바로 이곳이었다. 주인공의 세력이 아니라면 고통스러워하다가 허무하게 죽는 것이 당연하고, 주인공의 일행이어도 각성 재료로 쓰여 목숨이 날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초윤도 ‘초윤’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조금 울적해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님, 눈을 감을까요?]
“……?”
초윤은 아이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이쪽을 올려다보는 천오의 눈은 초윤의 얼굴에만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말에 의아한 초윤이 나직하게 물었다.
[눈을 감는다니?]
[스승님께선 저희가 무자비한 행위를 보게 되는 것을 꺼리시잖아요.]
그래서 심기가 상하신 것일까 하여. 아이가 덧붙였다. 초윤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천오의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울컥 터질 것 같았다. 괜히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이 어쩜…… 기특한 아이인지. 초윤이 결국 참지 못하고 천오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이리 예쁜지. 배려 깊고 착한지.
그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초윤의 육아법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이제 와서 무협지 속의 당연한 사고방식을 걱정하며 방침을 바꿔 봤자 혼란만 가중할 게 분명했다.
힘이 전부인 세계라면 누구도 딴죽을 걸지 못할 만큼 강하게 키우면 될 일이었다.
초윤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아이 셋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울하던 기분은 싹 가신 지 오래였다.
[눈을 감거라. 나는 너희들이 타인의 고통에 익숙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남매와 천오가 재깍 눈을 감았다. 초윤은 그 주변으로 얇은 차음막을 둘러 백호철의 비명 소리가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했다. 일각을 넘도록 이어지던 소리가 끊겼지만 궁금한 마음에 눈을 뜨는 아이는 없었다.
스승의 소슬바람 같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사람이 사람으로 있기 위해선 인정이 있어야 한다.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내 것이 아닌 고통에도 공감하며 가엾게 여기는 마음, 힘들어하는 이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 이것을 모아 인정이라고 한다.]
조금 고루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아이들은 고맙게도 집중해 주고 있었다. 초윤은 경합의 승리와 독의 효과에만 정신이 팔린 채 공개적으로 고문을 당하는 사람에겐 관심이 없는 당문을 홀로 주시했다. 저 모습이 이곳에선 흔하고 마땅하다 해도 제 아이들은 그리 자라질 않길 바랐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무조건 옳다, 옳지 않다로 구분할 순 없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말했듯이 단 하나뿐이다. 누군가의 아픔에 무뎌지지 말거라.]
물론 백호철이 결백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죄의 유무를 따지는 것보다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을 잘 가려 주는 것이었다.
세 아이는 초윤의 말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는 강론에도 군말 없이 수긍해 주는 것을 보니 고마웠다. 초윤은 내심 작게 웃은 뒤 단상의 모래시계를 보았다. 연한 색의 모래가 점점 동이 나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 톨이 떨어지고, 진행을 맡은 장로는 감출 수 없이 아쉬운 얼굴로 당염초의 차례에 끝을 선언했다.
“에잉……. 아깝구나, 아까워. 딱 일각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성공했을 텐데. 내 역작에 가까웠는데 말이다.”
당염초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그의 말대로, 백호철은 어찌어찌 그 모든 고통을 견뎌 내긴 했으나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머리로 피가 쏠려 얼굴은 아직도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몸의 이곳저곳은 간헐적인 경련으로 퍼덕거렸다. 시간이 끝나면서 마취혈을 짚어 아픔을 가라앉혀 주었지만 반쯤 떠난 정신이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듯 눈도 까뒤집고 있었다.
이대로는 진행이 어렵겠다 판단한 장로가 일시적인 휴식을 선언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당문의 사람들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초윤은 차음막을 걷었다. 눈을 뜬 아이들은 스승의 차례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자 꽤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이각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약을 쓰지 않는 처치를 받은 백호철이 드디어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 밑이 시커멓게 죽은 것이 20년은 늙어 보이는 안색이었다. 경합장으로 막 끌려왔을 때의 모습이 지치고 낡은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삼도천에 한 발을 걸친 사람 같았다. 자꾸만 초윤을 힐끔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앞으로 이어질 초윤의 고문을 견디는 것보단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관중석은 다시 하나둘씩 채워졌고 장로는 모래시계가 놓여 있는 단상의 앞으로 나아가 목청을 높였다. 경합의 재개를 알리는 목소리였다.
“자, 기다리던 다음 차례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마디만 하겠소. 나는 이자의 기개를 존중하오.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던 독을 견디는 것을 보아하니 쌓아 올린 무공의 경지와 자기 수양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이다. 사도의 무리를 이끈 죄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는 무도를 걷는 자로서 존경을 받아야 하오. 행여나 이 경합이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하더라도 헛된 일은 아니리라 생각하오.”
옳소! 옳소! 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자신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 준 당염초면 몰라도 당문 자체에 대한 감정은 꽤 비딱해진 초윤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시간이 촉박했다’는 단서를 달아 자백을 이끌어 내지 못한 문주를 변호하고, ‘이걸 견디다니 백호철의 무공이 상당하다’고 실패한 독을 추켜올리면서 ‘무승부’까지 함께 입에 담아 초윤을 도발하는 말.
솔직히 경합이 시작되기 전까진 초윤은 당문을 그저 안쓰럽게 여겼다. 뜬금없이 나타난 과한 설정의 은거 기인 때문에 평생 노력한 분야에서 일인자의 자리를 차지하지도 못하고 눈치 없는 ‘초윤’ 때문에 자존심까지 박살 난 것을 알아 괜히 미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여러 일이 겹치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20년 전 첫 경합을 제시한 것도 자기들, 진 것도 자기들, 딱히 하라고 한 적 없는 봉문을 한 것도 자기들, 또 실패한 것도 자기들이면서 왜 초윤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집단의 질투는 꽤 추하구나. 애들한테도 웬만하면 엮이지 말라고 해야겠다. 〈귀환영웅〉에서 주인공의 편에 선 사천당문이 이 정도면 남궁세가나 화산파 같은 애들은 얼마나 심각한 거야. 그냥 규모가 큰 무림 세력이랑 같이 다니지 말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드디어 약선 대협의 차례를 시작하겠소. 대협, 가르침을 청하오.”
“가르침을 청합니다!”
장로가 초윤을 보며 포권을 하자 다른 당문의 사람들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초윤에게 인사를 했다. 경합을 막 시작했을 때와 다른 것은, 상석으로 돌아온 당염초까지 고개를 숙여 포권을 했다는 점이었다.
초윤은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차분히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가당찮은 수작에 나를 이용하는 것도, 미천한 열등감을 꺾지 못해 모욕을 일삼는 것도 이번만은 용납해 주겠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이렇게까지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