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남매와의 첫 만남은 예전에 기억을 떠올려 알고 있었다. ‘초윤’은 세상을 유람하며 혹여 자신이 모르는 약재가 있나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아이들을 보게 되었고, ‘이렇게 내 눈에 들어온 것도 하늘의 뜻인가’ 하는 미적지근한 선량함으로 도와주었을 뿐이었다.
그 앞뒤로 벌어진 일은 ‘초윤’의 관심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딱히 아는 게 없었다. 남매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았는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후에 빙의한 초윤도 아이들의 아픈 기억을 괜히 들추게 될까 두려워 쉽게 건드리지 않았던 주제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초윤을 앞에 두고 희는 자신의 찻잔을 채운 뒤 고운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잘그락, 장신구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임 소저가 참 욕심이 나서 그때부터 선물을 준비했는데…… 부디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내 사과도 받아 주었음 좋겠고. 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타이밍 좋게 방의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리며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와 무사 이외의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아까부터 알고 있었던 초윤은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공 실력은 꽤 되는 것 같았지만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아서 언급하지 않았다. 저자가 과연 누구이기에 선물이라고 하나 싶었다.
문밖에 양손을 모은 채 공손히 서 있는 건 사영과 비슷한 또래인 한 청년이었다. 순박하고 투박한 얼굴과 햇볕에 탄 피부, 짧게 깎은 머리와 울퉁불퉁하게 근육을 키운 몸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초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영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장위?”
초윤을 따라 고개를 돌려서 그를 보게 된 사영의 목소리는 돌에 깔린 벌레의 몸부림처럼 작고 미약했다. 사영은 곧 주춤주춤 방석에서 몸을 일으켜 뻣뻣한 무릎걸음으로 기듯이 그에게 다가갔다.
“장위? 장위 맞아? 정말 너야?”
“아, 아이고, 대장. 맞으니께 어여 일어나. 아니, 아니지, 앉어. 왜 일어나고 그려.”
장위라는 청년은 사영의 반응과 초윤, 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초윤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변성기가 끝나지 않아 낮고 어색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뒤따랐다.
“안, 안녕하시, 아니, 처음 뵙겠심더, 약선 대협! 지는 장위라고 하고예. 여기 대장…… 아니, 사영이허고는 어렸을 적 동무입니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더!”
이건…… 어떻게 된 상황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희의 선물이 사영이의 옛날 친구인 것도, 사영이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고 있는 것도 이해가 안 갔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살아…… 살아 있었어? 어떻게? 내가…… 너를 버렸는데.”
“어휴, 버리기는. 문주님이 다 말씀해 주셨어야. 사현이도 죽을 뻔했다면서? 그럼 의원님을 따라가는 게 맞제.”
기어코 장위의 앞까지 다가가 그가 실재하는 것을 확인하듯 더듬더듬 만져 보는 사영의 손은 볼썽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사영의 약한 모습을 처음 보는 초윤으로선 입이 떡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에 쐐기를 박듯, 희의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단은 지금 하오문 소속의 조직이에요. 좋은 대장에게 많은 걸 배운 것 같아서 거둔 지 7년쯤 되었지요. 급하게 오느라 모두 데려오진 못했지만, 장위는 가장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무리를 조금 했네요.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강서단?
적어도 이 주제에서 초윤이 아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붙잡고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희는 선수를 쳤고, 정보량에서 밀린 초윤은 이제 얌전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초윤은 사영에게서 시선을 떼고 희를 향해 돌아앉았다. 다과 상을 사이에 두고 자신과 정반대의 모습을 한 사람을 마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희는 초윤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옥을 통째로 깎아 만든 잔은 딸그락, 맑은 소리를 내며 희의 손끝에서 멀어졌다.
“먼저…… 노여워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약선 대협의 행적을 듣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불과했지, 절대 이곳저곳에 캐고 다니던 것은 아니에요.”
“광동에서 사천까지 오려면 하루 이틀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야, 섬서성에 계실 때부터 당문을 따라 이곳에 오시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뭐야? 어떻게? 난위정인가?
위정에게 이미 한 번 뒤통수를 맞아 본 초윤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의심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검지를 입술의 중간에 대고 해맑게 웃는 희의 입에서 나온 진상은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일우가 지급으로 알려 주었거든요. 이는 약선 대협을 믿고 말씀드리는 것이니 난 단주에겐 반드시 비밀이에요.”
일우?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다.
일우…….
……조우일.
초윤은 머리에 쟁반을 맞은 기분으로 난위정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던 측근을 떠올렸다. 누구보다도 충성심이 깊어 보이던 그 사람이 실은 희의 수하였다니. 그 여우 같은 난위정을 감쪽같이 속이며 미리 안배를 깔아 두었다니. 초윤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계략이었다.
게다가 희가 난위정에게만 수하를 심어 두었을 리는 없었다. 이 말인즉슨, 이제 중원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사실 하오문 소속이라고 의심해도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초윤의 혼란은 겉으로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속에 어떤 풍랑이 몰아치고 있든 초윤은 차분하고 고고하게 앉아 표정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재미없는 반응도 좋은 건지, 희는 낭랑한 목소리로 조잘조잘 즐거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름 비밀스럽게, 최대한 빨리 사천에 왔는데 약선 대협께선 전부 다 눈치채고 계셨던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어요. 서신이 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덕분에 이렇게 만날 곳을 미리 알려 드릴 수도 있었고, 소문이 자자했던 약선 대협의 약을 직접 볼 수도 있었네요.”
아니야, 그거 정말 아니야…….
그냥 약 팔아서 생활비 좀 벌려고 했는데 애를 데리고 기루에 들어갈 순 없어서 나와 달라고 빈 거야…….
초윤은 무수히 불거지는 오해 속에서 데자뷔를 느꼈다. 아무래도 희 역시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초윤이 의심 가지 않을 내용의 교묘한 편지를 기루에 돌려 희와 연락을 취하고 접선 장소를 정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모든 상황이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 들어맞아서 뭐라 말을 얹을 수도 없었다. 결국 초윤은 거의 해탈한 채 대화에 끌려갔다.
“그날 진찰을 해 주셨던 아이들은 말씀하신 대로 거처를 분리한 뒤 쉬고 있답니다. 정말 선술이라도 쓰신 것처럼 씻은 듯이 낫고 있어요. 여와도 항상 잠을 자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요즘은 낯빛도 좋고요. 아, 장위. 이제 잠시 돌아가 계세요.”
그래도 약은 잘 들었다니 다행이네……. 당연하겠지……. 다른 약재와는 차별화된 즉각적인 성능을 위해서 애들 먹일 영약도 다져 넣었는데 그 값은 해야지…….
초윤과 희가 본격적으로 말을 나누기 시작하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고, 장위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여와라는 이름의 갈색 머리 무사는 방의 미닫이문을 다시 꼭 걸어 잠근 뒤 구석진 곳에 우두커니 선 채 기척을 죽였다.
초윤은 고민 끝에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당문의 전각을 불태운 것은 과하셨습니다. 하물며 발각당하면 망설임 없이 살수를 쓰게 하시다니, 제 아이들뿐만 아니라 누군들 죽는다면 큰일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당문과 완전히 척을 질 생각이셨습니까.”
전각이 불탄 순서나 중상자와 사상자가 없는 것으로 봐선 인명 피해가 없도록 치밀히 세운 계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했다면, 왜 사영이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칼을 휘둘렀지?
그러자 처음으로 희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눈썹을 팔자로 일그러트리고 입술은 어물어물 웃으며 다른 곳을 보는 눈은 민망함이 가득했다. 희는 잘 다듬은 손톱 끝으로 제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것이…… 정말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제 뜻이 아닌 일이었어요. 일우가 당장 오늘 밤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하는데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적고…… 그렇다고 해서 여와에게 모든 걸 맡기자니 부담이 커서 영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썼는데, 원래 문답무용으로 죽이는 일만 하던 이들이다 보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네요.”
“…….”
“약선 대협의 제자들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당문의 침의로 갈아입은 탓에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어요.”
희가 덧붙였다.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며 부끄러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오문은 원래부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대부분은 기녀와 점소이였지만 시장의 상인도, 떠돌이 무림인도, 손을 잃은 도박꾼도 있었다. 버림받은 살수 몇 명을 영입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희는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약선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백호철은 더 이상 그곳에 있어선 안 됐어요. 마교가 겉으로 드러나기엔 아직 일러요. 두 쪽이 난 백협맹은 순식간에 삼켜질 테고, 그 뒤에 영웅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잖아요.”
마교의 이야기가 불쑥 나오자 얌전히 앉아 있던 아이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중에도 마교와 연관이 있는 천오는 딱딱하게 긴장해 허벅지 위에 올린 양손을 주먹 쥐었다.
초윤도 초윤 나름대로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이걸 희가 어떻게 알고 있지?’
녹림왕 백호철에게 고독을 쓰고, ‘그분’이라는 존칭을 들을 만한 인물.
현 마교의 교주이며 천오의 할아버지인 천마(天魔) 주패군밖에 없었다.