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나마 괜찮은 대화를 나누었던 당염초가 힉 숨을 삼키며 초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미 열려 버린 초윤의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초윤’이 원래 사천당문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조금 섞여 들어간 것 같았다.
초윤은 옆의 탁자에 놓인 흰 찻주전자를 들어 뚜껑을 열었다. 도자기로 만든 아담한 다관에는 연녹색으로 우러난 매화꽃 차가 반쯤 담겨 있었다.
찰랑이는 수면을 잠시 응시하다가 그대로 손목을 돌려 바닥에 차를 쏟아 버린 초윤이 말했다.
“하지만 명심해라. 다음은 없다.”
“…….”
경합장에 어수선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말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이제 진정으로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윤의 관용이 끝났으니, 지금부터는 조금만 실수해도 약선이라는 거물과 척을 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담담한 말 한마디로 사천당문에 파문을 일으킨 초윤은 찻주전자와 마찬가지로 빈 찻잔 두 개를 다른 손에 들었다. 그리고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걸음으로 상석을 내려가 백호철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바닥에 발을 디뎠다.
“탁자와 의자 두 개를 이곳에 놓아두어라.”
초윤은 간단한 지시를 내린 뒤 깨끗한 물을 물 주전자에 담아 화로에 올려놓고 눈엽각으로 향했다. 고문 대상과 겸상을 하고 함께 차라도 마시겠다는 것인가. 사람들의 의아한 눈빛이 초윤의 곧은 등에 달라붙었다.
초윤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큰 전각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모래시계가 거꾸로 놓이고, 독에 일가견이 있는 당문의 문도들은 장로나 제자 할 것 없이 전부 기대 어린 눈으로 전각의 문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약학에 있어서는 누구의 추종도 허하지 않을 정도로 통달했다는 기인. 그 손속이 어찌나 절묘한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다 하여 신선으로 불리는 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단번에 수십, 수백을 무력화시키는 독공의 고수.
그런 사람이 눈앞에서 만들어 내는 독은 과연 무엇이며 선택하는 재료는 어떤 종류일까.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반 각은커녕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바깥으로 나온 초윤의 손에는 단 한 가지 약재만이 들려 있었다.
“저게…… 뭐지?”
“무슨 뿌리 같은데…….”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초윤의 손에 들린 재료를 쳐다보았다. 검지나 중지만 한 크기에 울퉁불퉁한 연갈색의 뿌리는 흙이나 잔뿌리 없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아, 알았다! 낭탕근이야!”
“낭탕근? 그게 뭔데?”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독초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는 한 사람이 말하자 주변의 궁금증 어린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동기들에게 소곤소곤 기억나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낭탕근이…… 그게 그러니까 뭐시냐, 중원에서 나는 게 아닐걸. 해동이나 동영에만 있는 약재라고 하던데.”
“그런 게 눈엽각에 있었어?”
“연구한다고 서이들의 독까지 싹 쓸어 왔는데 저런 게 들어왔을 수도 있지. 그런데…… 저거 잘못 먹으면 죽는 것 아니었나? 먹어 본 사람들은 족족 죽거나 미쳤다고 했는데.”
“뭐, 일단 봐 보자고. 약선께서 설마 실격패를 하시겠어?”
“그렇지? 그래도 명색이 약선인데.”
천오는 그들의 입 모양을 샅샅이 훑고 귀를 기울이며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스승을 불쾌하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무례한 말을 지껄이는 자들도 알고 있는 것을 자신은 몰랐다.
낭탕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배운 적이 없었다. 이제 무심서에 있는 약재들은 전부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저건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해동과 동영에서만 나는 것이라서 무심서에 없던 건가. 스승님은 나중에 알려 주시려고 했을까. 아니면 몰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저들이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때,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천오가 화들짝 놀랐다. 퍼뜩 고개를 돌려 보자 가져온 낭탕근의 뿌리를 조제 단상의 도마에 놓고 얇게 써는 스승의 모습이 보였다.
[해동과 동영에서만 자라는 ‘미치광이풀’의 뿌리줄기를 낭탕근이라 한다. 잘못 복용하면 정말 이름대로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들 수 있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지만 적정량을 잘 쓴다면 그럴 일은 없다.]
잔잔하고 부드럽게 약초의 효능을 알려 주는 스승은 평소와 같았다. 천오는 왠지 혼자서만 전전긍긍하고 속상해한 것처럼 느껴져 부끄러웠다. 그러면 그렇지. 스승이 자신을 일부러 덜 가르칠 리 없었다. 행여나 성적이 좋지 않으면 실망하실까 두려워 한 글자도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배웠으니까.
스승은 썰어 낸 낭탕근 조각을 손에 쥐고 무언가 하는 것 같더니 곧 찻주전자에 넣었다. 정말 저 녹림과 오붓하게 차라도 드시려는 건가. 의구심이 살짝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빠르게 떨쳐 냈다.
[잘 쓴다면, 이것은 굉장한 진통제가 된다. 해열과 진정 효과가 있으며 고뿔과 천식에도 듣는다. 고약으로 만들어 오치(五痔)와 탈항(脫肛)에도 쓸 수 있다.]
담담하게 약초의 효능을 늘어놓은 스승은 물이 팔팔 끓고 있는 물 주전자를 화로에서 꺼내 찻주전자에 담았다. 낭탕근이 순식간에 우러나며 찻주전자 안에서 회오리처럼 둥글게 돌았다.
천오가 아주 어렸을 때 배운 다도(茶道)와는 어긋났지만 주전자를 드는 손짓, 기울이는 팔의 각도, 찻주전자 안의 물을 들여다보는 시선 하나하나가 지독하게 고요하고 품위 있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낭탕근으로 차를 끓인 스승은 김이 솔솔 올라오는 찻주전자와 빈 찻잔 두 개를 다반에 받쳐 탁자가 준비된 곳으로 걸어갔다. 마주 보도록 놓인 자리에 잔을 내려놓고 쪼르륵 찻물을 따랐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네게 보여 줄 것은 이 약초의 잘못된 사용법이다. 잘 보고, 배우진 말거라.]
투툭, 바닥에 무릎을 꿇은 백호철을 옭아매고 있던 포승줄이 끊어졌다. 초윤은 그가 있는 쪽으로 눈길도 한 번 준 적이 없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초윤의 소행인 것을 알았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묶여 있다 풀려난 백호철의 팔이 덜컹 늘어졌다. 험상궂은 인상의 얼굴은 어안이 벙벙한 듯, 그리고 아직 의심스러운 듯 초윤을 올려다보았다.
초윤은 허리를 곧게 펴고 마련된 자리에 앉아 제 몫의 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후 불고 한 모금 머금었다. ‘백호철을 고문하기 위해 만들어 온 독’을 초윤 자신도 함께 마시고 있는 셈이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장내에 명료하게 울렸다.
“일어나 앉아서 마셔라. 내가 네게 먹일 것은 이것뿐이다.”
“……뭔, 속셈이요?”
일각이 넘는 시간 내내 처절한 비명을 지른 백호철의 목소리는 보잘것없이 쉬어 있었다. 그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초윤의 맞은편에 앉았지만 아직 찻잔에 손을 대진 않았다.
초윤은 그를 재촉할 마음이 없는 듯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잔류한 고통이 좀 가실 게다. 위벽이 벗겨진 것처럼 아플 텐데.”
“…….”
초윤의 말마따나, 백호철의 온몸은 지금 식은땀으로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온몸을 찢고 태우는 듯한 아픔은 사라졌지만 독을 마시느라 혹사당했던 위장은 아직까지도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호소했다.
약선이 자신을 고문하지 않으리라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그를 직접 보았을 때 느낀 대로 생각하자면…… 적어도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백호철의 정신력은 며칠에 걸친 일로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드높던 긍지는 한순간에 부서지고, 동고동락하던 수하들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무공을 잃고 가축처럼 묶여 끌려와선 고문을 받다가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었다. 백호철이라는 인간을 구성하던 것들이 조각조각 흩어진 셈이었다.
투박하고 지저분한 손이 덜덜 떨리며 찻잔에 닿았다. 찻물이 조금 흘러넘쳐 손가락을 적셨지만 거죽이 두꺼워 뜨겁진 않았다. 백호철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따뜻하고 정갈한 차가 마르고 갈라진 입 안을 적신 뒤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크흐…….”
“데인다. 천천히 마셔라.”
순간 울컥 치미는 것을 참지 못하고 뜨거운 차를 단숨에 넘겼다. 꿀떡 삼킨 뒤 빈 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고 씩씩 숨만 몰아쉬고 있자 약선이 찻주전자를 들고 잔을 다시 채워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뒤 일각이 지나 두 잔의 차를 더 마시고, 백호철의 몸이 따뜻하게 데워질 때까지 약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별호가 허명은 아닌지 백호철의 고통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경합장 한가운데서 열린 다회(茶會)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난리가 난 건 당가의 장로들이 모여 앉은 상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