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복면인들이 칼을 빼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사영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동생들에게 담을 넘으라고 한 뒤 몸으로라도 막아 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공이 모자란 사현이 잘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자신이 여섯 명에 달하는 살수들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끝까지 물고 늘어져 봐야 알 것 아닌가. 바닥을 기어 다니며 발목에 엉기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최대한 막아 주는 수밖에 없다.
사영이 악바리처럼 독살스러운 얼굴로 막 입을 열었을 때, 문득 한 줄기 전음이 귓가를 때렸다. 찍소리 하나 내지 않고 따르던 천오의 목소리였다.
[틈을 만들겠습니다. 달리십시오, 사저.]
‘어떻게?’라는 물음을 던질 시간은 없었다. 의문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사영은 이를 악물고 뒤로 팔을 뻗어 두 동생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았다. 피로 젖은 손바닥이 미끄러져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복면인들이 검을 치켜드는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존재가 거의 멈춘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쿵,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만이 원래의 속도대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검의 끝이 극점에 다다랐을 때.
형태 없는 파동이 사영의 뒤에서 부채꼴을 그리며 퍼져 나왔다. 얼마 전 남매가 전음을 연습하며 내력의 덩어리로 스승의 귓가를 후려치던 것에 일정한 진폭을 얹고 규모를 키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험한 기운이 가득한 산에서 영약을 먹어 가며 내공을 쌓아 온 천하의 기재가 작정하고 사람을 해치려 하는 위력은 전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크으아악!”
“끄아악!”
막대한 진동의 파도에 노출된 복면인들이 하나같이 검을 떨어트리고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머리를 징징 울리는 고통에 눈은 뒤집어지고 손끝은 벌벌 떨렸다.
복면인들은 곧 털썩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서 몸을 뒤재비꼬며 웩웩 헛구역질을 해 댔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땅이 기울며 핑 도는 느낌에 중심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이는 귓속을 파고든 진동이 고막을 찢고 반고리관을 뒤흔들었기 때문인데, 천오는 생각지도 못한 부가 효과였다.
사영은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몸을 낮추고 허벅지에 힘을 주어 단번에 복면인들의 사이를 뚫고 달려갔다.
단번에 많은 내력을 소모한 천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한 자루 주웠다. 복면인 중 하나가 이를 악물고 뻗은 손이 천오의 옷을 낚아채 잡아당겼지만 비단 찢기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천오는 침의가 뜯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고 복면인의 손을 자르기 위해 추켜올렸던 검을 내렸다. 그런 뒤 앞으로 고개를 돌려 발을 놀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속도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사저가 제 팔을 아예 뽑아 버릴 것 같았다.
한편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먼 불길을 응시하며 이곳을 벗어나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사영이 ‘아, 이대로라면 도망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조금 마음을 놓은 순간이었다.
“쓸모없기는. 약선의 제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막 바라보았을 때는 없었고, 하늘의 저편에 넘실거리는 불꽃을 이정표처럼 잠시 본 뒤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길목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영은 영문도 모른 채 절박하게 놀리던 걸음을 멈췄다. 턱 하니 숨이 멈추고 몸이 굳는 기분이었다. 몇 장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남자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지도 않은 채 가만히 사영을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어쩐지 그물에 얽매인 기분이었다. 몸을 바둥거리고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숨통을 옥죄일 것 같았다. 복면인 여럿이 앞길을 막았을 때도 받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저자의 범위 안에 발을 들였다. 내 힘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영이 입술을 콰득 짓씹었다. 파도처럼 몰아쳐 오는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만히 서서 이 모든 게 자신들을 피해 지나가길 바라는 것뿐이라니, 이렇게나 무력할 수가.
남자는 다른 복면인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잠행복에 얼굴을 모조리 가리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어스름한 밤은 유일하게 트인 눈가에도 그림자가 지게 했다. 겉으로 드러난 신체 부위는 손과 머리카락밖에 없었는데, 갈색의 긴 고수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묵색의 계(笄)를 꽂아 고정한 게 유독 눈에 띄었다.
그 상태로 한쪽 어깨에 커다란 포대 자루를 둘러멘 남자는 곧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길을 터 놓으라 했지 목격자를 모조리 죽이라 하진 않았습니다. 합류하기로 한 지점에 사람이 있으면 융통성을 발휘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나든 하면 될 일이지, 기어코 살인멸구를 하려다 이 꼴이 난 것 아닙니까.”
“면…… 면목 없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들을 보면 퍽이나 좋아라 하겠습니다. 기밀도 못 지켜, 약선의 제자 몸에 상처도 내, 심지어 꼬맹이한테 당해서 발발 기어 다니기까지 하다니. 당신들에게 매달 들어가는 막대한 금은 뭐고 이 일을 맡긴 신뢰는 또 뭡니까. 그의 것이 만만합니까?”
“아닙……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남자가 감정 한 톨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신랄하게 말하자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복면인들이 쥐어짜듯 대답하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여전히 평형 감각이 회복되지 않은 듯 휘청거렸지만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사영과 아이들에게는 시선도 한 점 주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쳤다. 신형이 교차될 때 숨을 들이켰던 사영이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남자의 뒷모습을 쫓았다.
사영은 그가 들고 있는 짐이 무엇인지 얼추 알고 있었다. 저것이 만약 ‘그자’가 맞다면 저 남자는 난위정을 비롯한 당문의 장로들을 단신으로 뚫고 나왔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멘 채.
반면 다른 이유로 놀란 천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새까만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분명 이전에 들어 본 목소리, 만나 본 사람이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약선과 일적결이 불길을 보고도 남았을 겁니다. 따라잡혀서 미주알고주알 불어 버릴 바엔 자결하십시오.”
“예, 대장!”
부하들을 되돌아가게 만든 남자는 고개를 돌려 천오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멀리 불타는 눈엽각에 있던 무언가가 터졌는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구쳤다. 깜깜한 하늘에 수놓인 맹렬한 불길이 남자의 눈에 반사되어 황금빛 안광을 번뜩이게 했고, 천오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벼락같은 깨달음에 몸을 떨었다.
폭발은 단숨에 사그라졌다. 남자는 묵묵히 몸을 돌려 발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사위가 잠잠했다. 남은 건 방금 죽을 고비를 넘겨 아연함을 벗어나지 못한 아이 셋뿐이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사현이었다.
“누, 누나. 팔, 팔이…….”
“아…….”
맞다. 다쳤었지. 사영이 얼빠진 얼굴로 팔을 들어 상처를 보려 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누나!”
“아냐, 아니야. 괜찮아.”
사현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사영의 옆에 앉았다. 사영이 연신 괜찮다 말해도 울기 직전의 얼굴로 옷을 찢어 상처의 위를 꽉 동여맸다.
“진짜 괜찮아. 너는 안 다쳤어? 아까 헛디뎌서 무릎 찧었잖아. 막 당겨서 미안해.”
“으…….”
사영이 조금 멍한 목소리로 말하자 사현은 기어코 눈물을 터트렸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를 꽉 악문 뒤 뚝뚝 떨어지는 눈물만 연신 훔쳤지만 울고 있다는 건 명백했다.
“야, 야. 왜 울어.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냥 살갗만 좀 베인 거야.”
동생이 우는 모습은 오랜만에 본 누나가 당황하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피가 엉겨 있어 오히려 역효과였다.
“아니, 이…… 이걸 어떡하지. 가만히 있어 봐. 얼굴 좀 닦자. 누가 보면 개방의 거지인 줄 알겠다.”
“윽…… 흐…… 허어어엉!”
사현은 결국 큰 소리로 울며 누나의 품에 들이박듯 안겼다.
“아, 아니, 야. 괜찮다니까.”
화들짝 놀란 사영이 괜찮다는 말을 연발하며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 줘도 요지부동이었다. 사영은 침의가 눈물과 콧물로 척척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한참 동생을 달랬다.
그러던 중 고개를 돌리자, 천오가 아까와 같은 자세로 미동도 없이 서서 남자가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보이는 천오의 얼굴은 기이한 희열과 영탄에 젖은 듯 이상하게 상기된 표정이었다.
“너…….”
사영은 천오를 부르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무엇이든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거라. 스승의 교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천오가 느끼는 감정은, 예상컨대 사영으로선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