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언제부터였을까.
-백복령과 대추나무, 인삼을 넣었습니다. 불면에 좋습니다.
스승이 저 남자의 손에 약첩을 쥐여 주셨을 때부터?
-오늘 밤에 환자를 보러 갈 것이다.
기녀들을 기루가 아닌 곳으로 굳이 불러내어 접촉했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욱 앞이다. 더욱 이전에, 천오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점에.
-양매창이 무엇인지 아느냐.
촛불 아래서 약을 빚으며 넌지시 물으셨던 그때부터.
그때부터 스승의 혜안은 이곳을 보고 계셨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섬서성에서 자연스럽게 당문의 비밀스러운 상단과 접촉하고, 그들을 은밀히 이끌어 녹림왕과 맞닥뜨리게 만들었다. 그런 뒤 무력화시킨 녹림왕을 당문의 손에 넘겨주면서 시간을 벌고 기루에 본적을 둔 또 다른 세력과 접촉했다. 질병의 치료라는 미명하에 모든 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물 흐르듯 일어났다.
[곧 다가오는 그믐날에 붉은 자작나무 숲으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자가 남긴 전음 한 마디가 머릿속을 자꾸만 맴돌았다. ‘붉은 자작나무 숲’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그날 밤 스승과 함께했던 자신밖에 없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신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스승께선 분명 오늘 제자들이 저 남자와 마주치게 될 것까지 알고 계셨단 뜻이었다. 그렇기에 천오의 안면을 미리 익히게 만들어 이를 듣게 하셨겠지.
침입자들이 제자들에겐 상처를 입힐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월담을 하기 쉽도록 적절한 핑계를 대어 일적결과 함께 잠시 먼 길을 가셨고.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신 건지, 스승의 목적은 무엇에 닿아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레 뜻이 드러난 뒤에야 깨닫고 감탄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경탄도 매일같이 하면 질리기 마련인데 스승님은…….
스승님께선…….
천오가 입술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 왔다. 늘 굳어 있던 입꼬리가 저절로 히쭉해쭉 웃으며 올라가려 했다. 이것은 무엇에서 기인한 기쁨인가.
나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신 분이 이토록 대단하다는 자부심? 언젠가 스승께서 보여 주신 광활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을 앞에 두고 느끼는 경외감?
아니…… 다르다. 그땐 이렇게 온몸의 말단이 저리지 않았다.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과 함께 오싹오싹하지 않았다.
천오는 제 몸을 꾹 감싸 안고 웅크렸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몰아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실감이 들었다. 그 폐허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사위어 갈 일만 남았던 자신을 덥석 집어 와 살게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고 치밀한 인물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믿고 특별하게 여기는지도.
“서문천오.”
소슬바람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천오는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귀퉁이가 불길로 밝아진 밤하늘을 등지고 선 스승의 뒤에서 열기를 띤 바람이 넘실거렸다. 흐트러지며 하늘거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불티가 어우러져 빛났다. 그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사붓사붓 걸어와 멀거니 서 있던 천오와 주저앉은 사영, 그리고 울고 있는 사현의 몸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남매를 품에 와락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다행이야, 다행이다. 많이 놀랐겠지. 미안하다.”
그들이 제자들을 해치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가는 길을 지체하셨을 터였다. 그리고 불안이 현실이 되어 돌아오자 이토록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았다.
잘못한 건 멍청하게 사람을 못 알아본 그자들 탓인데.
그때까지도 가만히 선 채 스승만을 바라보던 천오가 사르륵 무릎을 꿇고 그의 곁에 앉았다. 하얀 무명옷에 휘감긴 스승의 몸을 한가득 끌어안아 얼굴을 묻었다. 그런 뒤 인이 박인 약 향을 폐부 깊이 들이마시고, 곧 다시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이렇게 현명한 당신이라면 그 폐허에서 죽어 가던 나를 데려와 키우는 이유가 있겠지.
내가 무엇이 되어 무엇을 하며 이 세상에서 무슨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전부 알고 계시겠지.
이분의 머릿속에는 분명 이미 커다란 세상이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겠지.
“반드시 비밀로 하겠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복수 이외에도 살아갈 목적이 생겼다.
이제는 그 어떤 의문도 갖지 않을 것이다.
천오는 정말 행복하게 웃고 그의 품에 뺨을 비볐다. 서문세가가 무너지기 전에도 이렇게 기뻤던 적은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인생을 모조리 뜻대로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랐다. 그 안에서 자신은 안전하고 완벽하며 만족스러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야밤에 난데없는 봉변을 맞아 속으로 엉엉 울고 있던 초윤은 생각했다.
얘는 또 왜 눈이 맛이 간 채로 영문 모를 말을 하는 거지?
◇
다음 날, 사천당문의 곳곳에선 타고 남은 나무의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황급히 돌아온 약선과 일적결의 신묘한 수법으로 전소는 면했지만 절반은 넘게 타 버린 두 전각에서 아직도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새 낯빛이 퀭해진 당문의 제자들과 무사들은 멍한 눈으로 아무 곳에나 앉아 있었다. 잘 곳을 잃어버린 이대제자들은 그늘진 곳에서 퍼질러 자거나 숙소에 두고 나왔던 소중한 물건을 울적하게 떠올렸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밤새 당문이 잃어버린 재산과 사라진 백호철을 떠올리며 죽을상이었다. 단 하루 만에 사천당문이 입은 피해는 막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난리 통에 다친 사람들은 저마다 줄을 지어 목선각 앞에 서 있었다. 줄의 맨 앞에는 약선을 위시한 여러 명의 중년인들이 상처를 봐 주고 있었다. 당문 소속의 의원과 약학에 자신이 있는 일대제자들이었는데, 그중 가장 큰 기대를 받는 건 당연하게도 약선 초윤이었다.
“약선 대협! 온 청두를 다 뒤져내어 가져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많은 대황과 생오얏, 닥풀, 한수석, 황백입니다!”
“그래.”
등에 한가득 짐을 지고 달려온 이대제자들이 초윤의 옆에 지게와 봇짐을 내려놓았다. 초윤은 그 모습을 힐긋 보고 무심하게 대답한 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보아하니 위중한 자는 없는 것 같구나. 피부만 덴 자는 오얏이나 상엽, 측백엽, 황촉규화를 찧어 바르고 피부 깊숙한 곳까지 열기를 쬐였다면 대황, 백급, 황금, 황련, 황백을 조합한 뒤 물에 개어 바르거라. 그만하면 나을 것이다.”
“예? 예…….”
약선의 신묘한 치료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한 이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크게 다친 자가 없으니 붙잡을 명분도 찾지 못했다. 특히나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 눈을 크게 뜬 채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던 의원들은 아쉬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기소침한 사람들을 뒤로한 초윤은 아이들의 기척을 짚어 겅중겅중 걸어갔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큰일이 일어나서 그런지 애들만 두는 것이 영 걱정스러워 치료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당문의 장로들이 아침부터 하도 사정을 해서 나와 보았지만 다 죽어 가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칼퇴근을 하는 초윤이었다.
‘어? 녹주각에 없네?’
홍풍각에서 사단이 벌어졌던 탓에, 아이들의 잠자리는 녹주각이 되었다. 사천당문에서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전각에서 잠시 지내게 된 아이들은 지쳐 곯아떨어졌다가 깨어나기가 무섭게 홍풍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대들보를 보고 흥분했다.
우와, 우와, 연신 탄성을 자아내며 전각 내부를 구경하는 아이들을 붙잡아 타인의 집을 함부로 쑤시고 다니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나왔더니 아예 밖에서 노는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전각을 지나쳐 뒤로 가자 연못과 함께 조성된 후원이 보였다. 아이 셋뿐만 아니라 당운금과 구양선도 함께 있었다. 연못에 무릎이 잠길 정도로 들어가 사영에게 물을 튀기는 운금을 본 초윤은 허둥지둥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사영, 사현,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스승님.”
다섯 명의 눈이 한꺼번에 초윤에게 향했다.
“젖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저도 사현이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고, 상처도 한 번 더 동여맸어요.”
“바람이 아예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감는 것도 좋지 않다. 상처를 압박한 힘이 강해도 좋지 않아.”
초윤은 팔불출처럼 사영의 양팔과 사현의 양 무릎을 다시 한번 살폈다. 발라 둔 고약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데, 연못에 들어가 있던 운금이 휘적휘적 물에서 나오더니 초윤의 앞에서 양손을 모아 잡고 머뭇거리다 말했다.
“움……. 죄송해요, 약선 대협. 언니한테 멋대로 물을 뿌려서…… 언니가 연못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장난이었는데……. 언니, 미안해.”
양쪽으로 묶은 머리를 곱게 땋아 동그랗게 묶은 채 오물오물 사과하는 아이는 참 기특하고 귀여웠다. 모두가 바쁘고 피곤한 탓에 놀아 주는 이가 없으니 나이가 비슷하고 비교적 한가해 보이는 언니 오빠들을 보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