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듣고 있느냐.”
“이런, 죄송합니다, 약선 어른. 약선 어른의 신기와 같은 지식에 놀라 잠시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당염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결례를 저질렀다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약선은 당염초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보관동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같은 설명을 한 번 더 반복해 주었다.
당염초는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 둘의 뒤로 땅이 울리며 보관동의 문이 단단히 닫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은 약선의 시야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당염초는 횃불을 밝혔다. 흔들리는 불꽃과 들쑥날쑥한 약선의 그림자,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작은 바람과 낮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당염초에게 또 다른 공부가 되었다.
길을 거의 다 올라왔을 때 당염초는 새롭게 안 지식으로 주책없이 들떠 있었다. 배움은 일흔이 넘은 나이의 노인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특히 저만치 앞을 걸어가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끌어당겨 주는 느낌은 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이라서, 당염초에겐 약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금과옥조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염초의 감동과 기쁨은 보관동의 입구를 나왔을 때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돌아가야 할 곳, 사천당문이 있는 방향에서 검은색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찌나 큰지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당염초는 순간 망연한 정신으로 약선을 챙길 생각도 못 하고 산을 뛰어 내려갔다. 이 상황을 높은 곳에서 봐야 했다. 약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도, 자신보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보관동이 있는 산을 벗어나자 경공을 쓸 수 있었다. 화경에 오른 무림인의 우악스러운 발걸음에 바위가 부스러지며 흘러내리고 우람하게 자란 나무들은 픽픽 허리가 꺾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관동의 앞에 있는 산꼭대기에 오른 당염초는 숨을 턱 삼켰다.
저 멀리 보이는 당문의 땅은 거대한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
“사저, 사저.”
사영은 눈을 번쩍 뜨고 벌떡 일어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옆에 천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을 흔들어 깨운 듯, 천오는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었다.
겨우 막 잠들었는데 왜 깨워 대는지 모르겠다. 사영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뭐야. 왜.”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요.”
“뭐?”
사영은 코를 킁킁거리며 허공의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주 희미하게 매캐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사영은 침상 바깥으로 다리를 내리며 말했다.
“주방에서 뭐 태운 거 아니야? 아님 뭐 만들다가 불붙였든가.”
천오는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사영을 보았다. 큰누나인 사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쯧 혀를 차고 맨발에 단화를 꿰어 신은 뒤 방을 나섰다. 사현이 자고 있을 바로 옆방에선 곯아떨어진 숨소리만 쌕쌕 들려왔다.
사영은 당문에서 빌려준 얇은 침의에 겉옷만 간신히 걸친 채 천오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문하생은 발을 들이지 못하는 손님용 숙소라서 그런지 복잡한 내부를 빠져나올 동안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침내 바깥에 나온 사영은 인상을 쓰며 코끝을 찡그렸다. 야외로 나오자 타는 냄새가 희석되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이거 뭐야. 누가 진짜 세간을 홀라당 다 태워 먹었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사영은 겉옷을 여미고 흙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빙글빙글 돌아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전각 뒤쪽에 눈이 닿은 사영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분명 어두컴컴해야 할 밤의 하늘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야밤에 해가 뜰 리는 없고, 불티가 바람을 타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아 세가의 어딘가에서 화재가 난 것 같았다.
사영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천오에게 말했다.
“너는 얼른 들어가서 현아를 데리고 나와. 그리고 어디 가지 말고 일단 여기 있어.”
“무슨 일이 정말 생긴 겁니까?”
아직 키가 작아 기와지붕 너머를 볼 수 없는 천오가 물었다. 사영은 아주 잠깐, 이 데면데면한 막내 사제한테 자신의 동생을 맡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부터 말했다.
“아무래도 불이 난 것 같아. 규모나 원인을 알아야 여기 숨어 있을지 도망을 갈지 아니면 도와줄지 결정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보고 올게. 불이 나면 건물 안에 있음 안 된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잖아.”
“……예. 알겠습니다, 사저.”
“짐 챙겨 올 생각하지 말고 빨리 데리고 나와!”
한마디 말을 남긴 사영이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낮에 당운금과 돌아다니며 세가의 지리를 외워 둔 덕을 톡톡히 봤다. 외곽을 벗어나 불길이 있는 곳으로 경공을 전개해 달려가자 차츰차츰 사람들이 보였다. 침의 차림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물통을 두어 개씩 끌어안고 곳곳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허둥지둥 나르고 있었다.
사영은 그중 목소리를 높여 지휘를 하는 일대제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불이 난 건가요? 저도 돕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눈엽각, 눈엽각에 화재가 났다고! 여태껏 안 일어나고 뭐 한 거야! 우물로 가서 얼른 물통 받아! 야! 물을 쏟냐! 보법 안 배웠어?”
정신이 없어 보이는 일대제자는 사영을 문하생으로 착각한 듯 와락 외치고 애꿎은 이대제자를 잡았다.
지휘는 머리가 차가운 사람이 하는 것 아닌가? 저럴 바엔 쟤도 그냥 물통을 나르는 편이 낫겠는데? 생각한 사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우물가에 가서 물이 가득 든 나무통을 받아 들었다.
금방 꺼질 불인지, 아니면 이곳저곳 번질 불인지 보기 위해선 직접 눈엽각에 가야 할 것 같았는데 손님이랍시고 빈손으로 털레털레 가면 예의상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사영은 가벼운 걸음으로 눈엽각에 향했다. 스승의 경합으로 위치를 알고 있기도 했지만, 당문의 문도들이 전부 그쪽으로 뛰고 있어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눈엽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사영은 남몰래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렸다.
‘야, 이거…… 힘들겠는데.’
당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약재와 독의 재료들을 보관하는 눈엽각의 규모는 거대했다. 몇백 명의 문도들이 기거하는 목선각과 연령각을 합친 크기로, 당문 내에서 만독각 다음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녹주각에 비견하는 으리으리함을 자랑했다.
얼마나 컸으면 눈엽각의 모든 재료를 꿰고 있다는 문주 당염초도 경합에서 재료를 골라 오는 데 이각이 걸릴 정도였다.
그런 눈엽각의 묵직하고 장대한 지붕이 마른 장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쉽게 꺼지지 않을 불인 것 같은데 어떡하지? 일단 애들한테 가서…… 데리고 올까? 아니면 숨어 있을까? 여기하고는 꽤 먼 외곽이라 거기까지 불이 번질 것 같진 않은데. 바람이 불면 또 다르려나?’
사영은 복잡해진 머리로 이런저런 방안을 생각하며 들고 있던 물통을 날랐다. 하지만 눈엽각을 뒤덮은 불이 워낙 거세 이 정도의 물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내부에 있는 바싹 마른 약초들이 불쏘시개라도 된 것처럼 불길을 부추기는 것 같았다.
‘사현이는 분명 도와주자고 할 텐데, 바깥에서 물만 나르는 정도라면 괜찮나? 우선 애들을 만나서 생각해야겠다.’
결정을 뒤로 미룬 사영이 빈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돌아섰다. 그러나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아악⎯⎯!!”
“윽!”
콰아앙!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뒤에서 덮쳐 온 세찬 바람이 사영의 풀어 헤친 머리카락을 왈딱 뒤집었다. 사영은 작게 신음하며 웅크렸다가 당황스럽게 두리번거렸다. 눈엽각에서 멀찍한 곳에 있는 연령각의 지붕이 터져 나간 채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다행스럽게도 모두가 불을 끄기 위해 나온 참이라 연령각에 남아 있는 문도는 없는 것 같았지만 폭발의 충격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속출했다. 사영은 먹먹한 귀를 문지르며 처음 겪어 보는 대규모의 난리 통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스승님께서도 안 계시는 지금…….’
스승님께서 계셨다면 어떻게든 해 주셨을 텐데. 설핏 불안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사영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덥석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고 뒤를 홱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사영 님, 여기 계셨습니까!”
“난 단주님?”
아침 이후로 통 보이지 않던 난위정이었다.
위정은 처음으로 여유를 잃은 다급한 얼굴이었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집이 활활 불타고 있으면 누구든 그렇겠지만, 단순히 놀라고 걱정스러운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위정과 함께 뛰쳐나온 듯 옆에 서 있던 구양선이 화재의 규모를 보고 입을 쩍 벌리더니 말했다.
“세상에, 단주님! 돕고 오겠습니다!”
“네, 도사님. 다녀오세요.”
위정은 후다닥 우물가로 뛰어가는 구양선을 성의 없는 손짓으로 보낸 뒤 어수선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찾는 이가 보이지 않자 사영의 양어깨를 잡고 급박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