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렇게 몇 개의 산을 더 넘어갔을 때, 초윤은 문득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몸이 잠시 떠 있다가 하얀 옷자락을 팔락이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공기 중을 부유하는 파도 모양의 일그러진 힘이 보였다. 마치 여름날 아스팔트 위로 보이는 아지랑이나 분사된 가스처럼 어긋나는 풍경이 직접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초윤보다 한 박자 늦게 걸음을 멈춘 당염초가 뒷짐을 지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약선 어른이십니다. 여기서부터는 경공을 쓰지 않고 올라가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기도 전에 알아채시다니요.”
저 사람 눈에는 이게 안 보이나? ‘초윤’의 눈에만 보이는 건가?
누가 봐도 어색한 걸 잘 알아챘다며 칭찬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역시 ‘초윤’의 스펙이 장난 아니긴 하구나. 초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산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길은 나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초윤의 감이 틀리지 않았는지, 당염초가 뒤따르며 말했다.
“약선 어른께서 해독제를 만들어 주신 칠보단혼산과 오독탈명단도 이곳에 있습니다. 자오분심, 상린남영, 화골산……. 전부 팔대극독이라 불리던 것들이지요.”
“…….”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선대의 독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안 뒤로 당문은 계속 절치부심하고 있습니다. 고립된 지형, 느린 정보, 조그만 땅이라는 조건의 당문이 중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 어떤 세력보다도 독 하나만큼은 우위를 점해야 합니다.”
설명을 하던 당염초의 말은 점차 노인의 넋두리와 다짐으로 변하고 있었다. 초윤은 잠시 갈등하다가 입을 열었다.
“……해독할 수 없는 독이 반드시 너희들에게 좋으리란 법은 없다.”
“예,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연구하는 과정에서 명초는 손끝부터 마비되는 증상을 보이고, 정초는 뼈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숙지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예뻐하시는 손녀딸이 완전 죽을 뻔해요…….
원작 〈귀환영웅〉에서 당운금을 중독시켜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독이 바로 ‘당문 20년 노력의 결과물’을 활용한 것이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마교는 당염초의 비밀스러운 독 보관소를 홀라당 털어 소설의 중반부까지 주인공과 정파 세력에게 두고두고 피해를 입히는 극독 ‘석산’을 만들어 낼 예정이었다.
히로인을 감염시키는 용도라서 그런지 효과는 극악스러운 주제에 예쁜 이름을 달고 몸에 꽃무늬 흉터도 남게 해 주는 독이었다.
아무튼, 석산이 되기 전의 원형도 다루지 못해 보관소에 박아 둔 사천당문이 해독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주인공은 온몸에 열꽃이 오른 당운금을 안고 누구도 살아 돌아온 적 없다는 불귀 산맥을 올라 약선 초윤을 만난다……는 걸 초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천오 때문에 본래 스토리는 엄청 벗어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또 주인공이라면 꼭 천오가 아니어도 남궁세가나 마교와 대적할 가능성도 있잖아. 그럼 겸사겸사 미리 해치워 두는 게 낫겠지.’
초윤은 이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지독하게 무거웠다.
“네가 만든 독이 네 소중한 사람을 중독시키고,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들고…….”
“……약선 어른?”
“너는 그 상황이 되어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자만도 정도껏이지.”
그냥 입을 열지 말자. 말하는 빈도를 줄이자. ‘그러다가 당문 사람들이 정말로 중독돼서 아프면 어떡해요.’ 같은 말도 제대로 못 할 거라면 아예 안 하는 게 낫겠다.
이젠 초윤!!!! 하면서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그렇지만 또 사고를 쳤다는 것은 알았다. 설상가상으로 뒤에서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초윤은 내심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화났나? 어쩌지?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할까?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 이거 애들이 말을 밉게 한다고 타이를 게 아니라 초윤부터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이런, 괜한 입방정을 떨었나 봅니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약선 어른.”
“됐다.”
‘다행이다!!!! 화 안 났나 보다!!!!’
생각보다 차분하고 정말 미안해 보이는 당염초의 목소리에 초윤은 가장 먼저 환호성을 질렀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건 그다음이었다.
‘근데 웬 불쾌한 기억? 할아버지가 왜 미안해하지? 이건 저쪽이 기분 나빠해야 하는 것 아닌가?’
“…….”
퍼뜩 떠오른 생각에 초윤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당염초는 또 뭔가 멋대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나도 그런 경험 없다고, 그런 거 진짜 아니라고 해명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았다. 거기다 이 입으로 또 괜한 일을 벌이는 것보단 그냥 오해를 안고 사는 게 나을 듯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초윤은 마침내 당염초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당도했다. 눈앞에는 그저 우뚝 선 거대한 바위 절벽뿐이었지만 이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당염초가 앞으로 나서더니 품에서 동그란 패를 꺼냈다. 그리고 수풀에 덮여 있지 않은 절벽 단면의 한가운데에 척 하니 패를 문질렀다.
그러자 갑자기 우르릉⎯!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윤은 속으로 무협지 세계의 하이 테크놀로지에 감탄하며 절벽이 자동문처럼 열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게 기관진식이지? 무협지 특유의 기계 공학 같은 거 맞지?’
기본 골조는 톱니바퀴나 도르래를 이용한 클래식한 기계 공학인데 내력을 스캔해서 어디 유파의 것인지 알아내기도 하고, 적외선 감지 뺨치는 기술로 침입자를 잡아내 함정이 되기도 하는 그 신기한 학문!
배우기도 엄청 어렵고 대성하기는 더 힘든데 주인공이 매번 한꺼번에 베어 버리거나 아예 부숴 버려서 진법과 같이 쓸모없어지는 불쌍한 분야!
그리고 제갈세가 소속의 머리 좋은 캐릭터는 꼭 겸비하고 있는 소양!
섬서성의 중부에 있는 제갈세가는 어느 무협지에서든 기관진식과 진법에 통달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사천당문의 주력이 독이라는 인식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제갈세가 소속 인텔리 속성 여자 캐릭터는 꼭 얌전하고 예의 바르면서 주인공에게 순종적이지…….’
명색이 이성적인 천재라면서 주인공의 말이라면 질문 한 마디도 없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내며 껌뻑 죽는 제갈세가의 히로인을 볼 때마다 초윤은 기분이 찝찝했다.
작가가 학벌 좋고 똑똑한 여자에게 열등감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천재를 표현할 능력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작품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진 않았다.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문이 전부 열렸다. 초윤의 앞에 나타난 통로는 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했다. 당염초가 통로의 벽에 붙어 있는 횃불을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연이 있는 제갈세가의 친우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 옥패가 없다면 절대 드나들 수도 없고, 억지로 열린다면 곧장 옥패가 새까맣게 변하며 내부에 있는 독도 전부 매몰되는 기관이지요.”
우와, 진짜 엄청난 기술이다……. 결국 마교한테 뚫린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이건 ‘초윤’의 지식이 닿지 않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더 놀랍다.
초윤은 속으로 연신 탄복하며 당염초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투박하며 비스듬한 경사가 이어졌다. 현경의 고수는 어둠 따위에 시야를 방해받지 않지만, 일반인은 횃불이 없으면 발을 떼지도 못할 정도로 어두운 것 같았다.
한동안 밑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자 아래에서 희미하게 고소한 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초윤은 고개를 들고 냄새를 조금 맡다가 툭 물었다.
“……피마의 씨앗인가? 열을 쓰면 안 될 텐데 용케도 이만큼 만들어 냈구나.”
“냄새가 납니까? 코로 맡으면 안 되는지라 이곳에 두었는데 며칠 관리가 소홀했더니 그새 마개가 망가졌나 봅니다. 불민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약선 어른.”
당염초가 소매를 끌어 코와 입을 가렸다. 초윤은 이 정도의 독기로는 끄떡도 없어 여유로웠다.
그렇게 반 각을 더 아래로 내려간 뒤, 횃불을 끈 당염초가 문을 한 번 더 열고 나서야 초윤은 널찍한 지하 공동에 쭉 늘어선 단상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